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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지난 1월부터 이어온 2025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에 선정된 34편의 신작 여정이 어느덧 막바지에 다다랐다. ‘창작산실’은 제작부터 유통까지 단계별 지원을 통해 연극, 창작뮤지컬 등 기초 공연예술 분야의 우수한 신작을 발굴하는 한국 공연계의 중추적인 지원사업이다. 연극 <내가 살던 그 집엔>, 창작뮤지컬 <적토_고삐와 안장의 역사>, <조커(Joker)>, , 무용 <개한테 물린 적이 있다.>, 음악 <낭만을 빌려주는 노인>으로 이어지는 4차 라인업 중 하나인 극단 돌파구의 신작 [튤립](김도영 작, 전인철 연출)이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무대에 올랐다.

    

본 작품은 1904년 러일전쟁에서 시작된 역사의 파고가 어떻게 일상의 질서가 되고, 한 사람의 이름이 되며, 결국 인간관계의 방식마저 변형시키는지를 서늘하게 응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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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일상의 규칙이 되다


 

작품의 시간은 1904년 러일전쟁을 기점으로 만주와 경성을 거쳐 1920년대 말 도쿄의 한 집 안으로 이어진다. 거대한 역사적 장면은 무대에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그 영향은 인물들의 말과 선택, 그리고 침묵 속에 유령처럼 감지된다. 전쟁이라는 외부의 힘은 어느 순간 집 안의 규칙이 되고 감정의 방향을 결정한다. "조씨를 사형하라"는 외침에서 연상되는 조명하 의사를 모티브로 한 역사적 긴장감은, 안온한 집 안에서도 가시지 않은 전쟁의 흔적으로 나타난다.


등장인물은 다섯이다. 가족을 잃고 일본식 이름으로 살아가는 조선인 쿠로(막산), 일본인으로 키워진 조선인 청년 쥬리프, 그리고 퇴역 후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일하며 제국의 욕망을 수행하는 야마토와 그의 아내 에리코, 이 모든 흐름을 지켜보는 가정부 미호까지. 이들의 일상은 평온해 보이지만, 그 기저에는 잔혹한 시간들이 도사리고 있다.

 

연극의 모든 서사는 흙 속에 파묻힌 튤립의 구근을 향해 수렴하고 있다. 전인철 연출은 이 극에서 튤립이 세 가지 층위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1. 아이가 태어난 비극의 장소로서의 튤립 밭.

2. 쿠로가 일본으로 넘어 와 꾸린 학교의 작은 정원.

3. 그리고 그 밭에서 태어나 도쿄로 ‘옮겨 심어진’ 존재인 쥬리프(チューリップ, 일본어로 튤립).

 

쥬리프는 쿠로(막산)라는 구근에서 태어났으나, '내선일체'라는 무늬의 일본식 잎을 달고 자라난 존재다.

 

 

 

욕망의 꽃


 

김도영 작가는 튤립의 역사적 속성을 빌려 인간의 내면을 해부한다. 본래 튤립은 욕망의 상징이었다. 17세기 네덜란드 튤립 광풍 당시, 사람들은 바이러스 감염으로 불규칙한 줄무늬가 생기는 브레이킹(Breaking) 현상을 ‘하늘이 내린 변이’라 믿으며 집착했다. 이러한 희소성에 대한 갈망은 곧 신분 상승의 도구가 되었고, 땅속에 아직 피지도 않은 알뿌리를 대상으로 한 ‘종이 위의 거래’는 비이성적인 폭등과 몰락을 가져왔다.

 

이 실체 없는 욕망의 역사는 극 중 야마토의 태도에서 그대로 재현된다. 야마토는 쥬리프를 발견한 곳이 튤립 밭이 아니었다면 결코 그를 데려오지 않았을 것이라 말한다. 이는 타인의 아이를 탐하는 비틀린 소유욕이자, 조선의 대지를 집어삼킨 제국의 거대한 탐욕에 대한 서늘한 은유다. 쥬리프를 자신의 정원으로 옮겨 심은 야마토의 행위는, 타인의 근원을 소유하려는 지극히 개인적이고도 잔인한 본능에 가깝다. 그러나 정작 그 소유의 끝에서 야마토는 냉소 섞인 질문을 던진다.

 

 

“조선인은 일본인이 될 수 있나? 내선일체는 과연 가능한가?”

 

“20년을 일본인으로 키웠는데, 고작 2년 만에 애가 어떻게 변했는지 봐. 내 집에서도 실패하는 게 내선일체야. 흥미롭지 않아?”

 

 

 

꽃의 생존법


 

튤립은 꽃이 아니라 구근을 키우는 식물이다. 보이지 않는 뿌리는 땅속에서 또 다른 생을 준비하며 본질을 보존한다. 그러나 에리코에게 중요한 것은 땅 밑의 진실이 아니라, 지상에 피어난 화려하고 평온한 꽃잎의 가계다.

 

그녀의 “엄마는 뭐든지 할 수 있어”라는 대사는 극 후반부, 보기좋은 형상의 가정을 수호하기 위해 쿠로에게 독이 든 차를 건네는 복선으로 완성된다. 이는 아들의 구근을 돌보는 모성이라기보다, 자신이 가꾼 정원의 매끈한 잎을 해치는 침입자를 제거하려는 비정함에 가깝다. 사랑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이 잔인한 생존법은, 각자의 방식으로 소중한 것을 지키려 했던 인물들의 필사적인 선택과 충돌하며 결국 한 인간을 파멸로 몰아넣는다.

 

 

 

존재한 적 없는 ‘검은 튤립’을 향한 광망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은 일반적인 연극 무대와 달리 천막 뒤로 몸을 숨길 공간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이 광활한 무대 위에서 인물들은 자신의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서 있어야 한다. 공간적 특성이 특이한 연출로 이어진 것인지, 연출에 의해 변형된 공간인지는 모르겠다. 극 중 배우들은 자신의 장면이 끝났음에도 무대 밖으로 완전히 퇴장하지 않는다. 쥬리프가 부재한 상황에서 야마토 부부가 나누는 비밀스러운 대화조차, 쥬리프 역의 배우는 무대 한 켠에 서서 그 모든 말의 무게를 빤히 지켜보고 있다. 쥬리프가 실은 막산의 아들이자 조선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에도, 극에 동참하지 않는 배우 또한 무표정하게 앉아 무대를 응시하고 있다. 등장인물 누구도 진실로부터 도망칠 수 없는 이 '상시 노출'된 무대는 역사의 감옥과 같다.

 

극의 메인 포스터에는 '어쩌면 한번도 존재했던 적이 없는' 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연극을 보기 전 그 의미를 도통 알 수 없었지만, 극이 끝난 후 그것은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검은 튤립’ 같은 사랑,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체성과 근원을 잃어버린 이들이 갈구하는 허망한 이상향임을 어렴풋이 알듯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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