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흐른다’는 말이 있다. 아주 오래전 인류의 시작부터 오늘날까지, 시간은 하루하루 끊기지 않고 흘러왔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이 당연한 사실을 망각하곤 한다. 일상이 무너지는 순간, 예를 들어 COVID-19 팬데믹이 우리의 삶을 휩쓸었을 때, 우리는 ‘시계가 멈춘 것처럼’ 느꼈다. 그리고 다시 시계가 돌아가기 시작했을 때, 앞으로 우리의 삶은 결코 언제나 팬데믹 이전 같지 않겠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 전의 삶을 ‘회복’하기 위해 애썼다.
나는 우리의 근현대사 이후의 삶과 예술 역시 그랬다고 느꼈다. 일제의 식민지배, 한반도를 둘로 가른 전쟁, 독재의 시기. 너무나 많은 것이 눈물과 피로 얼룩진 채 빠르게 변했고, 역사는 흐르고 시간은 되돌릴 수 없는 법이다. 그렇게 우리는 근대 이전과 근대, 근대 이후라는 관념적 분절을 경험하며 살고 있는 셈이 되었다.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삶 속에 녹아 들어 있는 이 아픔은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우진영 작가는 그의 첫 번째 저서 <근대와 현대 미술 잇기>를 통해 근대 예술가들과 오늘날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우리 동시대 미술가들을 함께 조명하며 따스한 시선으로 회복의 방향성을 전한다.
‘잇는다’는 표현은 분절을 전제로 한다. 분명히 연결된 시간선임에도 불구하고, 아픔이 너무 많았던 탓일까. 근대와 우리의 정신적 거리는 멀기만 하다.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전공하고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저자 우진영은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아주 잘 알고 공감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건넨다. <근대와 현대 미술 잇기>는 근대의 미술을 오늘날의 미술과 나란히 놓고 통하는 지점을 짚어 냄으로써 과거와 오늘을 더이상 구분 짓지 않고 ‘다시’ 이어내는 발걸음이다.
목차를 펼쳐 훑자, 이인성, 나혜석, 박수근, 장욱진, 김환기, 구본웅, 이중섭. 너무나 익숙한 이름들 사이로 알아가야 하는 낯선 이름들이 더 많았다. 왼편에 놓인 근대 미술가들 중에서도 잘 모르는 작가들이 많았는데, 부끄럽게도 오른편에 함께 쓰인 동시대 한국 미술가들은 모르는 이름들이 태반이었다. 47인의 예술가들은 서로 짝을 지어 한 편을 글을 이루고 있었는데, 모르는 작가가 더 많으니, 목차만 봐서는 이들이 도대체 어떤 사연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는지, 추측조차 할 수 없었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한 편 한 편 읽어 내려갔다.
작가는 작품을 마주했을 때 느낀 솔직한 감정을 에세이처럼 편안하고 따스한 문체로 담아 냄과 동시에, 억지스럽지 않지만 새롭게 보는 방식을 제시하고 있었다. 특히 2부 <경계선 위의 존재들>에서 연결된 예술가들의 이야기가 가장 인상깊었다. 2부를 연 작가들은 엘리자베스 키스와 김현철이었다. 이들의 작품은 잠시 머물다 가는 이방인과 그곳에서 삶을 영위하는 사람 사이 분명히 존재하는 경계선을 체감하게 하면서도, 그 속에 드러나는 진심 어린 다정함이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엘리자베스 키스는 <달빛 아래 서울의 동대문> , <민씨 가의 규수>, <아기를 업은 여인> 등 1920-30년대 경성의 풍경을 아름답게 그려낸 영국인 여성 화가이다. 우리 근대 미술사 속에서도 특히 외국인이라는 눈에 띄는 독특한 특성 때문에 그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의 작품 속 경성은 우리가 알던 그 소용돌이 치던 근대사의 경성이 맞는지, 의아할 정도로 고요하고 아름답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완전한 제국의 이방인이 바라 본 극동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 아픈 근대사와 너무도 멀게 느껴지는 그의 그림을 본 기억 때문에, 페이지의 상단에 적힌 이름을 보고 그저 ‘편견과 미화의 그림 아닌가’하는 비뚤어진 시선으로 책장을 넘겼다. 그런데 내 차가운 생각과 달리, 저자는 키스의 그림에서 “이방인만의 다정함”을 읽어냈다. 그 따스한 시선이 놀랍게 느껴졌다.
“결국 키스 또한 식민지 조선에 잠시 머물다 가는 타자임을 실감한다. 누구나 이국적인 장소에 머물게 되면 감정의 변이를 겪는다. 낯섦은 두려움과 함께 새로움이라는 흥분을 일으킨다. (…) 키스의 그림이 서양과 다른 동양의 미를 간직한 조선을 이상화하고 식민지 시대에 낭만을 과하게 얹었다는 비판이 가능한 지점이다. 물론 키스의 그림이 서늘한 현실에서 비껴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분명한 건 그가 시선을 맞춘 한국인들의 일상에는 꾸밈이 없다는 사실이다. (…) 그가 목격한 건 일제강점기라는 고단한 날들 안에서도 부끄럼 없이 떳떳했던 한국인이 지닌 고귀한 삶의 태도였다. 그녀의 고백이 아리다.”
머릿속이 얼얼했다. 다정하게 시대를 읽어낸다는 게 이런 것일까? 근대는 모두가 마음 한 켠에 각자의 아픔과 또 한 켠엔 죄를 품고 있는 시기였다. 한 인간은 양 극단에 서있지 않기에, 많은 근대의 예술가들은 시대적 아픔 앞에 다면적인 모습을 보였다. 저자는 그들의 작품과 생애를 다룰 때 논쟁의 지점을 빼놓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예술로 표현된 진심을 명확히 조명했다.
키스와 함께 다룬 동시대 작가 김현철의 작품과 그에 대한 저자의 코멘트는 여행지와 일상의 경계, 이방인의 시선을 더 친숙히 와닿게 했다. 김현철의 <제주 바다>는 언젠가 놀러갔던 탁 트인 제주의 시원한 바닷바람을 금새 연상케 했다. 화면의 뒷면에 채색하는 배채 기법을 활용해 아사천에 청색의 안료로 구현해낸 김현철의 제주 바다는 독특하면서도 보편의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저자 우진영은 제주도립미술관에서 근무하기 위해 제주로 옮겨와 살아야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 풍경이 타지가 아닌 일상의 공간으로 와닿았던 순간을 이야기했다. 타자이기에 일상민들은 느끼지 못하는 아름다움도 다정하게 바라볼 수 있지만 동시에 타자이기에 모르는 고통도 있는 법이다. 우진영 작가는 근현대와 오늘날을 이음과 동시에, 타자와 주체의 경계선 사이 도시에 관해서도 다정한 시선을 빼놓지 않는다.
“두 화가가 그려낸 낯선 공간을 향한 애정에는 거짓이 없다. 감추어진 이야기의 공간과 넓은 여백에 나를 데려다 놓으니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아무것도 없으니 나라는 존재가 더욱 선명 해진다. (…) 그제야 알았다. 타자화 된 두 화가의 그림 속 시선은 현실에 대한 외면이 아닌 우리에게 보내는 참사임을. 여름이다. 떠나는 이들이 만나게 될 풍경에 한껏 마음이 들뜬다.”
이 책은 저자가 <한겨레>와 <아르떼> 지면에 연재했던 미술 칼럼을 보완하고 소개한 동시대 작가와의 인터뷰를 함께 수록한 것이다. 위에 소개한 지면처럼 전혀 상상치도 못했던 지점에서 작가는 이토록 다정한 시선으로 근대와 현대(오늘날)을 이어낸다. 그 시선이 궁금한 예술 애호가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