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살기 좋은 사회와 개인의 불안
현대 사회는 어떤 모습인가? 높은 빌딩과 세련된 구조물, 편한 교통과 빠른 인터넷이 머릿 속에 스쳐지나간다. 기술과 SNS의 발전으로 인해 세계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개개인의 권리와 개성에 집중하며 ‘살기 좋은 사회‘가 되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겉보기엔 멀쩡한 지금 우리의 사회, 정말 살기 좋을까?
지난 여름, 전 국민을 충격에 몰았던 칼부림 사태를 떠올려보자. 전국 단위로 동시 다발적으로 발생한 흉기 난동 사건들로 인해 그 어느 누구도 방심할 수 없던 긴장의 순간들. 흔히 말하는 ‘묻지마’ 범죄이다. 이처럼 특정인을 겨냥한 범죄가 아닌, 불특정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범죄는 주로 사회 전체에 대한 강한 반발심과 회의감이 그 원인이다. 일반적인 ‘묻지마’ 범죄보다 더욱 조명 받은 이유는 그 규모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온갖 익명 커뮤니티에 실시간으로 올라온 테러 예고글은 총 469건이며, 그 중에서 칼부림 용의자로 집계된 인원은 무려 총 246명, 실제로 검거된 범인은 26명이다. 사람이 많은 지하철에서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는 사람을 보면, 나도 모르게 들던 의심스러운 마음이 생생하다.
더 일상적이고 지속적인 갈등 또한 가까운 곳에서 느낄 수 있다. 당장 대학교 익명 커뮤니티를 접속해보자. 어떠한 주제이던간에 남자와 여자로 편 갈라 싸우는 사람들, 수시와 정시 중 누가 더 대단하고 노력했는지 목소리 높이는 사람들, 문과와 이과 그리고 여러 직업들의 순위를 매기고 평가하는 사람들. 어떻게든 정답과 오답을 나누고, 대립구도를 만들지 못해 안달난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꼭 갈등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그룹화시키고 일반화시키는 현상도 만연하다. 개념 없고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젊은이들을 ‘MZ세대’ 라고 묶어서 부르거나, 상대방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고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너 T야?’ 라고 말하는 등 우리가 인지하고 있지 못했지만 분명한 일반화가 실생활 속에 녹아들어있는 것이다.
이 모든 현상들의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인간이 대립관계를 만들어냄으로써 편안함을 느낀다고 말한다. 인간들은 본능적으로 정확히 정의내릴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두려움과 불편함을 느끼기 때문에, 어떻게든 정의하고 이것과 저것으로 나누어버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프로이트의 개념을 바탕으로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 소설 <가장의 근심>과 <공동체>, 그리고 란티고스 요로모스 감독의 영화 <더랍스터>를 분석하며 이분법적인 사고의 폭력성을 깊게 이해하고, 그 고찰을 현 사회에 다시 투영시켜 재고해보도록 한다. 특히, 포스트 코로나 시대와 AI알고리즘 기술을 중점적으로 탐구하여 현 사회가 추구해야하는 방향성을 모색하고자 한다.
II. 카프카 작품의 본능적 불안
폭력적이고 대립적인 우리의 현대 사회를 이해하는데에 왜 카프카가 필요하지? 라는 의문이 들지도 모른다. 프로이트는 ‘두려운 낯설음’을 의미하는 (un)canny, 독어로 (un)heimlich에 대해 논의한다. heimlich는 우리가 집에 있을 때 느낄 수 있는 것과 같은 편안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는 곧 ‘외부로부터 숨겨져 있어서 은밀한’으로 확장되며 더 나아가 ‘비밀스럽게 숨겨져 있어서 불안감을 안겨주는’으로 확장되고, ‘불편함, 소름끼치게 무서운’ 등으로 확장된다고 이야기한다. 즉, 프로이트는 친밀함과 낯섦이 이미 (un)heimlich, (un)canny의 형태로 겹쳐있을 것을 통찰한다. 친밀함과 낯섦, 내부와 외부 등 개념들의 겹침이 세상의 근원적인 상태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이러한 중첩적인 상태에 불안감을 느끼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방어 기제로서 대립구조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관점이다. 카프카는 이러한 프로이트의 개념을 바탕으로, uncanny함을 작품으로 녹여냈다. 고전은 언제나 포용적이고 통찰적인 대답을 품고 있다. 카프카의 대답은 현대 사회에 여전히 유의미하며 많은 영감을 줄 것임에 틀림없다.
“오드라데크는 우선 납작한 별 모양의 실타래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실이 감겨져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 “그 웃음은 폐를 가지고는 만들어낼 수 없는 그런 웃음이다. 그것은 마치 낙엽의 바스락거리는 소리처럼 들린다.” … “마치 나무토막처럼, 그는 나무토막인 것 같기도 하다.”
<가장의 근심, 프란츠 카프카>
카프카는 오드라데크를 특정한 것으로 표현해낼 생각이 전혀 없다. 특정해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카프카의 의도이기 때문이다. 오드라데크라는 이름에서 조차 아무것도 추측해낼 수 없다. 오드라데크라는 단어의 기원이 슬라브어인지, 독일어인지에 대한 것 조차 알 수 없다. 이런 의미 없는 이름의 설정, 이름이라고 할 수 조차 없는 이름의 설정이 가져다 주는 의미는 아마 그 존재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더욱 극대화 시키기 위함이 아닌가 싶다. 이름과 그 대상은 너무나 자의적인 것이라 사실상은 그 관계가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일깨워줌과 동시에 우리가 지금껏 믿어왔던 방식, 즉 이름을 붙임으로써 그 존재에 대해 정의를 내리는 방식으로 규정할 수 없는 존재임을 제시하고 있는 것 같다. 외관의 묘사에서도 혼란만을 준다. ‘마치~처럼 보인다’, ‘~인 것 같기도 하다‘와 같은 표현은 그 혼란을 더욱 극대화시킨다. 분명히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 듯하지만 그 외관이 전혀 머릿속으로 형상화되지 않는다. 천천히 읽으며 상상해 나가다가도, 무언가 통일감 있는 형상을 그려내는데 빈번히 실패하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부분 부분을 아주 정확하고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전체의 모습을 그려볼 수 없다는 부분에서 ‘부분의 총합이 전체’라는,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에 의문을 품게 하기도 한다. 이러한 파악 불가능성은 가장의 ‘근심’의 원인이 된다. 가장은 규정 내릴 수 없는 것에 대한 불안감, 불편함, 모호성을 느끼고 있다. 특히, 자기 동일적이어야 할 자신의 공간인 ‘집’에서, 전혀 파악할 수 없는 존재는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다. 확실히 정의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감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작품이다.

우리는 흔히 공동체가 구성원들 간의 공통점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특정한 가치관이나 전통, 사상 등을 공유하고 외부의 것과 구별 될 수 있는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유사한 무언가가 있어야 공동체가 형성된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가족 공동체는 혈연으로, 회사 공동체는 같은 업무에 종사하고 있다는 공통점으로 묶인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카프카는 우리로 하여금 지금껏 생각해온 공동체의 형성 조건에 대해 의심하게 만든다.
“만약 여섯째가 자꾸 끼어들지만 않았더라면 평화로운 생활이었을 것이다.” … “우리 다섯사람도 전에는 서로 잘 몰랐으며, 굳이 말한다면 지금도 서로 잘 모른다. 그러나 우리 다섯 사람에게는 가능하고 참아질 수 있는 것이 저 여섯번째에게는 가능하지 않으며 참아지지도 않는다”
<공동체, 프란츠 카프카>
일차원적으로 작품을 읽는다면, 이 작품은 다섯 사람끼리의 공동체가 이미 존재하고, 이 공동체에 여섯 번째를 포함시키기 싫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섯 사람들끼리의 끈끈한 유대와 그들만의 경험이 존재하고 있다면,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다섯 사람은 어떻게 다섯이 되었는지에 대해 명확한 기준을 스스로도 잡아내지 못하고, 심지어는 이러한 공동생활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까지 말한다. 즉, 그들의 공동체는 외부로부터 특별히 구별될 수 있는 부분이 사실 없으며 그들간의 유사성도 매우 견고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여섯 번째도 이미 공동체에 속해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함의하고 있다. 다섯사람이 여섯 번째를 배척하는 행위를 통해 이미 그 여섯 번째를 특정한 방식, 공백의 방식으로 공동체에 함께 존재하게 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여섯 번째를 배척하는 그 순간에 다섯사람끼리의 유사성(어떤 집에서 함께 나왔다는 그 우연한 사건)을 서로 간의 유사성이라고 인과 관계를 재설정하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카프카의 질문들을 따라가다보면, 공동체와 예외는 사실상 완전히 배제되는 관계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에 다다른다. 공동체 안에 이미 예외가 중첩되어 있기에 공동체를 있게 하는 것이 예외이며, 예외를 있게 하는 것이 공동체이기에 서로는 서로에게 필요 충분 조건이라는 것이다.
카프카의 <가장의 근심>을 읽으며 중첩되고 정의내릴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 불안감을 이해할 수 있었고, <공동체>를 통해 이제껏 견고하다고 생각해오던 유사성의 허점을 발견하고, 공동체와 예외의 대립 관계를 무너뜨려보았다. 그렇다면 이제 유사성에 집착하는 사회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매체를 살펴보며 보다 더 우리 실생활에 사이공간과 틈, 모순의 중요성을 피부로 느껴보자.
III. <더 랍스터>, 유사성에 집착하는 사회
란티고스 요로모스 감독의 영화, <더 랍스터>에서는 유사성에서 근거하여서만 사랑과 유대감이 형성되어야 한다고 강요하는 사회를 내세운다. 가까운 미래, 모든 사람은 45일간 커플 메이킹 호텔에서 머무르면서 유사성에 기반하여 짝을 찾아야한다. 그렇지 못하면 동물로 변해버린다. 호텔에서는 이성애자와 동성애자만 선택할 수 있고 양성애자는 선택할 수 없다. 발 사이즈 235와 같이 애매한 숫자 마저 용납하지 않는다.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이분법을 보다 더 과장하여 표현함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그때에 느껴지는 불편함에 주목하게 하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애매함과 모호성을 그렇게도 용납하지 못하는 호텔이 막상 강요하는 유사성은 사실 그 무엇보다 자의적이라는 것이다. 코피가 자주나는 것, 다리가 불편한 것, 난시를 앓고 있는 것 혹은 안경 쓴다는 것 등은 사랑에 빠지는 것과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일 뿐더러 영화를 보다 보면 사랑과 유사성, 둘 중 어느 것이 먼저인지 헷갈릴 지경에 이르기 때문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두 공간을 비교했을때도 그와 비슷한 아이러니함을 느낄 수 있다.

짝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혼자만의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숲에 모여 지내면서 짝이 되기를 강요하는 규칙에 대한 거부를 표현하는 일종의 행사를 주기적으로 치른다. 그 숲의 사람들은 짝을 강요하는 호텔의 규제를 경멸한다. 그리고 호텔의 사람들은 숲에 사는 사람들을 동물 취급하며 주기적으로 ‘사냥’을 한다. 이 두 공간의 사람들은 서로를 완전히 다른 존재이며, 배제적인 관계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호텔과 숲은 전혀 다른 것이 아니며 오히려 완전히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호텔은 짝을 강요하고 숲은 혼자를 강요하며, 두 곳 모두 진실된 감정에 귀 기울이지 않은 채 외적인 규제에 종속되어 살아간다.
영화는 결국 주인공은 자신의 파트너를 따라 시력을 잃기 위해 (유사성을 갖기 위해) 스스로 칼로 눈알을 찌르려는 순간 마무리 된다. 우리는 눈알을 찌르지 말아야 한다. 극단적으로 이분법적인 이 기괴한 영화 속 세상을 보며 느낀 반감과 불쾌함, 불편함을 단단히 기억해야한다. 영화 속에서나 실제 사회 속에서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느 것도 강요돼서는 안 된다는 것. 모 아니면 도, 이것 아니면 저것과 같은 단편적인 선택을 하도록 할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틈에 집중하고 중첩성을 지켜봐야 한다는 것.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은 모두 감정이 없어 보이고 표정도 단조롭다. 아주 엄격하고 딱딱한 체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모순으로 뒤덮여 있는 세상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모순은 우리 삶에 있어서 소중하다. 부정적인 워딩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대다수이지만, 우리는 모든 인간은 모순적이고, 모든 현상은 중첩되어 있으며, 모든 존재는 서로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이 작품이 제공하는 모순과 낯설음, 불편함은 우리가 현 사회를 살아가면서 오래도록 깊이 생각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IV. 알고리즘 기술, 현대 사회의 이분법적 사고 심화
카프카와 랍스터 덕분에, 이분법적인 사고가 얼마나 많은 사이공간과 틈을 죽이고 있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사이공간 죽이기‘를 심화시키고 있는 요인은 어떠한 것이 있을까.
알고리즘(algorithm)이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학적 절차나 공식을 의미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흔히 기계학습(Machine Learning)을 통해서 인공지능이 구현해내는 다양한 솔루션의 수학적 절차와 공식을 뜻하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오늘날 AI 알고리즘 기반의 추천 서비스는 뉴스나 유튜브 뿐만 아니라,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카카오톡과 같은 소셜미디어에서도 매우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평소 피부 미용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화장품이나 피부 관련 시술 광고가 보이고, 얼마 전 아이를 출산한 사람들에게는 유아용품 광고가 빈번하게 뜬다. 글로벌 OTT 서비스 넷플릭스는 거의 모든 이용자들에게 맞춤형 메인 화면을 제공하고 유튜브 앱은 접속하기만 해도 그 사람의 관심사를 알 수 있다. 우리 아빠의 유튜브 알고리즘은 골프, 건강, 뉴스, 제테크 분야를 추천해주고 우리 동생의 알고리즘은 온갖 틱톡 챌린지 영상, 아이돌 직캠 등을 추천해준다. 이처럼 알고리즘은 기존의 이용자가 시청하거나 소비한 콘텐츠와 상품등을 분석하여 비슷한 특성을 지닌 것들을 계속 추천함으로써 오랜 시간 플랫폼에 머물도록 한다. 소비자들은 이토록 바쁜 현대 사회에서, 수많은 정보와 상품들 중 본인들의 취향과 관심사를 직접 찾고 비교해보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큰 편리함을 느낀다. 그렇게 점점 적극적으로 정보를 서치하는 일이 줄어들고 알고리즘에 의존하게 되면서 각자의 세상에 고립되어간다. 필터버블과 확증 편향성도 함께 극대화되어간다. 우리 아빠가 유행하는 틱톡 챌린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동생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일절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식구가 다 같이 저녁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지 않았더라면 평생 몰랐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혼자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세상 밖을 내다볼 기회가 없다는 것 아닌가?
현실 세상은 나에게 맞춰져있을 수 없다. 알고리즘으로 인해 ‘나’ 맞춤형 세상이 되어버린 인터넷과는 다르다. 세상에는 다양한 관점과 의견, 다른 라이프스타일과 취향을 가진 개개인의 세계가 존재한다. 나의 가치관과는 다르지만 알아야하는 정보를 접하고, 서로 다른 의견들을 공유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람. 알고리즘을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이 전혀 없지 않은가. 뉴스를 보아도, 유튜브나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검색을 해보아도, 평소에 내가 많이 찾고 원하던 경향성을 지닌 내용들만이 필터링되어서 제공된다는 것이다. 현실판 트루먼쇼가 아닌가. ‘내’가 (평소 어떠한 정치적 경향성과 가치관을 가진) 검색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외한 채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다니. 공정하고 객관적이며 중립적인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더욱 더 적극적으로 많은 정보들을 보고 소비하며 비교해야 한다. 그것도 아니라면 지금 당장 방에서 뛰쳐나가 함께 밥을 먹는 사람을, 같이 수업을 듣는 사람을, 혹은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잡고 물어보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 수많은 가치와 의견들이 혼재되어 있는 공간에 진입하는 것조차 어려워진 세상이라니. 우리들은 매 순간 어디에 속해 있었다. 공동체 생활을 하지 않은 적이 없다. 대부분의 인간은 태어나서는 가족에, 조금 더 커서는 학교에, 그러고는 직장에 속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단순히 속해있다는 사실을 넘어서, 공동체의 의식을 지니고 사회적인 동물로써의 스스로를 인식한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항상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히키코모리’라는 용어를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1990년대부터 히키코모리가 등장했고, 2003년 일본의 후생노동성에서 ‘3~6개월간 은둔 생활을 지속한 사람‘을 은둔형 외톨이로 정의했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은둔형 외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2000년대 초반에 처음 깨달았지만, 일시적인 관심이었을 뿐 그 뒤로는 방치되어왔다. 히키코모리를 지칭하는 정확한 용어와 정의 조차 통일되지 못한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그러던 중, 전 세계를 2년간 멈추게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등장한다. 코로나 19사태로 인해 사회적 관계를 맺을 기회가 줄어들고 집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급속도로 증가하자 은둔형 외톨이의 비율이 놀랍도록 늘었다. 한국 보건사회연구원이 추정하는 은둔 청년은 코로나 19 이후, 2019년 33만 8천명에서 불과 2년만에 53만 8천명으로 급증했다. 건강한 사회적 관계를 맺는 것에 어려움을 겪는 청년들이 늘어나고, 발달된 인터넷과 알고리즘은 그들은 더욱 극단적으로 만들고 고립화시킨다.
포털 사이트에 ‘은둔형 외톨이‘를 검색하면 ‘잠재적 범죄자’, ‘묻지마 범죄‘와 같은 연관 검색어가 눈에 띈다. 또래 여성 살인범 정유정, 신림동 흉기난동범 조선, 분당 서현역 흉기난동범 최원종, 신림동 성폭행 살인범 최윤종 모두 정상적으로 사회적인 유대관계를 맺은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 사실이다. 단절과 고립 속에서 심화된 사회적 불만과 정신 질환등이 반사회적인 범죄로 표출된다고 보는 입장이 대다수이기에 ‘은둔형 외톨이’의 실태를 파악하고 그에 걸맞는 해결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
V. 중첩성과 모순성의 중요성
양자역학을 공부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미시세계를 다루는 물리 법칙인 양자역학에서는 원자들의 위치와 상태를 정확히 알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관측’(빛이 대상에 반사되어 눈에 들어오기까지의 과정)이라는 행위 자체가 대상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말이 관측이지 사실은 ‘결 어긋남’이라는 물리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인간의 언어와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 그 유명한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죽어있으면서도 동시에 살아있을 수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이젠베르크는 괴상한 것은 우주가 아니라 인간이라고 냉정히 말한다. 우주의 근원적인 상태를 다 담아낼 수 있는 적절한 인간의 개념과 언어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앞서 살펴보았던 프로이트의 통찰과도 연관이 있다. 과연 우리 우주는 매우 중첩적이고 모순적이라는 것. 인간은 모든 개념과 현상들을 규정하고 나누어버리고 정의내리며 점점 더 본질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러니 인간이 괴상할 수 밖에. 이제는 본질로 돌아가야한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정답과 오답, 실패와 성공의 삶이 있는 이분법적 사회를 타파해야 한다. 사회적이고 상대적인 기준의 성공과 성취를 강요하는 대신에 스스로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실존 그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것을 연습하도록 교육해야한다. 이에 대해 개인적 차원의 사소한 연습을 하나 제안하고자 한다. 바로 칭찬을 경계하는 것이다. 더 이상 특정한 성취나 성공 중심적인 칭찬을 그만 두어야한다. 나는 지금껏 내 스스로를 사랑해왔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나는 사회적 기대에 꽤나 충족하는 ‘나’를, 즉 진정한 내가 아니라 나의 성취와 성적을 사랑해온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나’라는 사람의 가치를, 내가 무엇을 잘하고 어떤 부분에서 남들보다 괜찮은지와 같은 상대적인 기준과 사회적인 시선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더 이상 뭘 해내지 않아도 여전히 가치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실패와 성공은 사실 굉장히 닮아 있으며, 모두가 승자이자 패자이고, 돈이 되는 것과 되지 않는 것의 구분은 무의미함을 모두가 진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특히 공교육에서 이러한 자세를 유지해야 하고, 통일된 자세로 교육 시스템을 모두 다 손 봐야한다. 그래야 중독 사회에서 벗어나서 다양성과 모순을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는 행복한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2025
2025년의 끝에서 과연 나는 어떤 말을 하고 싶은가 곰곰히 생각했다. (토니 타키타니 감상평을 쓰다가 너무 우울해져 그만 두었다) 2023년 교양 과제에서 진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발견했다. 여전히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다만 2년의 세월을 조금 덧붙이자면, 인생은 균형 맞추기의 연속(킬링이브, 2018)이라는 말을 추가하고 싶다. 2023년의 내가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고자 사이공간을 극대화하여 벌려두었다면, 2025년의 나는 다시 사이공간을 조금 줄여 타인(=나)과의 삶에서 행복해지는 방법을 모색한다. 뭐든지 과유불급. 중용이 아름다운 것일지니. 끊임없이 균형을 맞춰나가는 것, 그 과정의 유의미함을 온몸으로 느끼고 즐길 수 있도록 연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