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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최인아 책방 콘서트 시즌 20의 마지막 무대를 바이올리니스트 임동민이 장식했다. 이번 공연에서는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No.1’과 이자이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Op.27 No.1’ 등을 선보였다. 그는 추천 도서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소개했다.


헤르만 헤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소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중세 독일을 배경으로, 수도원에서 만난 지적이고 금욕적인 수도사 나르치스와 감각적이고 예술적 기질을 지닌 골드문트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서로 다른 성향과 삶의 방식이 대비되는 두 인물의 관계를 그린 작품이다.

 

    

  

1. 들어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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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 클래식에 관한 글을 쓰기로 했다. 

그러니 갈피를 잡아야 했다.


글을 쓴다는 건, 그것도 좋아하기로 택한 분야를 꾸준히 논한다는 건 참 즐거우면서도 끊임없이 자기 확신을 필요로 하는 일만 같다. 그런 부질없는 질문들 있지 않은가. 내가 할 수 있나, 쓸 수 있을까, 이런 류의 질문들.


글과 글을 이어 나가고, 연주와 연주를 이어 나가며 과거의 것을 해결하고 오늘의 것을 해결해야 하는 문제에 봉착해본 당신은 아시리라. 지금의 난관이 상당히 거대해 보이더라도, 어차피 행해낼 것이고, 이걸 당장 완성시킨다 해도 같은 문제를 겪지 않을 가능성은 낮다. 

 

내 멋대로 사라진 것을 살려내는 일이다. 연주를 한 본인조차 어떻게 행했는지 잊어버렸을 그 무의식의 영역을, 나의 ‘선택적 행위’로 다시 오늘로 내려놓는 것이다. 어떻게 그리 할 수 있고,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이 질문이 매일같이 반복되니, 삶을 통제하고 있다 여기면서도 한없이 끌려다니는 일상의 한복판에 놓이게 된다.


하고 싶은 일이라는 그 명분이 뭐라고, 그 ‘하고 싶다’는 감각 하나가 하루 종일 괴롭힌다.


해왔던, 해야 하는 일에는 손이 가지 않고, 당장 해야만 할 것 같은 타오르는 일들에만 두 발이 움직인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읽는 내내, 골드문트의 끝없는 열망과 끊임없는 충동적 선택, 하고 싶은 일들에 스스로를 수도없이 데려다 놓는 모습 속에서 내가 가장 잘 아는 그 사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향하는 길에는 늘 타인의 의문이 따라왔다. 다양한 형태의 물음, 이를테면 ‘어떻게 그럴 수 있나?’ 같은 질문들이 날아들었지만, 무엇 하나 속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해 스스로가 불만족스러웠다.


인생을 살면서 단 한 번도 글을 사랑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이상할 정도로 반복해서 글자를 찾았다. 


골드문트를 보며 나를 떠올렸고, 나르치스를 보며 ‘클래식’이라는, 눈앞에 놓인 그 단어를 생각했다. 너를 어찌 바라봐야 할까. 늘 담고자 하는 너는 복잡한 형식과 무한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데, 나의 감각 안으로 통과시켜 응시해도 괜찮을까.


보다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는 기다란 말들 대신, 단순화된 이름으로 만나는 편이 더 쉬운 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 멋대로 향하기를 멈추지 않으면서도.


길게 선을 긋는 것보다 너의 원래 이름으로 명명할 수 있게 되면, 나는 너를 더 좋아할 수 있을까. 나에겐 그저 장난감이고 놀이터일 뿐인데. 깊이 파고든다면 이보다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어떤 상황이 놓이더라도, 지나온 모든 것들에 후회를 느끼고 모든 솔직함에 부끄러움과 절망을 되돌려받는다 해도 쉬이 나열할 수 있을까?


모든 의문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그 책을 만났다. 그저 책방 콘서트 한 편을 관람하기 위해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 든 것이었는데, 내 일상이 저 안에 있었고, 그날의 연주가는 이 두 주인공과 꽤 닮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내겠다고 했다. 어떻게 행해낼 것인가. 그 모습이 퍽 궁금해졌다.

 

 

 

2. 책방 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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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리니스트 임동민이 전하기를,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이자이의 소나타는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이자이는 바흐의 작품에서 큰 감명을 받았고, 그에 대한 경외의 마음을 담아 자신의 소나타를 작곡했다는 것이다. 두 작품은 같은 조성을 사용하며, 악장 구성과 형식에서도 서로를 비추는 지점을 공유한다.


다만 바흐의 음악은 종교적 세계관 안에서 이성적이고 절제된 질서를 따르는 반면, 이자이는 20세기의 인물로 연주 기법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대를 살며 훨씬 다양한 음향과 표현을 자연스럽게 확장해 나갔다. 같은 재료를 바탕으로 하지만, 두 작품의 성격이 극명하게 갈리는 이유다.


이 때문에 두 곡의 차이는 깊이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쉽게 체감하기 어렵고, 실제로 두 작품을 교차로 연주하는 경우 역시 흔한 프로그램 구성은 아니라고 전했다.

 

그가 이번 공연에서 함께 소개한 책은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였다. 임동민은 이 작품을 이성적인 인간 나르치스와 감성적인 인간 골드문트, 양 극단에 선 두 인물의 이야기로 설명했다. 이러한 대비에서 이번 프로그램의 구성이 출발했다는 것이다. 

 

바흐는 나르치스에, 이자이는 골드문트에 가깝다. 바흐를 연주할 때는 연주자가 지켜야 할 규칙이 많고 지나치게 드라마틱한 해석은 경계해야 하지만, 이자이의 음악에서는 그 고삐가 풀리듯 표현의 자유가 크게 확장된다. 그런 점에서 두 작품은 서로 다른 극을 형성하며 하나의 서사를 이룬다고 그는 말했다.


연주는 바흐와 이자이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1번의 1악장을 먼저 진행한 뒤, 잠시 토크 타임을 가지고 2악장부터 마지막 악장까지 바흐와 이자이 소나타의 교차 형식으로 이어갔다. 이후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2번 중 샤콘느와 앙코르곡 The First Noel로 공연이 마무리되었다. 

 

 

 

3. 바흐와 이자이,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1번


 

1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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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1번 g단조


패인다. 그리고 내 손바닥보다 아래에 머문다. 한 번씩 윤을 냈다가 뒤로 가는 이유는 또 뭘까. 들이켜 놓는 숨도 있다.


광택은 분명한데, 꼭 물러나 있을 때는 삼각형 형태의 점 안에 있는 소리처럼 입체적으로 울렁인다. 한숨씩 쉬어 가며 아래로 완만한 곡선을 몇 번이나 그리는데, 나아가는 화살표의 시작과 끝의 크기가 다르다.


시작에서 강해질 때 강세를 두는데, 그 순간엔 뭔가 뒤집힐 것 같은 느낌이 함께 온다. 음이 긴 흐름을 가져가기보다는, 공백 안에서 독백하듯 머문다. 


이별의 세기는 서서히 흐려지고, 점점 공기 중으로 옅어진다.


이자이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1번 g단조


아까 뒤집힐 것 같고, 잡아먹을 것 같던 시작의 강세가 더 강해져서 책방을 집어삼키며 시작한다. 그 톤으로 크게 눌러놓고, 중간 세기로 다시 누른다. 색 있는 소리로 치솟다가, 0.1초의 삐걱거림을 내려치고는 그어내는 대각선과 파동을 한 선마다 가져온다.


광란과 섬광의 사잇결로 내려앉아 파동친다. 정말 한순간도 그냥 지나칠 줄을 모른다. 한 줄의 직선을 그을 때는 톤을 회색빛으로 가져간다.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이제 곧 벌어질 것이라는 예고를 끊임없이 치밀하게 밀어붙인다.


복잡한 사람이다. 그리는 선이 가는 길마다 몇 개의 가닥으로 나뉜다. 향하는 길목의 모양새는 또 어떤가. 어느 한 곳도 놓치지 않겠다는 집착적 광란이 맺혀 있다.


아랫선을 누르고 지나올 때의 크기까지 이렇게 달리 표현할 수 있는가. 누르는 길이도, 강세도 모두 다르다. 사라질 때는 몰아쳐 놓은 만큼의 크기를 그대로 안고 사라진다.


평화를 가져오려는 목적이 아니다. 


물러날 때를 알기에 성량을 줄인 채 뒤로 걷는 것이다. 걷는 내내의 하나하나가 모두 똑바로 내려꽂힌다. 사라지는 모습도, 올라가는 모습도, 위쪽에서 흐느껴도, 멈칫하며 숨을 터놓을 때도 숨구멍 하나하나가 가쁘다.


따뜻한 톤을 기대하면 안 된다. 예민한 기색이 전면에 둘러싸여 있을 것이다. 원래도 이 목소리였겠지만, 오늘따라 이 공간 안에 있으니 특유의 높은 선명감이 더욱 또렷하게 드러난다. 높은 곳을 이야기할 때는 소프라노의 공명을 닮아 있다.


여러 흐름을 타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구간에서, 곡선의 형태를 모두 달리하려는 저 목적은 무엇일까. 처음의 속도보다 빠른 기세로 책방을 다시 들이킨다. 그 톤으로 거칠게 눌러놓고, 중간 세기로 강해지고, 색 있는 소리로 치솟다가 짧은 삐걱거림을 다시 가져온다.


4B 연필과 수성펜을 한 획 그을 때마다 번갈아 쓰는 복잡한 길을 간다. 그러다 삐뚤어진 형태로 아래로 내려와, 활 하나가 숨이 틀어막히는 순간의 헐떡거림을 묘사해낸다.


멈춰 가는 박동 하나를 손가락 하나가 붙잡고 있으니, 쉬어 갈 틈 자체가 없다. 박동은 여전한데 숨이 맺혀 가면, 남아 있는 것들의 아스라한 이별 소리만이 남는다.

 

 

2악장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1번 g단조


내가 생각한 것보다 약간 새침한 톤으로 첫 음이 시작되었다. 솔직히 바흐 안에 있을 때는 뭘 생각할 수가 없어서, 그냥 돌아오는 균형점이 몇 개나 있을지 속으로 세어보기 바빴다.


아까의 새침함은 어떻게 변할까. 몇 개나 눈치챌 수 있을까. 갔다가 막 돌아오는 것 같지는 않은데, 무조건적인 제자리도 아닌 것 같다.


이전보다는 새침하지만 조금 자리를 잡은 소리 형태로, 얇게 새로운 것이 나타났다. 얇고, 이전보다 공명할 공간이 생겨 있다. 아랫소리도 조금 더 있는 것 같고.


왜 이렇게 반복적으로 되돌아와야 할까. 


이자이에서 뒤집어 놓을 수 있는 것을 다 봤는데, 딱 정말 필요한 만큼, 한 35퍼센트로 줄여 포인트 영역에만 집어다 놓았다.


복잡한 길을 걷는데도 굳이 거대해지지 않는다. 흐르는 길에서도 중간선에 딱 붙어, 필요한 만큼만 충실히 달린다. 대각선의 이야기를 할 때도 예외는 없다.


정확한 포인트를 짚어야 할 부분만 꼭짓점으로 박아 두고 간다. 잔재주를 부리지 않는다. 음량도, 박자도 지켜야 할 것들이 분명히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비슷한 것들이 반복적으로 돌아오고 서로 다르게 걷고 있음도 인지되지만, 결국 향하는 맥락은 적확하다. 개인의 판단이 개입될 영역은 없다.

 

이자이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1번 g단조


뒤로 물러난 자리에서 시작한다. 확연히 소리를 늘어뜨려 놓는 모양이 다르다. 내려놓았던 것들은 어디로 가고, 모두 이렇게 이어져 있는가.


물러섬과 다가옴의 간드러짐이 제각각이라, 간질거릴 정도다. 속도를 높일 때도 부담스럽지 않게 중간 구역을 지켜내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눌러 줄 포인트를 지나온 길에는 두 갈래의 소리가 함께 걷는다. 일정한 톤 아래에는 안개 같은 뒷소리가 끈질기게 따라붙는다.


잠시의 정지 후에는 또 다르다. 이 연주가는 음표 하나가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모양을 다르게 배치해 놓는다. 끝자락이 갈고리 모양으로 넓게 펼쳐진 채 각각 놓이는 구역도 있다.


하나가 흥얼거리면, 하나는 바닥을 찍는다. 한숨도 쉬지 않고 계속 이어지다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급격히 빨라졌다가, 톤을 달리하며 느려진다.


고즈넉한 척하는 어둑한 길목도 스쳐 간다. 쉴 틈이 없다. 1악장에서 두어 번 지나갔던 뒷면의 소리가 여기서는 몇 번이고 반복된다.


소리를 어떻게 허공에서 비트는 걸까. 그것도 다른 크기로. 끝으로 향할수록 표현들은 ‘날’을 닮아간다. 사방을 빗겨치다가, 갑자기 바닥 한가운데를 팍 찍는다.


불규칙적인 속도로 허공을 뚫고, 뒤집고, 뒤틀고, 뒤얹다가 사라져 버린다.

 

 

3악장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1번 g단조


이자이 2악장을 듣고 와서인지, 이 시작은 더 자리 잡은 형태로 느껴진다. 길이감도 안정되어 있다. 지나온 것들 중 가장 빛자락을 닮아 있어, 지금 밤하늘 안에 있다고 쉽게 착각하게 된다.


그가 앉아 있다가 별을 따고 있는 건 아닐까. 별들이 이어진다. 은하가 되려는 걸까. 가만 보니, 별을 가지려는 게 아니라 이어 놓으려는 목적처럼 보인다.


시선은 늘 나보다 높은 영역 위에서만 머문다. 무게감을 덜어냈기에 한참 고개를 들고 있어도 부담이 없다. 결국 이 악장은, 수놓아진 것들을 목격하는 길이다.


이자이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1번 g단조


별들의 노래다. 맺힌 것들의 가냘픈 연민이다. 순간마다 치솟을 필요가 있는가. 매사에 진중하지 않아도 풀잎 같은 것들이 알아서 길을 항해해 줄 것이다.


걱정도, 노여움도 없다. 닿지 않을까 염려할 필요도 없다. 결국 이어질 것이라고, 나지막하게 물러나 말해 준다. 내 기억 안에서 가장 부드러운 선에서, 가벼워진 형태로 노니는 자유로운 3악장이다.


다정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혼자 가버리지도 않는다. 선명도를 지닌 채 발음 좋게 지나가다 어지러운 파동을 남기니, 거대한 거리감이 형성된다.


첫 선의 소리가 돌아온다. 자리 잡은 것들의 노래다. 머무는 자의 여유다. 지나갈 것들에 매일 흔들릴 필요가 있을까.


항해한 것들이 이리 모여 터를 잡았으니, 가만히 땅바닥에 주저앉아 새싹을 구경하면 될 일이다. 그런 시간을 보면 된다고, 작게 속삭이더라.

 

 

4악장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1번 g단조


잘할 것 같았는데, 왼쪽 상단에서 점을 찍고 능숙하게 내려오는 그 자체가 신기했다. 이게 그냥 흐르는 건지, 걷는 건지, 누르고 있는 건지 분간이 안 된다.


뭐 하나 메마른 골자가 없이 누르고 놓고, 드높게도 가버리니 이상할 만큼 자연스럽다. 하나하나가 분명히 놓여야 할 길목이 맞는데, 이렇게까지 그냥 해버린다고?


이자이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1번 g단조


방금까지 왼쪽 상단이 아니었던가. 그것보다는 아래쪽이다. 다만 강한 입체감을 부여한 형태로 시작한다. 이쯤 되면 기교 머신을 좋아하는 건가 싶어, 책방에서 이래도 되나 싶었다. 


음을 앞뒤로 가지고 노는 정도가 좀 심하다. 앞에서는 유순해지고, 뒤로 가면 왜 이렇게 치기 어린가. 사람을 정신없이 춥게 만든다.


정지선이 머문 후에는 어떨까. 바닥선으로 작게 시작해 높은 음의 휘파람을 잇달아 끊임없이 오가며 반복한다. 오고 가는 것이다.


그 다가옴과 물러섬의 한 자락마다 꼭 빛이 얹혀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난해함을 돌파하는 게 아니라, 더 빠르게 찍어내려 버린다.


복합적으로 걷는 게 아니라, 더 치밀하게 파고든다. 끌어올릴 수 있는 것은 다 끌어올려, 음이 ‘팍—’ 소리를 낼 정도로 춤추다 끝을 내버린다.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2번 d단조 BWV 1004, 샤콘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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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선인가. 반복적인 숨이 이어진다. 끄덕이는 고갯짓과도 비슷하고, 체념의 몸짓과도 닮아 있다. 왜 마냥 울지 못하는 자태를 하고 있을까.


향하는 길은 처음부터 낙담을 비켜 가 있다. 울상인데도 그려 나가는 길은 늘 앞으로, 고개는 위를 향한다.


굳이 빠르게 나아가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지체될 수도 없다. 흐를 시간은 제 갈 길을 가지 않던가. 


먼 곳을 응시하는 자의 표정은 무엇을 닮았을까. 발길질을 하지도, 떠나지도 않을 거라면 왜 이토록 꿋꿋이 서 있는 걸까.


왜 연주가는 회오리를 그리고, 관객은 그것을 송두리째 받아내야만 하는가. 받아들이기 위해 남겨진 것이었다. 


정체 모를 파동이 이어진다. 삼각형이 삐뚤어진 사각형을 닮아 있다. 반복됨이 이어진다.


이어지는 큰 선은 계속 이어져 있지만, 모양과 소리의 표현은 아주 조금씩 달라진다. 성량은 나아갈수록 높아지니, 정신을 바짝 붙들고 들어야 한다. 애초에 받아내야 하기에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나마 다정한 얇은 선 몇 개가 놓인다. 위안을 닮으려 하지만, 여전히 그대로 있기를 바라는 목소리다. 목청은 점점 세기를 더한다. 누르는 밀도는 짙어진다.


왜 괴로운 것들 사이에서 더 깊이 파고들기를 택하는가. 하늘과 대지가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뜻일까.


만나고자 하는 이의 얼굴은 무엇이기에 몸 하나가 바닥에 내려앉았음에도 팔을 끝내 거두지 못하는가.


묘사 자체가 불가능한 짙고 빠른 파동이 이어진다. 이어질 것이다. 그냥 이어지는 것이다. 이어짐에 의문을 품으면 안 된다.


짙게 다시 짚어 주는 순간들이 다가오자 물러날 틈이 없다. 이제는 받아들여야 할 때가 아닌가. 이유를 묻기엔 너무 먼 길을 걸어왔다.


지나온 것들에 아득함을 느끼는가. 이별해 온 것들에 연민을 느끼는가. 이제는 누군가의 물기 앞에서도 표정을 지켜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니.


멀어지더라도 더 이상 큰 미련은 없다는 것을, 저 두터운 선이 말해 준다. 새로운 시작이 이토록 하향의 비장함일 리는 없다.


호기롭기보다는 장렬하고, 타오르기보다는 지나온 불꽃을 회한한다. 눌러온 것들이 아직 머물러 있고, 지나온 발자국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걸로 충분하단다.

 

 

앙코르 - The First No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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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율은 분명 다정하다. 다만 표면은 무표정할지도 모른다. 흘러가는 선에는 기다림이 충분히 담겨 있지만, 애정에 기대지는 않는다.


그어내는 방식은 무척 분명하다. 그렇다고 서슬 퍼런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 끝자락이다. 높게 날아오를 것이다.


낮은 길도 충분히 내어 준다. 홀로 놓일 것이라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혼자여도 괜찮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4. 길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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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복잡한 걸 복잡하다고 말하지 않고, 그대로 통과해 버리는 사람이다. 바흐에서 티가 나고, 이자이에서 태가 나는구나. 그런 생각들을 나열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옷을 갈아입고 다시 노트북 모니터 앞에 앉았다. 떠나보내야 할 글이 두 편이나 내 손 위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얀 페이지 앞에 다시 앉아, 누군가에게 보내야 할 편지 위에 그날의 나로 안부를 물었다.


“저는 하루를 어찌저찌 잘 보내고, 예상치 못한 일과 생각지 못한 기쁨, 몰랐던 사실들이 여러 개 뒤섞인 상태로 당신의 글 세 편을 읽었습니다.”


당분간 클래식에 관한 글을 쓰기로 했다. 다만 여전히 허공 위를 해독하는 일을 난해하게 여기고 있으니.

갈피를 잡아야 했다. 어떻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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