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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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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화예술교육센터 서초 기획 프로그램 The Opus 2025는 2025년 11월 18일부터 12월 31일까지 서울문화예술교육센터 서초에서 열리고 있는 클래식 특화 행사다. 기획 공연, 마스터클래스, 강연, 살롱 등으로 구성되며, 전 일정은 무료로 운영된다. 네이버 예약을 통해 참여할 수 있다.


그중 12월 11일에 진행된 The Grand Duo는 바이올리니스트 박수예와 피아니스트 유성호가 함께한 듀오 기획 공연이었다. 이어 12일에 열린 마스터클래스는 첼리스트 크리스틴 정현 리의 공개 레슨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0. 들어가며



1층 교육센터 복도 안쪽으로 들어가면 화장실 바로 앞에 글 자판기 하나가 있다. 강연이나 프로그램에 들리기 전 시간이 남으면 긴 문장 한 번, 때로는 짧은 문장을 하나씩 골라 가곤 했다. 이상하게 여기서 만난 문장들이 내게 좋은 영감을 주어 누르는 재미가 있었다.

 

이날은 어떤 문장을 얻었더라. 욕심을 좀 부려 긴 것과 짧은 것 모두 눌렀다. 아— 뭔가, 심상치 않은 게 나타났다. 긴 것부터 살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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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선택을 돌아보고 기록하는 행위가 어째서인지 그 선택을, 적어도 그것의 영향을 바꿔 놓았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살아가기 위해서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이것이 이야기의 유일한 결말 같기도 하다.


이건 내가 내심 글쓰기를 두려워하는 이유이기도 한데, 이렇게 과거를 아무렇지 않게 바꿀 수 있고 그 변화를 현실로 굳힐 수 있는 게 바로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 이렇게도 말해본다. 기억을 통해 서사로 꿰어내는 삶과, 있는 그대로의 삶 모두를 이해하려는 투쟁 안에 틀림없이 삶의 경이로움이 있을 것이라고. 그러면서 우리는 시간의 시작과 끝을 아는 데 좀 더 가까워질지도 모른다고.


- 엇박자의 마디, 내털리 호지스

 


어쩌다 이 문장이 내게 왔을까 싶었다. 어떻게 글쓰기를 매일같이 하고 있는 내게 찾아온 걸까.


만약 오늘 내가 이 긴 문장을 누르지 않았다면, 이곳에 당도하지 않았다면, 저 문장을 만나지 않았다면. 여태껏 해왔고, 앞으로도 할 것이며, 당분간 계속해 나갈 이 모든 행위들이 정말로 ‘과거의 선택을 돌아보고 기록하는 행위’라고 설명될 수 있었을까.


내가 붙잡아 두고 있는 ‘과거의 선택’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방인의 열망이다. 그렇다면 ‘돌아보고 기록하는 행위’는 무엇인가. 내가 가장 잘 아는 말로 도화지를 채우는 일이다.


나는 왜 그것들을 글 안에 담아 두려 하는가. 기억을 통해 서사로 꿰어내는 삶과, 있는 그대로의 삶을 동시에 이해하려는 투쟁 안에 틀림없이 삶의 경이로움이 있을 것이라는 문장을 다시 읽어보기 시작했다.


경이롭다는 건 무엇일까. 놀랍고 신기한 느낌이다. 생각보다 별것 아니었다. 더 거대한 뜻이 있을 줄 알았는데, 결국 기억을 통해 사실을 적어 내려가고, 그것을 이해하려 애쓰는 과정 속에 놀라움과 신기함이 있다는 말이었다.


그 설명 앞에서 나는 고개를 두세 번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지난 몇 달 동안 나는 몇 번이나 눈을 반짝였고, 또 몇 번이나 침울하게 가라앉았던가.


왜 굳이 사라진 것을 붙잡아 두는가. 왜 글을 쓰는가. 아마도 내 매일에 ‘경이로움’을 들여다 놓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렇게 해서, 시간의 시작과 끝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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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문장을 살펴보자.


 

자연과 인공이 뒤섞인 풍경의 소리에 귀 기울여본 적이 있었던가?


- 초 기술시대의 ‘듣기’를 위한 메모들, 후니다 킴

 

 

언제부터 나는 클래식 선상 위에서 마냥 헤매지 않았을까. 그래, 허공 위를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길을 잃지 않았다. 소리를 이해해야 할 대상으로 두기보다, 따라가도 되는 선처럼 듣기 시작한 뒤부터였다.


내가 클래식에 낯가림을 지운 시점이 언제였더라. 실내악이라는 단어 자체에 기꺼이 기쁨을 느낄 수 있게 된 순간은 언제였더라. 매일같이 무지와 의심 안에서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일을 무의식적으로 반복하기 시작하면서였을까.


나도 모르게 어느새부터 시작된 일이라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클래식의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구체적인 확신은 없었다.


음악을 좋아하는 건가. 연주가를 좋아하는 건가. 공연을 관람하는 그 행위 자체를 즐기는 건가. 악기 소리 때문인가. 화음에 마음이 끌리는 건가. 무엇 하나 정확히 맞아떨어지지 않으니 애매했다.


왜일까. 나는 왜 기다랗고 어려운 선 옆에 있기를 택했을까. 다행히도 이 질문에는 간단히 답할 수 있겠다. 무엇인가. 예뻤다.


무엇이. 음악이 시작되어 끝에 다다를 때까지 이어지는 여정이 어여쁘다. 여정이란 무엇인가. 현악기를 통해 발현되는 표현이 나아가는 길이다.


그 길 끝에 무엇이 있길래.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인가. 누구긴, 내 눈앞에 있는 당신일 것이다.


그래, 이제는 알겠다. 이 형체가 허공 위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부터, 이 선 끝에 사람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길을 잃지 않았다.


무엇을 따라가야 하나 고민하지 않았다. 첫 선부터 활이 높게 띄워지는 순간까지를 지켜보면 되었다.


그러니 낯선 것이 반가워졌고, 익숙한 것에는 더없이 반가워졌다.


그래, 그렇다. 어쩌다 이 문장들이 내게 왔을까. 저 문장 하나에도 아직 이름 하나 붙이지 못한 생각을 되뇌며, 지나온 복도를 되돌아갔다.


공연이 곧 시작될 것이다.

 

 

 

1. The Grand Duo – 박수예 · 유성호 (12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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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리니스트 박수예와 피아니스트 유성호의 연주 리스트에 크로이처와 파우스트 환상곡이 있어서 무척 기뻤던 기억이 난다. 

 

전자는 곧 좋아하는 해석 버전으로 연주를 듣게 될 곡이기도 했고, 파우스트 환상곡은 이미 내가 알고 오래 좋아하고 있던 곡이었다.


그날의 듀오는 어떤 연주를 보여줬더라. 되짚어보자.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제9번 A장조 Op.47 ‘크로이처’

 

I. Adagio sostenuto – Presto — 느리게, 이어서 매우 빠르게


바이올린이 먼저 누르고, 더 짚어주고, 떠 있다. 피아노는 그에 비하면 단정적으로 시작한다. 오늘의 선은 꽤 진득한 편이려나. 시작하고 꼭 아래를 길게 눌러주다가 올라온다. 아주 짙은 주황색만 같다.


속도를 붙였는데도 피아노랑 경쟁적이지 않다. 갈 길을 서로 잘 간다. 이 선은 전체적으로 굉장히 탄성 있게만 느껴진다. 갔다가 돌아올 때의 길이 엄청 텐션 있게 이어져 있는데, 그걸 능숙하게 잘 늘이고 줄이는 것 같다.


목청이 엄청 좋은데 가라앉을 땐 연기처럼 사그라든다. 치고 빠지는 구간이 극적이지도 않은데, 그 차이는 분명하니 신기하다. 시시각각 용맹한데 부담스럽지 않다. 그냥 정체성만 분명히 가지고 있는 정도이다.


진짜 소리 한 줄만 색이 진하고, 그 주위를 둘러싼 백색소음처럼 느껴질 법한 영역은 오히려 조용하다. 베토벤은 언제 들어도 참 씩씩하다. 짧게 이야기하다가도 꼭 가만히 내려앉게 만들고, 신이 난 듯 박박 달려가는 듯하면서도 아무런 목적이 없어 보이지도 않는다. 

 

그의 곡은 참 들어도 들어도 고동색이 떠오른다. 피아노가 걷게 하고 바이올린이 나긋하게 울게 되는 시점에서는 은은한 핑크빛 하늘도 들여온다. 물론 금세 다시 내달리겠지만.

 

새침한 소리를 밀어붙이면서 음악을 띄워 올리는 재치는 어쩌면 좋을까. 연주자가 워낙 바닥선에 중심을 꽉 잡은 채 소리가 마구 떠다니지 않게 연주해줘서 그렇지, 아니면 정말 하늘 위에서 정돈되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땅에 발을 파묻듯 포인트를 줄 때는 어때. 가로 방향으로 모래바람처럼 얇다랗게 파동칠 때는 또 어때. 왜 꼭 한 번씩 평화를 가져다 놓았다가 돌진하길 택하는 걸까. 신기한 사람이다.

 

II. Andante con variazioni — 느리게, 변주로


피아노가 갈 듯 말 듯, 그러나 마냥 떠나버리진 않는다. 충분히 여유 시간을 주면서 다독여주는 시작이다. 바이올린은 그보다는 훨씬 더 머물러 있다. 같은 걸음이지만 현과 건반은 이렇게 발자국이 다르다.

 

오늘의 피아노는 하늘색이다. 음을 내려놓는 사이사이 잠깐씩 떠 있는 공백 시간이 참 마음에 든다. 두 번째 발걸음은 또 다르다. 조금 더 기다랗게 간다. 숨소리가 떨리는 구간도 두세 번 정도 늘어나 있다.


보다 나긋나긋하게 고개를 까딱이면서 이야기를 나눠보면 어떨까. 작은 반짝임으로 장난도 쳐보면 좋겠다. 물론 되돌아와야 하지만. 세 번째의 인사다. 비슷하지만 소리를 높이는 순간도 있다.


피아노가 반짝 윤기를 가져오기 시작한다. 바이올린이 노래하던 자리에 피아노가 귀여운 걸음을 얹는다. 마냥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아서 좋다. 적당한 든든함이 음 안에 머물러 있어서 마음 편히 들을 수 있다.


피아노가 다시 걷는 시간, 바이올린이 때때로 네 번씩 모여 포인트를 새긴다. 이제는 바이올린이 공을 넘겨받고 재간스럽고 빈번하게 노래할 시간이다. 피아노는 아까보다 아래에서 이야기한다.


하나는 위에서, 하나는 아래에서 간다. 그 사이의 공백이 있는데도 허전하지 않다. 여유 공간으로 느껴져서 두 개의 악기를 음미하기 좋다. 비슷한 흐름이 반복되는데도 지루하지 않다.


분위기가 바뀌는 시점이다. 자연스럽게 피아노가 방향을 바꿔주니 가만 따라가면 된다. 아주 살짝만 내려오면 된다. 이 영역 안에는 너그러운 노을빛의 시냇물이 있다.


아까의 윤기가 또 한 번 도래한다. 첫 흐름과 비슷한데 박동은 다르다. 바이올린은 더 얇아졌을 것이고, 피아노는 조금 더 살아 있는 것 같다. 콩쾅거리는 두근거림이 이어진다.


피아노가 자잘한 윤슬을 그리면 바이올린이 그 위로 빛을 내려다 놓는다. 정경도 함께일 것이다. 피아노가 닿을 수 없는 영롱함을 충분히 묘사해주니, 바이올린에서 은방울이 떠오른다.


애달파지는 순간도 있다. 길지는 않은데, 피아노가 괜히 장난스러워 보이고, 바이올린이 괜히 등 뒤로 걷는 것 같다. 서로의 톤이 다를 때의 재미가 상당하다.


바이올린이 공중에 머물 수 있도록 피아노가 부드러운 구름선을 드리운다. 이 안정감은 따라가기 쉽다. 이별은 또 가냘프고, 깔끔하다.


III. Presto — 매우 빠르게


피아노가 바닥에 커다란 충격파를 두 차례 내려놓고 시작한다. 서로 다른 물음들이 그 위로 동동 떠오른다. 주황빛 선과 하늘빛 물방울의 색 조화가 자연스럽다.


각자는 개성의 겉선만 남긴 채 기세를 조금 내려놓고 함께 베토벤을 맞춘다. 바이올린은 여전히 성격 확실한 소리로 그어버리고, 피아노는 건반 위에서 보여줄 수 있는 어여쁨을 잃지 않는다.


제 역할에 제 색을 잘 들여놓고 흥미롭게 직진한다. 그 차이를 음미하며 나도 그들을 따라간다. 방향은 베토벤이 있는 쪽이다.


그어내는 소리와 내려다 놓는 소리의 서로 다른 재미를 양쪽 귀로 한 번에 느끼게 한다. 끝이 보일 듯하면서도 비슷한 것을 다르게 펼쳐 보인다. 이 안에서는 걱정과 불안이 사그라든다.

 

 

비에냐프스키 파우스트 환상곡 Op.20

 

피아노의 첫 걸음을 듣고 있자니 왼손과 오른손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 같다.


바이올린이 첫 선을 정면으로 가져온다. 마냥 작아지기보다 더 높게, 더 강하게 나아간다. 소리의 목청이 두텁다. 객석 끝까지 충분히 닿는다.


내가 알던 민트색 계열과 달리, 이번 선은 물러서지 않는다. 제자리에서 혹은 더 앞쪽의 분명함으로 이어진다. 끝없이 상승하고 치켜올린다.


종이 앞뒤면 사이의 가련함과는 다른, 짙은 선 하나의 타오르는 울렁임이다. 그래서 피아노도 함께 바닥을 진동시킨다. 가성과 진성이 섞이지 않은 진성이다.


해질 녘이다. 하루를 부지런히 보내고 맞이하는 나른함이 있다. 눈꺼풀이 감기고, 테이블 위에 팔을 내려놓고 잠들 수 있는 시간이다.


바이올린은 안정감 있게 그 주위를 맴돈다. 허공에 별을 박고 아랫선을 긋는 순간에도 선명도는 짙다. 이 호흡에는 후진이 없다.


번쩍임과 밀착감이 이어진다. 피아노는 파스텔 하늘과 연두빛으로 함께한다. 끝에 끝까지 일정한 분명함으로 이별을 고한다.

 



2. 마스터클래스: 첼리스트 크리스틴 정현 리 (1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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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7월과 12월, 하콘 공연을 관람한 뒤였다.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 소나타 2번과 타네예프 피아노 퀸텟을 지나온 나는 당황스레 물었다.

 

“왜 이렇게 내달려요?”

“왜 이렇게 어두워요?”


이에 연주가가 답하기를,

 

“(이 악장이) 원래 그래요.”

“(작곡가가)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


나는 그 대답에 이런 표정을 지었다.

 

“아… 그래요? (진짜 몰랐다, 그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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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을 좋아한다는 건 

 

클래식을 곁에 둔다는 건 생각보다 복잡한 일을 수행할 것을 전제한다. 예습해야 하고, 반복해서 들어야 하며, 배경 설명도 훑어봐야 한다. 연주 영상도 찾아보고, 공연장에 가서 듣고, 돌아와 다시 복습하고, 결국 글까지 써야 한다.


애써 듣고 나서도 마음이 걸리면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오늘 연주가가 유난히 그런 건지 판단은 또다시 유예된다. 기대에 보답받기도 하고, 대차게 실망하기도 하면서 이 일을 계속 반복한다.


이 연주가와 저 연주가의 차이를 알려면 하나만 들어서는 안 된다. 이것도 들어보고, 저것도 들어보며, 조용히 난리법석을 떨어야 한다. 그래야 내가 여러 번 틀릴 수 있다.

 

 

관람객 B

 

나의 사례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클래식 공연 일정이 떴다. 클래식을 좋아하는 B는 자연스럽게 관심이 생겨 예매를 한다. 관람객 B는 예습을 시작한다.


포스터에 적힌 레퍼토리를 검색창에 옮겨 적으며, 혹시 다른 곡은 아닌지 몇 번이고 확인한다. 처음 보는 작곡가, 처음 듣는 제목 앞에서 약간의 설렘과 불안이 동시에 생긴다.


B는 한 음원 버전을 골라 반복해서 듣기 시작한다. 분위기를 가늠해보려는 시도다. 첫인상이 낯설어도 일단 누적해서 듣는다. 한 악장에 막히면 다른 악장으로 넘어가고, 그래도 감이 안 오면 설명을 찾아본다. 공연 당일, 이해가 다 되지 않더라도 결국 연주가의 설득력에 기대보기로 마음을 정한다.


공연 시간이 도래한다. 나는 이때 두 개의 방향으로 심경이 갈린다. 하나는 “와, 역시 음원보다는 이렇게 공연장에 와서 듣는 게 최고야. 내가 들었던 음원이랑 이런 부분에서 포인트가 다르네? 신기하다. 훨씬 좋아.”이고, 다른 하나는 “엥… 뭐지? 엥, 뭐지!”다.


전자는 내가 기대한 만큼의, 혹은 그 이상의 결과물을 목도했을 때의 만족감이다. 후자는 이제 원인을 찾아내야 하는 상태다.


내가 예습을 제대로 안 했거나, 곡이나 작곡가의 특성을 오해한 채 특정 음원을 기준점 삼아 판단한 경우일 수도 있다. 단기간에 이해하기엔 훨씬 복잡한 서사가 있을 수도 있다. 공간이나 컨디션, 해석의 방향이 어긋난 경우도 포함된다.


내가 가볍게 내뱉은 “엥?”의 원인을 파헤치기 위해 별의별 생각을 하며 로비 밖으로 빠져나와 집에 도착하고, 이 노트북 앞에 앉아서 “아!”로 깨닫기 전까지 계속 생각해야 한다.


매번 만족만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다만 아무리 좋아하는 연주가라고 하더라도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끝도 없이 나의 ‘아무 생각 없이 좋아’와의 인사를 가로막는다. 아마 그게, 내가 알고 있는 클래식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공연장에서 즐겼다고 느꼈을까. 무엇을 순조롭게 따라갔길래 연주가 좋았다고 느꼈던 걸까. 내가 만족감을 느낀 공연, 혹은 내가 좋아하는 연주가들의 소리를 떠올려보자. 그들은 무엇을 펼쳐내고 있었을까.

 

 


그래, 그들은 선 하나를 매우 능숙하게 길러온다. 마지막 악장의 마지막까지 다다를 때까지 그 흐름에 끊임이 없다. 표현이 달라질지언정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향하는 느낌을 전달해준다.


그들이 내뱉는 소리선을 하나, 혹은 여러 개 붙잡고 있으면 소리는 알아서 뒤엉키고 풀어지고, 엇박으로 뛰놀고, 위치를 바꿔 달려 나가거나 되돌아간다. 그 지점에서는 모두 비슷했다.


세기를 조절하는 방법, 언제 숨을 내려놓는지, 빛을 어디에 들여놓는지, 어디서 쉬어 가는지에 따라 미묘한 차이가 생긴다. 불협화음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곡이더라도, 안갯속을 헤매이게 하더라도, 변주곡처럼 반복을 활용하더라도 음에는 늘 방향성이 있었다.


각자의 캐릭터는 다르지만 선을 잡고 있다는 인식이 분명하기 때문에, 관람객은 취향에 맞지 않아 지루할 수는 있어도 음악 밖으로 나가떨어진다는 느낌은 받지 않는다.


그런데 만약 그들이 그 중심선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어떨까. 나는 만족도 실망도 아닌, 멍해지는 순간을 맞닥뜨리게 된다. 분명 연주가가 연주하고 있고 무대를 보고 있는데도, 머릿속에 붙잡을 갈피가 없다. 그러다 눈꺼풀이 감기고 잠이 솔솔 온다.


감정선이 전달되지 않는 느낌, 연주가의 표정과 소리가 맞지 않는 느낌, 모든 세기가 강해서 어디서 물러서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태가 겹친다. 어디서 울어야 할지, 고조돼야 할지 모르겠고, 작곡가와 연주가의 스타일도 붙잡히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화살은 나를 향한다. 잘 몰라서 이해를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 악장이 지나가고, 다음 악장에서 난감함이 커진다.


그래서 내가 공연장에서 가장 난감한 경우는 무엇일까. 붙잡을 만한 어떤 풍경도, 그림도, 선도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을 때일 것이다.


12월 12일, 조용히 수업을 구경하던 나는 두 명의 학생에 대한 티칭이 끝난 뒤, 마스터클래스 Q&A 시간에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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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의 지시 사항을 준수하는 게 

연주가에게 얼마나 중요한가요?”

 

연주란 악보에 적힌 것을 소리로 전달하는 일이 아니던가. 연주가가 달라질수록, 내가 붙잡게 되는 기준은 오히려 더 간편해지는 것 같다.

 

생각해보자. 관람객인 나, 작곡가, 연주가 중 가장 압도적인 미학을 가진 이는 누구일까. 어쩔 수 없이 같은 답에 도달하게 된다. 결국 작곡가다. 우리가 여기 모인 이유도 그 사람이 남긴 선율 때문이 아니던가.


나처럼 클래식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사람에게도 매 순간은 대부분 처음이다. 그러니 그날 무대 위에 있는 연주가에게 의지하는 방법밖에 없다. 연주가는 관람객보다 앞서 보다 아름다운 것을 길로 안내해 주어야 한다. 

 

연주가가 힘을 빼고, 작곡가가 소리 안에서 관찰될 수 있도록 그 투명함을 보장해 준다면, 관람객은 이 곡에 대한 이해와 작곡가에 대한 이해를 직간접적으로 얻을 수 있다. 길을 잃는다 하더라도, 필시 되돌아올 수 있다.


그렇다면 연주가의 개성은 어디에서 드러날 수 있는가. 내가 그동안 목격한 경우를 떠올려보면 그렇다. 강하게 긋는 데서가 아니라, 힘을 내려놓는 지점, 가라앉은 소리, 스쳐 지나가는 순간에서 나타나는 것 같다. 소리의 밀도, 공기의 양, 색감의 차이. 그것들은 대개 사소한 포인트에서 드러난다.


작곡가의 의도에 맞게 거닐어주면 개성은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보인다. 오히려 다 보여주려 애쓸수록 개성은 흐려진다.


참, 음악을 한다는 건 여러 가지 사항들을 고려해야 하는 고밀도의 작업임이 분명하다. 다만 어쩌겠나. 나보다 많은 지식을 가진 당신이 우리를 배려해 주어야 한다. 내게는 악보가 없고, 당신의 소리가 나의 시작이지 않은가. 그러니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마저 내 변수가 되면 안 돼요.”


소리가 분명할 때, 나는 마음껏 틀릴 수 있고 기뻐할 수 있다. 공연이 끝난 뒤에도, 그 음악과 당신 없이 친구가 될 수 있다.

 

그러니 투명한 소리 안에서 이야기해 보면 어떨까.

그럴 때 우리 사이에는 어떤 선이 남게 될까.

궁금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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