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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늦은 새벽, 지친 몸을 이끌고 서울에서 내려오는 길이었다. 막 잠에서 깬 듯한 사람들이 버스에서 우르르 내렸다. 하지만 마냥 허둥댈 수는 없었다. 시내버스가 끊긴 시간, 모두가 택시를 잡기 위해 무거운 발걸음을 서둘러 옮겼다. 택시들은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길가에 줄지어 시동을 걸었다.

 

택시에 올라타고 나서야 비로소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차가운 공기를 등 뒤로 밀어낸 채, 택시 안의 온기에 몸을 맡기려는 순간 기사님이 물으셨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길이에요? 요즘 연말 약속이 많죠?”

 

오늘은 유독 피곤한 날이라 가벼운 대화조차 버겁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연말 안부를 묻는 기사님과 따뜻한 말을 주고받고 싶었다.

 

“벌써 한 해가 지나가네요.”

 

내가 먼저 꺼낸 말에 기사님의 대답은 조금 슬펐다.

 

 

“근데 옛날처럼 기대가 안 되네요. 예전엔 다음 해엔 어떤 일이 일어날지 희망도 가졌는데… 지금은 그런 생각이 잘 안 들어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이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건지, 코로나19 이후 이어진 경기침체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마음이 잘 들뜨지 않았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어두운 거리를 보며 한동안 그 말을 되뇌었다. 왜 그럴까. 언제부터 우리는 새해에 대한 기대를 잃어버린 걸까. 아니면, 우리가 스스로 미래를 기대하는 마음을 조금씩 저버린 걸까.

 

밖에 나가면, 사회에 나가면 누군가에게 기대기 어렵다. ‘누군가와 함께해야 한다’는 생각보다 ‘나부터라도 잘 챙겨야지’가 먼저 떠오른다. 그래서 텅 빈 마음을 특별하지 않게, 평범하게 보내면 덜 허망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문득 떠오른 기억 하나가 이 허망함에 작은 틈을 냈다. 허전함을 채워줄 무언가를 찾는 대신, 이미 내 안에 있던 장면이 나를 끌어올렸다.

 

새해 아침, 나는 일찍 나가 러닝을 했다. 새해라 운동하는 사람들보다 거리를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이 더 많았다. 웃으며 사진을 찍는 사람들, 손을 잡고 걷는 연인들, 아이들과 함께 나온 가족들. 나는 그들 사이를 지나치며 묵묵히 달렸다. 그러다 전화가 왔다.

 

 
“저기… 혹시 어디 계세요? 집에 있으면 떡만둣국 드리려고 했는데.”
 

 

주인집 아주머니였다. 뉴욕에서 반지하에 자취하던 당시, 함께 새해를 기념할 가족도 친구도 없었다. 전날 밤 혼자 조용히 새해를 맞았고, 오는 한 해도 조용히 지나가게 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아주머니의 전화 한 통에, 한편에 숨겨두었던 외로움이 금세 풀려나오는 느낌이었다.

 

“밖에 나와 있어요. 챙겨주시려던 마음… 정말 감사합니다.”

 

따뜻한 온정은 부재중이라 받지 못했지만, 이미 떡만둣국을 먹은 기분이었다. 누군가 나를 생각해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허허한 마음으로 뛰던 러닝을, 그날은 한 번 더 힘차게 완주할 수 있었다.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집에 돌아가기 전, 아주머니와 가족들이 드시기 좋을 만한 디저트를 샀다. 오랜만에 하는 호의였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호의를 잊고 있었나. 나 혼자 춥다고, 겨우 내 몸 하나 건사하느라 주변을 돌아보지 못했다. 내 것 챙기기에도 바빴고, 남에게 무언가를 베풀 여유 같은 건 사치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마음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뒤돌아보지 않아도 될 그 ‘호의’를 새해 기념으로 할 수 있어서 좋았다. 간단한 메모를 남기고 디저트를 반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 조용히 두었다. 가족들과 함께 보내실 1월 1일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문자만 남겼다.

 

그런데 문자를 보내자마자 아주머니가 내려오셨다. 떡만둣국을 남겨두셨다며 몇 가지 찬과 함께 따뜻하게 건네주셨다. 그렇게 주고받은 새해 인사가 작은 호의들이, 그해 가장 따뜻한 기억으로 남았다.

 

어쩌면 내가 다른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지 못한 만큼, 나도 나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 때문에 지금의 세상이 조금은 기대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택시가 집 앞에 도착했다. 요금을 계산하며 기사님께 말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손님도요. 내년엔 좋은 일만 가득하길.”

 

 

아무런 대가 없이 주변 사람들에게 전하는 작은 새해 안부, 스몰 토크, 디저트가 앞으로를 나아가게 해줄 큰 파동이 될 것 이라 믿으며,

 

이번 2026년 그런 파동들을 자주 일으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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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화 멋진 인생(It's A Wonderful Life,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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