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만화 장르는 주로 소년 만화 쪽이다. 이와 달리 잘 안 보는 장르가 있다면 모험 판타지 장르다. 용사가 마왕을 무찌르기 위해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 재밌고 흥미롭지만 이상하게 그 내용을 제대로 본 적은 없다. 그런 내가 재밌게 본 모험 판타지 애니메이션이 있는데 바로 『장송의 프리렌』이다.
그리고 얼마 전, AK PLAZA 홍대에서 진행 중인 애니메이션 전시 <장송의 프리렌전 - 모험의 끝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를 보고 왔다. 그 전시를 따라가 보며 왜 내가 이 작품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다시 한번 깨닫는 시간이 되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모험 판타지 만화라고 하면 용사가 최종 보스인 마왕을 무찌르기 위해 여정을 떠나는 이야기들이 많이 보인다. 그렇지 않은 이야기도 있지만 보통은 목표나 끝을 향해 나아가는 시작점부터 도착점까지의 과정을 보여준다. 그러나 애니메이션 『장송의 프리렌』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시작된다.
『장송의 프리렌』의 주인공은 인간 용사가 아닌 영원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엘프 마법사 프리렌이다. 천 년이 넘는 시간을 살아온 프리렌에게 인간 기준으로 긴 10년은 찰나에 불과하다. 이런 시간 감각 차이 때문인지 보통 한 작품의 중심이 될 법한 '용사 일행이 마왕을 무찌르는 이야기'는 1화의 일부로 빠르게 지나간다.
용사 힘멜, 마법사 프리렌, 성직자 하이터, 전사 아이젠으로 이루어진 용사 일행은 마왕을 무찌르고 평화를 되찾은 뒤, '50년 후 다시 만나자'라는 약속을 남긴다. 프리렌에게는 순식간인 그 50년이 흐르고 엘프인 프리렌과 드워프 아이젠을 제외한 힘멜과 하이터는 이미 노인이 되어 있었다. 이들은 과거 함께 보았던 유성을 다시 보기 위해 마지막 여정을 떠났는데 그 여행은 용사 힘멜의 마지막 이야기로 남는다.
힘멜의 죽음을 계기로 프리렌은 힘멜과 같은 인간을 이해하고자 다시 길을 나선다. 그리고 하이터가 돌봐주고 프리렌이 제자로 삼게 된 마법사 페른, 아이젠의 제자인 전사 슈타르크와 함께 새로운 여정을 시작한다. 목적지는 죽은 이를 만날 수 있다고 전해지는 천국과도 같은 곳이다. 이 여정은 과거 용사 일행이 걸어왔던 발자취를 따라가는 길이기도 하다. 그 여정 속에서 과거를 추억하기도 하고 새로운 만남과 이야기가 시작되기도 한다. '끝이 시작이 되는 이야기', 잔잔하지만 깊게 빠져드는 몰입감 덕분에 모험 판타지를 즐겨 보지 않던 나 역시 『장송의 프리렌』에 자연스럽게 빠져들게 되었다.
전시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면 <장송의 프리렌전 - 모험의 끝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작품의 주요 장면을 단순히 나열하기보다 프리렌 일행의 여정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애니메이션을 다시 보는 느낌이 아니라 그 길을 함께 되짚어 걷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용사 일행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프리렌 일행처럼 말이다.
전시장 초반부는 용사 일행의 과거 여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미 알고 있는 장면들이지만 실제 공간에서 다시 마주하니 그 감정이 또 다르게 다가왔다. 특히 유성을 보는 장면을 꾸민 전시장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프리렌이 오랜 시간을 지나 기억을 되돌아보듯 관람객 역시 장면 하나하나를 따라가며 이야기의 결을 다시 느끼게 된다. 이 점에서 전시는 프리렌 일행의 여행 방식과 닮았었다.
용사 힘멜의 동상 앞에서는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멈췄다. 화면 속 인물이 아니라 긴 시간이 쌓인 하나의 흔적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프리렌에게 힘멜이 반지를 끼워주는 장면을 재현한 공간은 그 순간을 거리에서 내가 직접 보는 듯했다. 또한 미믹에게 잡아먹히는 장면을 체험할 수 있는 포토존은 작품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작은 웃음을 더해주었다.
프리렌과 페른의 마법 지팡이, 슈타르크의 도끼를 직접 들어볼 수 있는 체험 공간도 인상 깊었다. 예상보다 묵직한 무게 때문에 마법사도 체력과 근력이 필요하고 전사의 무게가 크구나 싶었다. 이는 단순한 소품 전시가 아니라 인물들의 여정을 손으로 느껴보는 경험에 가까워서 좋았다.
전시장 곳곳에는 애니메이션의 명장면을 담은 영상과 함께 작은 퀴즈 이벤트도 마련되어 있었다. 작품의 세계관을 떠올리며 문제를 풀다 보니 관람객이 아니라 이 세계 여행자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전시는 『장송의 프리렌』이 전하고자 했던 '시간을 건너는 느낌'을 다시 한번 천천히 체감하게 만든다.
이번에 애니메이션 『장송의 프리렌』 2기가 방영되었는데 <장송의 프리렌전 - 모험의 끝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를 통해 2기를 보기 전 다시 한번 이야기를 되짚어볼 수 있어 좋았다. 이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은 물론 모험 판타지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추천하고 싶은 전시다. 모험의 끝에서 시작된 이야기를 따라 걸으며 나 역시 프리렌처럼 시간을 건너 기억을 되짚는 여행을 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이 전시는 하나의 관람이 아니라 마음에 남는 또 하나의 여정으로 오래 기억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