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 대신 스크롤
취미가 있다. 대뜸 음원 스트리밍 앱에 접속해, 막 업데이트된 최신 앨범들의 ‘앨범 소개’를 무작위로 읽어 내려가는 것. 재생 버튼 대신 스크롤을 누르는 일. 사운드는 잠시 미뤄두고, 문장부터 통과한다.
어쩌다 가슴에 꽂히는 한 문장을 만나는 순간, 그날은 작은 유레카다. 아직 멜로디도 모르는 상태이지만, 이미 설득당한 상태.
대부분은 멜로디에 끌리고, 가사에 끌려 플레이리스트에 새로운 곡을 추가하곤 한다. 나 역시 그렇다. 하지만 때로는 문장이 먼저 나를 붙잡는다. “이 앨범은 어떤 시간을 지나왔을까?” “이 곡은 어떤 질문에서 시작되었을까?” 이에 대한 답 몇 줄이 플레이리스트의 문을 열어젖힌다. 그렇게 문장에 설득돼 추가한 곡의 수가 꽤 된다. 귀보다 먼저 읽어버린 음악들.
앨범 소개는 일종의 비하인드 티켓이다. 창작자가 이 음악을 왜 만들었는지, 어떤 시간을 통과했는지, 누구와 어떤 온도로 작업했는지 힌트를 남긴다. 한 장의 앨범에는 작곡가와 작사가, 프로듀서와 세션, 아트 디렉터까지 수많은 사람의 시간이 얹힌다. 소개글은 빛나는 결과물이 만들어진 좌표를 알려 준다. 나는 그 좌표를 읽는 게 좋다.
우리는 너무 쉽게 ‘결과’를 소비한다. 차트 순위, 조회수, 스트리밍 수치. 하지만 그 숫자 이전에 있었을 무수한 시행착오와 회의, 그리고 다시 모니터 앞에 앉았을 누군가의 마음은 살피려 하지 않는다.
모든 문화예술은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 나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다 무릎이 꺾일 듯한 순간들을 통과했을 누군가의 시간에 시선을 건네고 싶다. 그래서 앨범 소개를 읽고, 개봉을 앞둔 영화의 제작자 인터뷰를 찾아본다.
창작의 흔적을 추적하는 일. 결과 이전의 서사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이렇게 나는 창작의 과정에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지인들에게도 종종 이 취미를 공유한다. “이 앨범 소개글 한 번 읽어 봐.” 그렇게 보낸 캡처 하나가 또 다른 재생 버튼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소리를 듣고 있다. 그렇다면 한 번쯤은 소리를 읽어 보는 건 어떨까. 멜로디보다 먼저 도착하는 문장이, 당신의 플레이리스트를 조금은 다르게 바꿔 놓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조금 더 본격적으로, 나를 사로잡았던 몇 개의 앨범 소개를 꺼내보려 한다. 멜로디가 아니라 문장으로 먼저 사랑하게 된 음악들. 스크롤 끝에서 발견한 작은 유레카들을.
에디터의 심금을 울린 앨범 소개들
(1) 자이로 ‘NEW GENERATION’
[아티스트가 직접 소개하는 트랙 리스트]라는 문구 뒤로 각 트랙에 대한 진솔한 설명과 의도가 간결하게 드러나 있다. 모든 트랙의 소개가 인상 깊지만, 그중에서도 가슴에 박히는 건 3번 트랙 ‘With you’와 6번 트랙 ‘나리타에서 너’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3. With you
Composed by 안중재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순간순간이 그림 같고 행복할 것 같아요.
이 세상에 둘만 남겨져도 마냥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지 않나요? 그 순간은 그리며 감상해 주세요.
그런 사람과 함께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6. 나리타에서 너
Composed by 안중재
일본 나리타에 친척들 보러 갔을 때 쓴 곡인데 그곳에 이모 두 분이 계셔요.
근데 그때 당시 제가 이별을 한 상태여서 아무 데도 못 나가고 그리운 마음에 그 친구를 그리며 그곳에서 쓴 곡이에요 노래하듯이 치려고 노력을 많이 한 곡이고 그때 감정을 끌어내야 해서 녹음을 마치고 며칠 동안 감정이 요동친 기억이 나네요.
곡의 의도와 곡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노래에 강한 힘을 불어넣는다. 의도를 모르고 들었다면 그저 ‘좋다’라는 감상에 머무르고 말았을지도 모르는 자이로의 가사 없는 곡들. 하지만 간결한 문장들을 통해 곡의 이야기를 전달받은 이상, 이 노래들은 그저 좋다는 감상에서 그치는 노래가 아니게 된다. 강한 힘을 부여받은, 생동감 넘치는 곡이 된다.
(2) 호피폴라 ‘And Then There Was Us’
배순탁 평론가의 앨범 리뷰로 앨범 소개가 시작된다. 앨범과 호피폴라를 관통하는 진솔한 문장들 사이에서도 유독 눈에 밟히던 단락이 있다.
뭐로 보나 기대 이상이다. 무엇보다 억지로 쥐어짜낸 듯한 멜로디나 구성이 없어서 마음에 쏙 든다. 사운드적인 성취 면에서도 그렇다.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소리를 욱여넣은 구석이라고는 없다. 요컨대, 정확하게 섬세하고, 촘촘하다. 아직 더 있다. 효과음을 적절히 사용했고, 편곡의 묘를 발휘해 스케일로 구현되는 이미지가 곡의 바탕이 되는 서사를 집어삼키지 않도록 했다. 간단하게, 그 어떤 곡에서든 멜로디가 본연의 힘을 잃지 않는다는 뜻이다.
호피폴라의 노래를 들을 때면 배순탁 평론가의 리뷰와 같이 ‘억지로 쥐어짜낸 듯한 노래’라는 감상이 들지 않아 좋다. 무의미한 가사가 반복된다거나, 억지로 중독성 있는 멜로디를 만들어 낸다거나. 호피폴라의 노래들은 이와 같이 그냥 찍어 낸 듯한 노래가 아니다.
해당 앨범에서 가장 좋아하는 곡은 2번 트랙인 ‘The Love’이다. 호피폴라의 멤버 아일이 작사, 작곡에 참여한 해당 곡은 “그는 드디어 당신을 미워하기 위한 이유를 찾았대요” 라는 간결한 소개를 지니고 있다.
지나간 사람들의 흔적들로
내 맘속엔 깨질 듯한 녹슨 거울이
말라버린 저 물가엔
더러워진 어린아이가 보여
우린 널 싫어하기 위해서
몇 가지 이유를 찾았어
Oh where is the love
(중략)
저 길가엔 늘 원하던 빛난 거울이
넘쳐버린 저 물가엔
나를 닮은 어린아이가 보여
우린 널 싫어하기 위해서
몇 가지 이유를 찾았어
Oh where is the love
곡에 대한 명확한 해석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곡에 대한 간결한 소개 문장에서 미루어 유추해 보자면, 그가 미워하기 시작한 ‘당신’은 상처 입은 그의 내면이자 어린 시절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그러한 상처를 미워하기 위한 이유는 바로 ‘사랑’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식으로 앨범 소개는 곡을 해석하는 힌트가 되어 주기도 한다. 그러니 다음에 스트리밍 앱을 열 때는 '앨범 소개'에 머물러 보길 추천한다. 여태 즐겨 듣던 노래의 앨범 소개를 읽어 보는 것도 좋다. 이전에 음악을 감상하던 때와는 확연히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될 거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