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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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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굴의 '바깥'을 무대에 올리다 - 재현이 아닌 해석


 

카프카의 『굴』은 지하에 복잡한 미로를 파고 사는 존재의 1인칭 서사다. 화자는 외부의 위협에 대한 불안과 강박 속에서 끝없이 굴을 확장하고 점검하지만, 그 노동은 결코 완결되지 않는다. 미완으로 끝나는 이 소설은 현대인의 실존적 불안을 예견한 텍스트로 읽혀왔다.

 

하땅세 극단의 〈굴〉은 카프카의 작품을 충실히 재현하려는 연극이라기보다, 카프카를 각자의 방식으로 '넘어가려는' 포부를 담은 작업에 가깝다. 이 공연은 하나의 해석을 제시하기보다, 하땅세 극단원 개개인의 시선과 몸을 통해 카프카의 『굴』을 다시 통과해 보려는 시도로 보인다.

 

연출의 글에 등장하는 "굴의 바깥 여백을 배우들이 수행한다"는 표현은 이 작품의 방향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는 『굴』의 서사를 무대 위에 옮기겠다는 뜻이 아니라, 그 텍스트가 놓인 바깥의 조건—즉, 오늘날 『굴』을 읽고 살아가는 현실—을 무대화하겠다는 선언처럼 읽힌다.

 

실제로 배우들은 각자의 이벤트 스코어를 시작하기 전, 하땅세와 관련된 개인적 기억을 공유한다. 어떤 배우는 연극인으로서의 삶을, 어떤 배우는 제주 4·3사건 희생자 유족으로서의 정체성을, 또 다른 배우는 수영이라는 취미를 이야기한다. 이처럼 공연은 '연극예술인'이라는 범주를 넘어 개개인의 특수한 삶까지 포괄하려 한다. 개인적으로 이 '바깥의 여백'은 카프카의 『굴』이 존재하는 2025년 한국 사회,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의 구체적 삶을 가리킨다고 느껴졌다.

 

이러한 선택은 공연의 구조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땅세는 공연 시작 전, 대기실 공간에 『굴』과 관련된 자료들을 전시해 관객이 미리 작품의 맥락을 접할 수 있도록 한다. 『굴』의 내용은 이미 전제된 채로, 공연은 그 이후의 질문—"그렇다면 우리는 이 굴을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가?"—로 나아간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재현되는 카프카는, 텍스트 속 세계라기보다 동시대를 통과한 카프카다.

 

여기서 말하는 동시대란 단순한 현재가 아니다. 이는 나의 해석이지만, 연출의 글에서 언급된 "불안, 끊임없는 노동, 연결성"이라는 키워드와, 무대에 소환된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이나 밀레의 〈만종〉 같은 이미지들은 노동과 생존, 반복되는 일상의 무게를 암시한다. 정치적 혼란이 반복되고, 자본주의의 한계가 일상적으로 체감되는 사회 속에서, 불안과 반복적 노동이 보편적 감각이 된 조건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무대에서 '동시대'는 선언되기보다, 이후 분절된 행위들을 통해 천천히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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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분절된 행위들, 각자의 굴 - 이벤트 스코어


 

이를 위해 배우들은 형식과 내용을 모두 특수한 방식으로 다룬다. 특히 형식적인 측면에서 이 공연은 도전적이다. 〈굴〉은 극단원 개개인에 대한 인터뷰와 연구를 바탕으로, 플럭서스의 이벤트 스코어를 차용한 방식으로 구성된다. 이 비평에서는 이벤트 스코어를 이론적으로 설명하기보다, 그 방식을 무대 위에서 직접 경험한 것을 위주로 설명하겠다.

 

이벤트 스코어는 단순한 지침으로 제시된다. "옷을 벗는다", "옷을 입는다" 같은 짧은 문장들이다. 예를 들어 '소리없는 아우성'이라는 제목 아래, "야라고 외친다"는 지침이 제시되면 배우는 계속 외친다. 나중에 "호"라는 지침이 제시되고 나서야 그 이벤트 스코어는 끝난다. 이 장면은 진정으로 '소리없는 아우성'이 관객들의 호응을 통해 극복되는 순간처럼 느껴진다. 이런 디테일들이 살아있고, 사람들마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게 구성되어 있다.

 

관객의 입장에서 이벤트 스코어는 배우의 행위를 이해하기 위한 감상의 기준점이 된다. 이 짧은 지침을 통해 관객은 배우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고, 각 장면을 자신의 감각으로 연결해 나간다. 실제로 이 지침들은 장면과 장면을 분리하면서도, 분절적으로 이어지는 행위들 속에서 직관적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돕는 장치로 작동했다.

 

이러한 형식 덕분에 공연은 마치 『굴』 속에서 수많은 두더지들이 각자의 굴을 파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통일된 서사 대신, 고립되고 개인적인 장면들이 평행하게 제시된다.

 

흙과 몸이 맞부딪히는 장면, 반라의 남자가 동료들이 덮어준 흙을 덮고 시체처럼 한쪽에 계속 누워있는 행위, 자전거 바퀴에서 귤을 먹는 행위, 원숭이처럼 행동하다 다시 인간으로 돌아오는 여성의 모습은 모두 그러한 '개별 굴'처럼 보인다. 특히 각 배우들이 행위를 할 때 서로 대화를 하거나 어떤 관계를 암시하지 않고, 행위의 도구로서만 서로를 배치하는 방식은 각자가 고립된 채 자신만의 굴을 파고 있다는 느낌을 강화한다. 홀로 옷을 벗은 남자가 한쪽에 계속 누워있는 행위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 고립과 개인성이 직관적으로 전달된다.

 

이 장면들 속에서 카프카뿐 아니라 카뮈, 명화, 책, 그리고 하땅세의 이전 작업들이 파편처럼 소환되는 점도 인상적이다. 다만 이 공연은 각 장면의 의미를 명확히 규정하지 않는다. 각자의 해석은 관객에게 열려 있고, 나 역시 개별 이벤트 스코어에 대한 해석은 이 글에서 유보하고자 한다. 분명한 것은, 이 공연이 『굴』이라는 공통된 맥락 아래에서 개인의 육체적·심리적 고통을 반복적으로 호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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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하땅세라는 공동의 굴 - 카프카를 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분절된 행위들 속에는 분명한 공통점이 있다. 바로 '하땅세'라는 집단 자체다. 공연이 이루어진 공간은 극단이 창고로 사용해온 장소로, 단원들에게 크고 작은 기억이 축적된 곳이다. 배우들은 각자의 이벤트 스코어를 시작하기 전, 자신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함께 하땅세와 관련된 기억 하나를 공유한다. 풋사과 모형이 놓인 자리, 물이 새던 공간, 과거 공연의 장면 같은 구체적인 기억들이다.

 

무대 중앙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설치된 커다란 모니터 역시 이러한 기억의 층위를 시각적으로 보조한다. 초반에는 무대 장치처럼 기능하던 이 화면은, 중반 이후 창고 안의 작은 구멍을 클로즈업으로 비춘다. 무대 위 배우들이 각자의 굴을 파고 있을 때, 모니터는 실제 공간 속 또 다른 굴을 보여주며, 개인의 굴과 물리적 공간의 굴을 중첩시킨다.

 

각 장면이 끝나면 배우들은 함께 무대를 닦는다. 각자의 이벤트 스코어를 수행할 때는 철저히 고립되어 있던 이들이, 청소라는 일상적 노동을 통해 비로소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동료로 보인다. 이 반복되는 청소 행위는 이들의 유대감을 은은하게 암시한다.

 

그리고 공연은 마지막 장면인 '카프카를 넘다 x10'에서 하나로 수렴된다. 배우들은 종이를 찢어 반죽해 하나의 줄을 만들고, 함께 줄넘기를 시도한다. "연극이 끝나기 위해서는 10번의 단체 줄넘기를 성공해야 한다"는 지침 아래, 관객은 수를 세며 그 과정을 지켜본다.

 

지금까지 서로 드라이하고 도구처럼 배치되었던 인물들이, 비로소 하나의 행동을 위해 협력하는 장면이다. 선을 찢고 다시 재해석해서 줄넘기로 만들어 넘는다는 행위 자체가, 카프카가 암시하는 것들을 함께 넘어서는 것처럼 느껴진다. 시행착오 끝에 성공하는 이 장면은, 공연 내내 각자의 굴을 파고 있던 이들이 하나의 굴을 함께 통과하는 순간처럼 다가온다.

 

카프카는 흔히 언어적 혼란과 관료제, 거대한 체계 앞에서 무력함을 느낀 소수자의 작가로 읽혀 왔다. 그의 작품은 개인의 실존적 고통을 생생하게 재현해왔다. 하땅세의 〈굴〉은 이러한 카프카를 거울처럼 비추면서도, 동시에 그 언어와 형식을 넘어서려는 선택을 보여준다.

 

솔직히 그들이 정확히 무언가를 '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는 암시로만 제시되었고, 내가 해석하는 것이 맞는지도 확신할 수 없다. 그들도 각자 다르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함께 선을 찢고, 다시 만들고, 함께 넘었다는 사실이다. 그 연대만으로도 충분히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다고 생각한다.

 

공연을 보는 내내, 배우들의 단체 줄넘기를 응원하게 되는 마음은 이상할 만큼 생생하게 따라붙었다. 그것은 작품을 이해하려는 태도라기보다, 이들이 선택한 방식과 그들 사이에 형성된 유대를 지켜보고 싶어지는 감정에 가까웠다.

 

카프카가 그려낸 『굴』의 세계가 끝없는 불안과 고립 속에서 스스로를 잠식해 가는 구조라면, 하땅세의 〈굴〉은 그 구조를 부정하거나 벗어나겠다고 선언하지는 않는다. 대신, 그 안에 머문 채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함께 움직이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이 공연이 보여준 것은 완전한 탈출이나 극적인 저항이 아니라, 같은 굴 안에서 계속 움직이겠다는 선택, 그리고 그 선택을 함께 수행하겠다는 조심스러운 합의에 가깝다.

 

하땅세의 〈굴〉은 카프카가 남긴 불안과 고독을 지워버리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각자의 몸으로 통과한 뒤, 다시 집단의 행위로 엮어낸다. 그래서 이 작품은 카프카를 '극복'했다고 말하기보다는, 카프카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불안 속에서,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연결될 수 있는지를 묻는 공연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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