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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아무 이유 없이 지금 있는 자리를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다. 해야 할 일도, 버텨야 할 이유도 분명하지만 문득 떠나버리고 싶고 '여기가 아닌 어딘가'를 떠올리게 되는 순간들. 이런 마음을 우리는 쉽게 털어놓지 못한다. '도망'은 어딘가 책임을 회피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감정은 설명되지 못한 채 마음 한 편에 남아있다. 연극 <내가 살던 그 집엔>은 바로 그 말하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극은 2025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연극 부문에 선정된 작품으로 1970년대 산업화와 가부장제 속에서 밀려난 여성들의 삶을 비춘다.


포스터 속에는 하나의 집과 그 안에 여러 인물이 얽혀있다. 같은 공간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각기 다른 위치에 서 있는 인물들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는 듯하다. 과연 이 집의 주인은 누구이고,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극은 이처럼 서로 얽혀있는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관객은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된다. 이 중 무엇이 진실일까.

 

 

 

진실은 사실에 의해 결정되는 것일까


 

[포맷변환][크기변환]내가 살던 그 집엔 - 제공 극단 적, ©sol__Kim (37).jpg

제공 극단 적 / ©sol__Kim

 

 

극 초반, 모든 인물은 김추자의 '거짓말이야'에 맞춰 춤을 춘다. 경쾌한 리듬과 달리 이 장면은 묘한 긴장감을 남긴다. 마치 지금부터 펼쳐질 이야기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진실인지에 대해 미리 의심하게 만드는 장치처럼 느껴진다.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마마'와 '엄마'가 있다. 화교 출신인 '마마'는 어느 곳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엄마'는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서로 다른 이유이지만,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극은 1막과 2막을 거치며 반복되는 듯 보이지만 조금씩 어긋난다. 같은 사건을 말하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인물의 시선에 따라 상황과 감정은 달라진다. 이 과정에서 관객은 자연스럽게 의문을 가지게 된다. 우리가 보고 있는 내용은 진실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만들어진 또 다른 이야기일까.


이러한 혼란은 '마마'의 이야기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마마는 남편에게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지만, 끝내 그것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남편은 그녀의 말이 아닌 주변의 의심과 타인의 이야기를 더 믿었고, 두 사람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극은 그들의 결말을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지만, 마마에게 비극적인 결과가 닥쳤음을 암시한다.


이 지점에서 이 작품이 <오셀로>에서 출발했다는 점이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오셀로>에서 비극은 거짓말에서 시작되지만, 그것이 진실로 받아들여지는 순간 완성된다. 사실이 아닌 말이라도 누군가 그것을 믿어버리는 순간, 이야기는 되돌릴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결국 <내가 살던 그 집엔>이 던지는 질문도 여기에 있다. 진실은 정말 사실에 의해 결정되는 것일까. 아니면 누가 그것을 믿느냐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일까. 이 작품 속에서 진실은 언제나 불완전한 상태로 남아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끊임없이 도망치고 싶어 했을까


 

[포맷변환][크기변환]내가 살던 그 집엔 - 제공 극단 적, ©sol__Kim (44).jpg

제공 극단 적 / ©sol__Kim

 

 

이들에게 도망은 더 나은 곳으로 향하기 위한 선택이라기보다 지금의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한 마지막 발악에 가까워 보인다. 화교 출신으로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했던 '마마'는 결국 자신이 설 수 있는 자리를 찾지 못했고,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엄마' 역시 자신의 삶을 살 수 없었다.


3막에서 등장하는 '꾸엔'의 이야기는 이러한 상황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꾸엔은 결혼 이주 여성으로, 마마가 죽고 난 뒤 남편과 함께 사는 여자다.


"무서웠어. 정말 무서웠어. 그런데도 졸리더라."


이 짧은 대사는 그 집에서의 삶이 어땠는지 단번에 드러낸다. 남편이 누군가를 죽였다는 사실의 두려움 속에서도 잠들 수밖에 없는 상태, 그곳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이미 버티는 것 자체가 한계에 가까웠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이들에게 도망은 용기 있는 결단이라기보다 버틸 수 없을 때 겨우 떠올렸던 마지막 선택이었다. 그래서 이들이 향하는 곳은 더 나은 미래라기보다 그저 조금 덜 고통스러운 곳에 가깝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서로를 만난다. 비슷한 이유로 떠나고 싶었던 사람들은 서로의 이야기를 알아보고 믿어준다.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그들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집 대신 서로에게 머물렀던 시간


 

[포맷변환][크기변환]내가 살던 그 집엔 - 컨셉2 제공 극단 적 ©sol__kim.jpg

제공 극단 적 / ©sol__Kim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집은 하루의 끝에 돌아가 쉴 수 있는 공간이다. 하지만 이 연극 속 여성들에게 집은 그런 의미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분명 집 안에 머물고 있었지만,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집이 있었지만, 그것은 끝내 ‘자신의 집’이 아니었다.


이러한 모습은 인물들의 설정에서도 드러난다. '마마', '엄마', 그리고 ‘나’. 이들은 이름이 아닌 호칭으로 불린다. 보통의 연극에서 인물에게 이름이 부여되는 것과 달리 이들은 고유한 이름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집 안에서도 그리고 그 밖의 세계에서도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이들의 위치가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서로의 이야기를 알아보고 받아들인다.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도 서로를 이해하려는 시도, 그리고 그 이야기를 끝까지 놓지 않으려는 태도는 쉽게 지나치기 어려운 장면으로 남는다.


기술은 계속해서 우리의 거리를 좁혀왔다. 이제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도 어렵지 않게 연결되고, 몇 번의 클릭만으로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관계는 더 넓어졌지만, 그만큼 깊어졌는지는 쉽게 말하기 어렵다.


결국 이 연극은 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하면서도, 끝내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말한다. 같은 공간에 머물고 있었지만 누구도 그 집에 속하지 못했던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의 이야기를 외면하지 않았다. 집을 갖지 못했던 이들이 서로의 이야기에 머물렀던 시간. 어쩌면 그 순간만큼은, 그들은 서로에게 잠시 ‘집’이 되어주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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