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부분을 그렇게 친 이유가 있어?”
네? 갑자기 꽉 쥔 주먹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입에서는 여러 가지 말이 생각나다가도 내 답이 이 상황에 알맞지 않을까 봐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음... 어... 괜히 잉여 표현을 늘어놓으며 생각할 시간을 벌다 자기 확신 없이 말을 꺼냈다. 대학 입시 레슨을 받을 때마다,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질문. 나는 그저 주어진 대로, 악보대로 연주했을 뿐인데 이유 따위 알게 뭐란 말인가.
그렇게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물론 이제 와선 단순히 악보대로 연주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걸 안다. 존재하는 모든 음을 ‘어떻게 치느냐’에는 저마다의 의도가 깃들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전 음보다 아주 살짝 작게 치는 컨트롤을 통해 노래가 이어지게 만든다든지, 악보 상의 크레센도가 시작되는 지점보다 조금 더 늦게 세게 치기 시작해 ‘점점 세게’라는 효과를 극대화한다든지 하는 선택들. 그런 수많은 작은 이유들로 하여금 연주자마다 곡의 해석이 조금씩 달라지는 부분이 있고, 그러면서 연주의 차이가 발생한다는 것을 느낀다. 음악가들이 항상 말하는 ‘연주를 보면 성격이 보인다’라는 말 역시 음악을 들으면 느껴지는 연주자의 의도(혹은 의도된 터치가 아니더라도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습관들)가 성격과 음악적 가치관에서 비롯된다는 인식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존 케이지, 〈4분 33초〉
입시의 경우에는 대체로 고전부터 낭만까지만을 다루는 경우가 많기에, 작곡가의 의도는 비교적 명확하게 악보 안에 담겨 있다. 그러나 현대음악에 이르러서는 의도의 중요성이 한층 더 커진다. 음악사를 살펴볼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름, ‘존 케이지’가 그렇다. 클래식 음악을 전공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가끔 농담거리로 나오기도 하는. “실기곡으로 존 케이지 4분 33초 치면 안 돼?” 〈4분 33초〉는 초연 당시 연주에 걸린 시간을 제목으로 삼은 곡으로, 연주자는 4분 33초 사이에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 악보 역시 공란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런 곡이 존재한단 말인가. ‘의도’는 이렇다. 연주자가 앉아 있는 동안 관객이 낸 기침 소리, 숨소리, 미세하게 움직이는 우연한 소리들이 음악이라고. 세상 어느 곳에도 완벽한 정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런 의도가 있기에 〈4분 33초〉라는 작품은 예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가 아닌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이기 때문이다.
로버트 라우센버그, 〈White Painting〉
마르셀 뒤샹, 〈샘〉
미술사 역시 비슷한 변화가 일어났다. 고전부터 낭만, 인상주의까지는 대체로 눈에 보이는 것들을 포착하고 재현하는 데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현대 미술에 이르러서는 작품의 시각적 결과물 그 자체보다 제시되는 방식과 의도, 즉 ‘왜 이것이 예술인가’에 대한 설명이 더 중요해졌다. 존 케이지의 〈4분 33초〉와 나란히 놓을 수 있는 사례로는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White Painting〉을 입에 올릴 수 있겠다. 제목 그대로 하얀 캔버스만 걸려 있는 그림은, 대체 무엇을 보라는 것인지 쉽게 와닿지 않는다. 그러나 이 작품은 사실 전시장의 조명, 관람객의 움직임, 그림자와 반사광 같은 환경적 요소를 통해 완성된다. ‘아무것도 없다’가 아니라, 주변의 모든 요소를 작품의 일부로 받아들이겠다는 의도를 전제로 성립하는 그림인 것이다.
마르셀 뒤샹의 〈샘〉 역시 함께 떠오른다. ‘개념미술’이라는 사조를 본격적으로 열었던 뒤샹은, 예술에서 중요한 것이 더 이상 대상을 만들어내는 기술이 아닌 개념을 설정하는 행위라는 점을 드러냈다. 전시장에 놓인 소변기는 일상적인 사물일 뿐이지만, 전시회장이라는 예술적 맥락 속에 배치하겠다는 의도를 통해 작품이 된다. 다시 말해 언급했던 작품들이 예술로서 기능하는 이유는 그 자체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예술이라 선언되었느냐에 있다. 물론 의도가 예술의 필요조건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현대 예술이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점점 더 의도가 중요해졌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최근 넷플릭스 시리즈 〈흑백요리사〉 시즌 2를 재밌게 보고 있다.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직접적인 계기 역시 안성재 셰프 때문이었다. 의도를 물어보는 질문을 여러 번 반복해서 들으니, 지금까지 받아왔던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 프레이즈를 연주했는지’에 대한 질문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던 탓이다.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시즌 1: 1화
안성재 셰프가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있는데, 바로 ‘요리의 요소 하나하나에 의도가 느껴지느냐’다. 맛은 당연하고 외적으로나 테크닉적으로도 아름다워야 하는 데다… 모든 요소에 이유가 있어야 하고 의도가 이해되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보면 파인 다이닝 역시 예술의 영역으로 보인다. 게다가 높은 비용을 받고도 큰 수익을 남기기 어려워 스폰서에 의존해야 하는 구조라니. 셰프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돈이 되지 않는데도 만들고 싶고 만들어야 한다는 어떠한 확신이 파인 다이닝을 예술로 존재하게 만들지 않나 싶다.
의도가 ‘사람들을 위하는 것’ 그 자체에 있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진다. 파인 다이닝의 의도가 완벽한 최고급 식사의 완성을 추구한다면, 할머니가 해준 요리는 어떤가? 안성재 셰프가 자신의 유튜브에서, 죽기 전에 한 번 더 먹어볼 수 있는 음식이 있다면 돌아가신 할머니의 아무 요리일 거라 말했듯이. 누군가가 만들었다는 그 자체가 의미가 되는 순간. 음악이나 미술 역시 다른 사람들을 위한 마음이 들어가 있다면, 그 방식이 무엇이든 상관없을지도 모른다. 의도는 언제나 존재한다. 다만 그 의도가 기교와 형식에 중심을 둘 때 우리는 그것을 예술이라 부르고, 타인을 향할 때 문화라고 부르는 것은 아닐까. 대립한다기보다는, 어떤 스펙트럼 속의 한 점으로써 존재하겠지만. 아니 어쩌면, 의도 그 자체보다는 의도가 향하는 방향에 주목해야겠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