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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잊혀야만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 왕과 사는 남자 [영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뜻함을 기억하려 하는 사람들

by 이상아 에디터
2026.02.19 20:00

 

 

‘역사는 승리한 자들의 기록이다‘라는 말이 있다. 특히나 영화나 드라마 속 사극은 어질고 지혜로운 왕이나, 전장에서 크게 승리한 장수 또는 총명한 충신들에 관한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2026년 오랜만에 극장가에 활기를 띠는 사극 이야기의 주인공은 조선의 가장 비극적인 왕 ‘단종‘과 그를 모시던 촌장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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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유정난 이후 왕위에서 쫓겨난 어린 왕 ‘이홍위’는 유배길에 오른다. 한편 옆 마을에서 유배 온 양반 덕에 마을이 풍족하게 변했다는 말을 들은 촌장 ‘엄흥도‘는 먹고살기 힘든 산골마을 ’광천 골‘을 살리기 위해 관아에 간청하여 유배지를 자청한다. 고위직 간부의 양반이 오길 바라던 그의 바람과는 다르게 복위의 희망이 없어 보이는 단종을 마주한 엄흥도는 크게 실망한다.

 

일거수일투족 그의 일상을 감시해야 하는 그는 야위고 삶의 의지가 없어 보이는 이홍위의 모습에 점점 마음을 기울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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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읽어낸 ‘가족 영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한국 극장가는 전례 없는 침체기를 맞이하였다. 이에 투자자와 제작사 모두 신작 개발에 소득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고, 300~400만 관객이 기본이던 한국 영화는 100만을 넘기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나는 단순히 OTT 플랫폼의 성장 때문만은 아니라고 본다. 가장 영화값이 15,000원 이상 오르면서 극장 접근성은 현저히 낮아졌고, 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 심리는 높아졌다. 이에 영화계에서도 ‘안정성’을 확보한 작품만이 개봉할 수 있었고, 2025년 43편의 한국 영화만이 극장가에서 관객들을 만날 수 있었다. 2026년이 된 지금 한국 영화계는 사실상 위기가 아닌 ‘침체‘되었다는 암울한 생각이 들던 와중 오랜만에 입소문이 도는 영화가 바로 ‘왕과 사는 남자’였다.

 

큰 스케일이나 화려한 액션신도, 뛰어난 연출력도 없는 이 영화가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따뜻함‘을 읽어주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크다.

 

’단종’에 대한 기록은 역사에서도 짧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12살에 즉위하여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왕위와 충신들을 뺏기고 홀로 강원도 유배지에 떨어져 17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왕. 짧은 기록만큼 악하다 할지라도 그동안 사람들은 ’수양대군‘에 대한 이야기에 더욱 흥미를 느꼈다. 마치 피해자보다 살인마에 대한 이야기를 더욱 궁금해하는 것 같이 말이다.

 

그러나 AI 시대가 돌입된 이후 사람들은 다시 ’인간다움‘에 포커싱을 돌리며 따뜻한 감성을 찾아 나서고 있다. 숏폼보다 롱 폼이 다시 유행하고, 인공지능 플랫폼을 활용하여 사람들은 만나고, 자기다움을 드러내고 찾고 싶어 한다. <왕과 사는 남자>가 만약 마을 사람들로 인해 점점 따뜻하게 변해가는 단종의 이야기가 아닌, 왕위를 다시 찬탈하기 위해 애쓰는 권력 중심의 이야기로 펼쳐졌다면 이만큼 극장가에서 흥행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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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혼’이라 불릴만한 배우들의 연기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 얘기 안 할 수가 없을 것이다. 특히 주연인 ‘엄흥도’ 역의 유해진 배우의 진가를 다시 한번 느끼게 해 주었다. 특히 인상 깊었던 신은 유배지에 올 양반을 기다리며 엄흥도가 혼잣말을 하며 지나가는 장면인데, 짧고 평범하게 지나갈 수 있는 신을 혼자 낄낄 웃기도 하고 말 흉내를 내기도 하면서 마치 연극 무대 위에서 독백만으로도 무대를 꽉 채우는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었다.

 

엄흥도라는 인물은 마냥 마을을 위하는 촌장이라기보단 자기 자신을 위해 움직일 때도 많고, 유배지로 온 사람을 이용해 마을의 부흥을 힘써 보려는 산업적인 마인드를 갖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될수록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기도 하고, 인간다운 면모를 많이 보이는 인물이기에 캐릭터의 경중을 표현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대사의 톤이나 애드리브 등을 적절히 조절하면서 극을 이끌어가는 그의 모습에 감탄 안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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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들의 ‘눈빛‘에 대해 얘기 안 할 수 없는데, 특히 ‘이홍위‘ 역의 박지훈 배우는 영화 초반 적은 대사임에도 불구하고 왕위에서 쫓겨날 때의 좌절과 충신들의 죽음을 마주할 때의 슬픔, 그리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그 텅 빈 눈 속이 그가 캐릭터를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있는지 보여주었다.

 

강렬한 빌런 캐릭터인 ‘한명회‘ 역의 유지태의 변신도 눈길을 끈다. 그동안 여러 사극 속의 한명회는 세 치 혀를 가진 뱀과 같은 인상으로 많이 그려졌었는데, 유지태는 역사적 기록에서 착안하여 풍채가 아주 좋고 활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늠름한 장수의 모습으로 캐릭터로 그려내었다. 어린 왕의 왜소한 체격과 대비되어 영화 내내 그가 등장하기만 하면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 집중 안 할 수 없는 힘을 그려내고 있어 몰입감을 자아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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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연출력


 

<왕과 사는 남자>는 뚜렷하게 흥행하는 이유도 보이고, 영화 후반에 갈수록 캐릭터들의 성장과 마음에 몰입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장면들이 많이 보인다.

 

가령 엄흥도와 마을 사람들이 노루 사냥을 하는 모습은 무거운 궁중의 모습을 쇄신시키려 가벼운 유머 코드를 넣었지만, 마치 억지웃음을 유발하는 듯한 개그 프로를 보는 모습이었다. 또 따뜻한 영화이긴 하지만 작은 일 하나에도 우르르 몰려와 단 하나의 감정을 느끼는 듯한 마을 사람들 간에 어색한 유대감들은 한국 영화에서 많이 보이는 낯간지러운 장면들이었다.

 

무엇보다 ‘호랑이’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는데, 유난히 튀는 CG 이야기보다는 이홍위가 호랑이를 잡는 장면에서 그가 너무 ‘신‘적인 존재처럼 갑자기 그려지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비록 마을 사람들이 그 신 이후에 왕을 왕답게 보기 위해 설정된 장치라고 하더라도 호랑이가 상장하는 바가 분명히 있을 텐데, 단순히 활 거의 몇 번으로 그 장면을 끝내는 것이 많이 아쉽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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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항준 감독이 그린 ’인간다움‘의 포커싱은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에 있는 것 같다. 어쩌면 홀로 고립되어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가지도 못하는 상황이 오늘날의 삶의 의지를 잃은 청년들의 모습과도 비슷해 보인다. 스스로 살아갈 힘도 생각도 없는 그가 마을 사람들이 정성껏 만든 밥을 먹지 않고 버릴 때 엄흥도는 ‘마을 사람들이 정성껏 만든 밥을 먹지도 않고 돌려보낼 때 이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 아픈 것은 아닌지 맛이 없는 것은 아닌지 오히려 걱정을 한다‘라고 말하며 이홍위를 설득시킨다.

 

엄격한 기준과 잣대로 서로를 비난하는 게 당연해진 요즘 시대에 ‘당신은 당연히 살아 마땅한 사람’이라고 외치고 있는 이 영화의 대사 한마디에 다시 돌아올 봄날의 따뜻한 바람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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