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관계 속에서 길을 잃는다. 메시지는 읽지 않아도 도착하고, 감정은 말로 꺼내기 전에 정리되길 요구받는다. 가족이라는 이름조차 기능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묻게 된다. 우리는 서로를 얼마나 보고 있을까. 아니, 정말로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2000)은 이 질문을 아주 조용한 방식으로, 그러나 끝내 피할 수 없게 우리 앞에 놓는다.
영화는 NJ의 처남 아디의 결혼식으로 시작된다. 임신으로 급히 치러진 결혼식장에는 축하와 함께 설명되지 않는 어색한 균열이 감돈다. 같은 날, 할머니는 쓰러져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다. 이후 가족들은 병상에 누운 할머니를 중심으로 각자의 삶을 버텨내지만, 죄책감과 현실 사이에서 서서히 지쳐간다. 일상적인 풍경 아래, 개개인의 삶과 혼란을 비추어 도처에 산재한 단절과 소외의 징후를 드러낸다.
회사에서의 과중한 업무와 어머니의 변고라는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던 아내 민민은 집을 떠나고, 첫사랑과 재회한 NJ는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흔들린다. 그 사이 딸 팅팅은 처음으로 사랑을 경험하고, 막내 양양은 세상을 이해하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어른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한다. 이 가족의 이야기는 극적인 사건으로 치닫지 않는다. 대신 삶이 원래 그렇듯, 작은 선택과 말 한마디가 쌓이며 관계의 온도를 서서히 바꿔 간다.
〈하나 그리고 둘〉이 붙잡고 있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시선이다. 영화는 인물들을 관찰할 때 의도적으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오즈 야스지로의 카메라가 바닥에 낮게 깔려 가족의 붕괴를 정좌(靜坐)한 채 받아들였다면, 에드워드 양의 카메라는 창문, 문틀, 혹은 도시의 유리벽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인물을 대상화한다. 팅팅이 쓰레기를 버리러 나갈 때나 NJ가 첫사랑과 재회할 때, 카메라는 그들을 직접 비추기보다 유리창에 반사된 도시의 잔상과 인물을 겹쳐 놓는다. 이 미장센은 인물이 처한 환경의 거대함과 그 안에서 개인이 느끼는 고립감을 동시에 보여준다. 우리는 같은 공간에 있어도 각자의 '프레임' 안에 갇힌 존재들인 셈이다.
막내 양양이 사람들의 뒤통수만 찍는 이유는 단순하면서도 결정적이다. “사람들은 자기 앞만 보니까.” 우리는 모두 세상의 절반만 본다. 내가 보고 있는 이 면이 전부라고 착각한 채 살아간다. 아이의 통찰은 성인들의 세계를 가차 없이 해체한다. NJ는 과거의 연인에게서 현재의 결핍을 보상받으려 하고, 아내 민민은 종교적 귀의를 통해 삶의 허무를 지우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자기 자신의 뒷모습 즉, 자신의 모순과 한계를 직시하지 못한다. 결국 우리는 거울을 통해서만 자신을 볼 수 있는 존재이면서도, 그 누구보다 스스로를 가장 잘 알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상처를 주고, 이해받지 못했다고 느끼며, 때로는 너무 쉽게 단념한다.
이 지점에서 에드워드 양은 홍상수의 영화적 방식과 궤를 달리한다. 홍상수가 인물들의 지질한 민낯을 반복되는 술자리와 대화의 변주로 폭로한다면, 에드워드 양은 침묵과 시선의 여백으로 그 균열을 쌓아 올린다. 홍상수의 인물들이 말로써 서로에게 상처를 입힌다면, 〈하나 그리고 둘〉의 인물들은 차마 내뱉지 못한 말들이 고여 만들어진 심연 속에서 각자 침잠한다.
영화의 배경인 1990년대 후반 대만 사회는 급격한 성장 이후 정체를 맞이한 시기였다. 성공의 기준은 분명했지만, 행복의 형태는 누구도 설명해 주지 않던 시대. 이 공기는 지금 우리의 시대와도 기묘하게 닮았다. 관계는 많아졌지만, 이해는 더 어려워졌고,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판단하기 전에 충분히 바라보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관계마저 성과처럼 관리하려 든다. 그런 우리에게 이 영화는 말한다.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다고, 다만 보려는 노력만은 포기하지 말라고.
이 영화의 제목 역시 그 시선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한국에서는 〈하나 그리고 둘〉로 번역되었지만, 원제는 ‘一一’이다. '하나-하나'는 중국어로 개개인을 뜻하며, 동시에 가로로 놓이면 서로 떨어진 '하나'가 비로소 '二(둘)'이 된다. 하나면서도 둘이고, 같은 기호이지만 배치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같은 장면을 보고도 서로 다른 감정을 품고, 같은 시간을 살아도 각자의 시선은 끝내 겹치지 않는다. ‘하나’라고 믿었던 삶은 언제나 ‘둘’ 이상의 방향으로 갈라지고, 우리는 그 사이에서 끊임없이 오해하고 엇갈린다. 하나와 둘, 개인과 타인, 과거와 현재는 끝내 완전히 합쳐지지 않는다. 세상은 언제나 하나의 얼굴만을 허락하지 않으며, 인간은 필연적으로 서로 다른 각도에서 같은 삶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이전보다 조금 더 정직해진다.
영화 속 음악과 침묵은 감정을 과하게 밀어붙이지 않고 사운드로 인물의 내면을 관객에게 넘겨준다. 결국 영화가 남기는 것은 ‘이해하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낙관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영원히 서로의 절반만을 볼 수밖에 없다’는 서늘한 인식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 불가능성을 확인한 지점에서 멈추지 않는다. 내가 볼 수 없는 나의 뒷모습을 찍어주는 양양의 카메라처럼, 타인의 존재란 내가 보지 못하는 나의 절반을 완성해 주는 유일한 거울임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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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GPS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히 알려준다. 좌표와 경로, 도착 예정 시간까지 제시한다. 하지만 삶은 우리에게 어떠한 위치도 제공하지 않는다. 우리는 살다가 보니 어떤 일을 하고 있고, 살다가 보니 특정한 감정을 품게 되며, 살다가 보니 누군가의 죽음을 마주한다. 선택했다고 믿었던 순간들조차 돌아보면 우연과 타이밍에 가까웠다는 걸 깨닫는다.
방향 감각이 사라진 삶의 좌표 위에서, 〈하나 그리고 둘〉은 우리에게 정직한 패배를 권한다. 우리가 길을 잃은 이유는 목적지가 멀어서가 아니라, 내가 보는 세상이 전부라고 믿었던 오만 때문이다. 양양의 마지막 독백처럼, "나도 이제 다 컸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은 타인의 뒷모습을 궁금해하기 시작할 때 찾아온다. 비록 그 끝이 죽음과 맞닿아 있을지라도, 보이지 않는 배후를 응시하려는 그 무력한 시도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우리가 얼마나 자주 길을 잃고 살아가는 존재인지, 그리고 그 길 잃음 속에서도 누군가를 끝까지 바라보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 자체로 충분하다. 나는 아마도 양양의 마지막 이야기 앞에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눈물을 흘렸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