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는 홍콩 영화의 황금기였다. 이 시기 홍콩 영화 산업은 제작 편수와 유통 규모 면에서 세계 3위에 이를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산업적 전성기 속에서 왕가위 감독은 90년대 홍콩 뉴웨이브를 대표하는 작가로 부상하며, 기존의 장르 영화와는 다른 독자적인 미학을 구축했다.
아비정전(1990), 중경삼림(1995), 해피투게더(1998) 등 다양한 대표작이 있지만, 그중에서 필자가 최고로 꼽고 싶은 작품은 ‘화양연화(2000)’다. 첫 개봉일로부터 25년이 흘렀다. 한 해가 저물고 새로운 해가 다가오는 날, 9분 가량 연장된 ‘화영연화 특별판’이 개봉했다.
그동안 소문으로만 전해지던 미공개 에피소드가 추가됐다. 오로지 극장에서만 만날 수 있다. 애초 감독이 구상했던 영화의 완결에 가깝다고 하니,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왕가위 영화는 여백이 낭자하다. '화양연화 오리지널판' 역시 열린 결말로 끝이 났다. 미공개 에피소드를 통해 관계의 결말을 보고 싶은 관객이 있다면, 기대를 내려놓으라고 말하고 싶다.
미공개 에피소드는 2001년을 배경으로 한다. 양조위와 장만옥이 다시 등장하지만, 그들은 주 씨와 진 부인이 아닌 전혀 다른 인물이다. 오로지 스핀오프의 재미를 위해 개별적인 에피소드를 추가했을까? 왕가위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크레딧이 오르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려 본다.
그 시절은 지나갔다. 그 시절이 가진 모든 것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주 씨와 진 부인의 관계는 한 시대와 맞물려 있다. 1960년대 인구 급증과 더불어 탕러우(여러 가구가 방 한 칸씩 나눠 사는 주거 형태)와 같은 공간이 확산되었고, 개인 공간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홍콩은 영국의 통치 아래 서구식 자유주의와 중국 전통 문화가 혼재된 사회였다. 주 씨와 진 부인의 관계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영화 후반에는 캄보디아 왕족이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었던 드골 장군의 방문을 환영하는 뉴스가 삽입된다. 캄보디아는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이후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놓였고, 왕가위가 살아온 홍콩 역시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영화에서 주 씨와 진 부인은 2046호에서 만남을 갖고, 이후 ‘2046’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2046년은 중국이 약속한 일국양제의 끝을 앞둔 마지막 해이다.) 이를 보면 왕가위가 얼마나 시대적 감수성에 민감한지 알 수 있다.
영화에서 ‘그 시절’은 주 씨와 진 부인이 함께 시간을 보내던 시기를 의미하는 동시에, 그들을 둘러싼 시대 전체를 가리킨다. 미공개 에피소드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처럼 보이는 두 사람의 관계가 시대적 배경에 따라 어떻게 전개되는지 보여준다. '화양연화 2001'에서 왕가위는 카메라 무빙과 색감마저 다르게 사용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크레딧이 오르기 전의 이야기가 중요한 법. 미공개 에피소드는 극장에서 직접 관람하기를 권한다. 이 글에서는 1962년 홍콩에서 주 씨와 진 부인의 관계가 어떻게 표현되었는지만을 살펴보고자 한다.
왕가위 감독은 흔히 스텝 프린팅 기법으로 대표되지만, ‘화영연화’의 핵심은 절제된 연출이다. 인물들은 문틀, 복도, 창문, 칸막이 같은 구조물 안에 갇혀 있다. 관객은 마치 남의 집을 엿보듯 인물들을 지켜보게 된다. 때때로 카메라는 인물을 따라가지 않고 오프 스크린(off-screen)을 통해 목소리만 들려주거나, 중요한 사건을 암시하는 데 그친다. 관객은 화면에 보이지 않는 부분을 추측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감정을 숨기고 억눌러야 했던 주 씨와 진 부인의 관계와 닮아있다.
특히 영화 곳곳에서 테마 음악에 맞춰 슬로 모션으로 진행되는 시퀀스가 인상적이다. 바이올린의 서정적인 멜로디(Yumeji’s Theme)가 들릴 때마다 주 씨와 진 부인의 관계 변화를 예감하게 되고, 느린 템포의 라틴 음악과 함께 그들 사랑의 비극성에 감응하게 된다.
테마 음악에 따라 주 씨와 진 부인의 관계 흐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사람들이 모여 마작을 하고 있다. 진 부인은 남편에게 기대 서 있다. 주 씨의 아내가 방으로 들어온다. 진 부인은 주 씨의 아내가 지나갈 수 있도록 남편에게서 떨어진다. 이어 주 씨가 혼자 방에서 나온다.
네 사람의 관계를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때 주 씨의 아내는 진 부인의 남편 쪽을 바라보며 들어가고, 주 씨는 진 부인을 바라보며 나온다.
2. 노점에 국수를 사러 온 진 부인. 진 부인이 골목을 빠져나가자 주 씨가 골목으로 들어온다. 다른 날에는 진 부인과 주 씨가 골목에서 마주친다.
진 부인과 주씨가 각자의 배우자가 부재함을 확인하는 장면이다. 이후, 두 사람은 배우자의 외도를 확신하게 된다.
3. 진 부인과 주 씨는 노점에서 다시 마주친다. 가로등 아래로 갑자기 쏟아지는 빗줄기가 비친다.
두 사람은 각자의 배우자가 함께 외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후로도 반복적으로 만남을 가지며 그들의 관계를 상상한다.
4. 같은 택시를 타고 돌아가는 길, 주 씨가 먼저 택시에서 내리는데 갑자기 비가 온다.
이전까지는 두 사람의 관계가 역할극으로 모호하게 표현되는데, 다음 날 감기에 걸린 주 씨에게 진 부인이 죽을 만들어 주며 두 사람의 감정이 확실히 드러난다. 이제 그들은 배우자의 외도가 아닌 그들 관계에 집중하게 된다.
5. 주 씨와 진 부인은 각자의 공간에서 글을 쓰고 만나서 함께 읽는다.
그들은 무협소설이라는 공통 취미를 핑계로 만남을 이어간다. 관계가 발전하자 사람들의 눈을 피할 공간이 필요해진다. 만남이 비밀스러워질수록 비윤리적인 욕망도 커진다.
6. 따로 구한 방에서 글쓰기를 계속하는 주 씨와 진 부인. 그들은 함께 음악을 듣거나 밥을 먹기도 한다. 이때 진 부인은 웃고 있다.
유일하게 진 부인이 웃고 있는 장면. 2046호는 두 사람에게 자유의 공간이자 사랑의 공간이다. 하지만 그도 잠시 주변 이웃이 진 부인에게 주의를 준다.
7. 진 부인이 마작 방에서 서성거리는 장면과 주 씨가 회사에서 담배를 태우는 장면을 차례로 보여준다.
진 부인과 주 씨는 수심에 잠겨 있다. 일상으로 돌아온 모습이 영화 초반과 대비되기도 한다. 결국 두 사람은 이별을 준비한다.
8. 진 부인이 주 씨의 품에 안겨 운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두 사람. 진 부인은 주 씨의 어깨에 기대 손을 잡고 있다.
함께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이 두 번 나온다. 처음에 주 씨의 손을 거부했던 진 부인이 이번에는 주 씨에게 완전히 몸을 맡긴다. 두 사람의 관계 변화가 뚜렷하게 나타나는 장면이다.
이처럼 테마 음악이 나오는 장면은 진 부인과 주 씨의 만남-사랑-이별의 과정에서 중요한 방향키를 쥐고 있다. 슬로 모션으로 진행되는 시퀀스는 앞으로의 그들 관계를 암시한다. 그들이 이별한 이후로 테마 음악은 나오지 않는다. 대신 주선의 노래 '화양적연화(花樣的年華)'가 그들을 위로한다.
‘화양연화’는 여백이 많은 만큼 영화에서 사용된 메타포가 다양하다. 주변 인물의 짧은 대사 하나까지도 놓쳐서는 안 되는 작품이다. 감상할 때마다 다른 포인트에 집중한다면, 영화를 다채롭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