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분야에서는 하나의 콘셉트가 성공하면 비슷한 스타일의 앨범이 쏟아지는 일이 흔하다. 뉴진스가 등장한 이후 청량하고 학생다운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운 음악이 많아졌고, 에스파가 '쇠맛'이라는 독특한 음악 세계관을 구축한 뒤에는 그와 비슷한 결의 곡들이 다수 발매되었다. 성공은 곧 트렌드를 만들고, 트렌드는 다시 비슷한 음악을 양산한다. 그래서 요즘 무대를 보면 신선함보다는 반복되는 공식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경우가 있다.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눈길은 매번 새로운 무대와 음악을 선보이는 아티스트에게로 향한다. 그런 아티스트 중 한 명이 이찬혁이다. 이찬혁은 노래뿐 만 아니라 전시, 퍼포먼스까지 다양한 활동을 통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나가고 있는 눈에 띄는 아티스트다.
대부분의 가수가 'OO표 음악'이라는 특정 콘셉트를 중심에 두고 그와 비슷한 스타일의 음악을 선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그는 매 앨범과 무대마다 새로운 콘셉트를 실험하며 자신의 감각을 선보인다. 그리고 그 변신들은 단순한 시도에 그치는 게 아니라 늘 대중들을 설득시킨다.
그래서 2년 연속 청룡의 부름을 받은 올해, 많은 이들이 청룡영화상의 결과를 기다렸을지 몰라도 솔직히 그보다 먼저 이찬혁의 무대가 기대되었고, 기다려왔다. 지난해에도 강렬한 퍼포먼스를 선보였는데, 과연 이번에는 어떤 방식으로 또 새로운 무대를 보여줄까 하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그리고 이번 무대는 그 기대를 완벽하게 충족시켰다.
제45회 청룡영화상 - 죽음을 주제로 노래하다
작년 제45회 청룡 영화상에서 그는 ERROR 앨범에 수록된 타이틀곡 '파노라마'와 '장례희망'을 선보였다.
이렇게 죽을 순 없어
버킷리스트 다 해봐야 해
짧은 인생 쥐뿔도 없는 게
스쳐 가네 파노라마처럼
'파노라마'의 시작과 함께 그는 샴페인 잔을 들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파노라마'는 죽음을 마주한 화자의 입장에서 진행되는 곡이다. 의사가 사망선고를 하고 얼마 남지 않은 시간. 가사 속의 화자는 버킷리스트는 다 해봐야 한다며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사실 그가 노래를 부르는 내내 샴페인 잔에 담긴 음료가 출렁출렁 거리는 것을 보며 무대에 쏟지 않을까. 쏟으면 안 될 텐데 내내 불안했다. 그런데 마치 그는 관객의 이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춤을 추며 잔의 음료를 흘리고, 끝내 2절로 넘어갈 때 그 잔을 과감히 던져버린다.
해당 영상에 인상 깊었던 댓글이 있다. [지금껏.. 저 샴페인 하나 지키려고 나를 잔에 가뒀었네]
샴페인 잔은 마치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놓은 경계나 사회적 시선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샴페인 잔을 들고 노래를 부르며 퍼포먼스 한 이유는 결국 누구의 눈치도 보지 말고, 스스로 한계를 정해두지 않은 채 원하는 걸 해보라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종종 상상했던 내 장례식엔
축하와 환호성 또 박수갈채가
있는 파티가 됐으면 했네
'장례희망'은 노래로만 들었을 때도 좋았다. 두렵게 느껴지는 어둠을 마냥 어둡게만 풀어내지 않고, 우리는 다시 만날 거라는 암시를 통해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너무 슬퍼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이 노래가, 청룡영화상이라는 누군가는 수상을 기대하며 앉아 있는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울려 퍼지고, 관객들이 웃으며 그를 바라보는 모습과 겹쳐지면서, 마지막 입관 퍼포먼스까지 이어지는 순간 비로소 ‘장례희망’이라는 곡이 완성되었다고 느꼈다.
사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편이다. 어렸을 때는 어른이 되면 죽음이라는 존재가 덜 무서울 줄 알았지만, 여전히 죽음을 떠올리면 눈앞이 깜깜해지고 답답해지는 기분이 든다. 그런 이야기를 주변에 꺼내면 “어차피 모든 사람은 다 죽는데 왜 그런 걱정을 하냐”라는 대답이 돌아오곤 했다. 그래서 죽음이 무서워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도, 대부분 의아해하는 반응 때문에 결국 죽음을 떠올릴 때면 재빠르게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려버리고 회피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찬혁의 ‘장례희망’은 그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은 덜어준 음악이었다. 어차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장례식은 마냥 슬프기만 한 자리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축하해 주는 자리도 될 수 있지 않을까.
작년 청룡영화상에서의 이찬혁 ‘파노라마’와 ‘장례희망’ 무대는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죽음’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지금 당장의 현실에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하라는 것. 무대 위에서 자유롭게 노래하는 그의 모습도, 자신 또한 그렇게 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수도 없이 본 무대 영상이지만 알고리즘에 뜨면 어김없이 클릭하게 되고, 또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제46회 청룡영화상- 사랑을 주제로 노래하다
작년에 이어 이찬혁은 올해도 청룡영화상의 부름을 받아 무대에 올랐다. 이번 무대에서는 지난 7월 발매한 두 번째 정규앨범 EROS의 타이틀곡 '비비드라라러브', 그리고 수록곡 '멸종위기사랑'을 선보였다. 특히 코러스와 댄서들이 함께하며 저번보다 훨씬 풍성해진 구성으로, 시각적으로도 꽉 찬 무대를 선보였다.
‘멸종위기사랑’은 발매 직후부터 큰 사랑을 받았고, 나 역시 이번 앨범에서 가장 좋아하는 곡이다. 사랑을 주제로 한 노래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매년 수없이 쏟아져 나오지만, 요즘 사회 분위기를 보면 서로를 배려하기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점점 짙어지고 있다. 그래서 과연 지금 시대에도 ‘사랑’이 존재할까 하는 의문이 자연스레 따라온다. 경쟁 사회 속에서 자기 이익을 챙기는 게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타인에 대한 관용이 희미해졌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Back in the day
한 사람당 하나의
사랑이 있었대
내일이면
인류가 잃어버릴
멸종위기사랑
이 가사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아주 뚜렷하게 드러낸다. ‘지금 시대의 사랑은 정말 멸종 위기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듯이. 그럼에도 이 노래는 끝까지 비관적이기만 하진 않다. 가스펠 형식의 편곡 덕분인지, 사랑이 사라지는 듯한 시대 속에서도 여전히 사랑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을 전달한다.
'멸종위기사랑'에 이어 자연스럽게 '비비드라라러브'로 노래가 전환된다. 그래서인지 멸종위기사랑을 듣고 나면 비비드라라러브가 더 선명하게 이해된다. 멸종위기사랑이 사랑의 ‘멸종’을 이야기한다면, 비비드라라러브는 애초에 이상적인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 위에서, 그럼에도 그런 사랑을 찾으려는 이들에게 건네는 노래다.
'비비드라라러브'처럼 이상적 사랑이 지배하는 '빛나는 세상'은 오지 않더라도, 그것을 바라는 마음에는 빛이 난다.
- <비비드라라러브> 앨범 소개
가사를 보면 이 문장이 그대로 살아 있다.‘빛나는 눈으로 너는 말했지’라는 가사처럼, 우리는 누군가가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고 열심히 쫓을 때 ‘눈이 빛난다’고 표현한다. 결국 이 노래는 이상적인 사랑이 실제로 존재하느냐보다, 그 사랑을 믿고 찾으려는 마음 자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이야기한다. 어쩌면 지금 이찬혁이 무대 위에서 자유롭게 현 사회를 비춰내는 모습이 유독 빛나 보이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지 않을까.
이번 무대는 청각적으로는 물론 시각적으로도 완성도 높은 무대였다. 특히 이찬혁이 “연기와 춤이 함께하면 좋겠다”라는 의견을 냈고, 그에 따라 전문 댄서 대신 뮤지컬 배우들이 댄서로 참여했다. 무대를 함께 즐기는 배우들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행복해지게 만든다. 여러 사람이 모여 완성한 이번 무대는 마치 뮤지컬 영화를 보는 듯한 여운을 남긴다.
대중성과 예술성 사이, 이찬혁의 줄타기
결국 이찬혁의 음악이 사랑받고 주목받는 이유는, 그는 언제나 대중성과 예술성의 경계에서 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면서도 자신의 언어로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내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쪽에 완전히 기울지 않으면서, 그 사이에서 매번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음악을 가져온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익숙함 속에서도 낯선 충격을 받고, 그 지점에서 매력을 느낀다. 이번 청룡영화상 무대 역시 그는 대중성과 예술성 사이의 줄타기를 성공적으로 해냈다. 앞으로도 이러한 무대들처럼, 이찬혁만의 무대를 오래 보여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