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완벽함은 종종 인간의 불완전함을 제거하려는 욕망이다.
예술은 흔히 인간의 영혼을 확장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그러나 가끔 무대 예술에 관련된 영화를 보고 있으면, 영혼을 덜어내는 행위에 더 가까운 것처럼 느껴진다. 완벽한 몸짓, 완벽한 음성, 완벽한 시선. 관객에게는 모든 것이 순간적 황홀로 스쳐 지나가지만, 그 찰나를 위해 예술가는 종종 자기 내부의 가장 부드러운 부분을 잘라내어 바친다.
〈패왕별희〉(1993)의 두지, 〈블랙스완〉(2010)의 니나, 〈위플래쉬〉(2014)의 앤드류와 〈국보〉(2025)의 키쿠오 모두 ‘완벽’이라는 신화 앞에서 자신을 갈아 넣도록 강요받고, 또 스스로를 파괴해야만 했던 존재들이다. 이들은 예술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리고 결국 예술을 지독하게 증오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무너진다.
그들은 예술이 요구하는 완벽한 이상과 자신의 실제 자아 사이의 간극을 좁히려다 스스로를 소모한다. 즉, 자기불일치(self-discrepancy)의 심연에 선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 자아는 언제나 불완전하고, 이상적 자아는 늘 멀리 있고, 타인의 기대는 그 격차를 더욱 벌린다.
예술은 이 세 자아의 균열을 통해 태어난다. 그리고 때로는, 그 균열을 메우기 위해 예술가가 먼저 무너져야 한다.
〈패왕별희〉, 역할이 자아를 덮어씌울 때 정체성은 어떻게 파괴되는가
첸 카이거의 〈패왕별희〉는 예술적 완벽이 어떻게 정체성의 박탈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비극이다.
두지는 세상에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다. 창부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고, 여섯 개의 손가락을 가진 몸은 어느 공간에서도 환대받기보다는 처리해야 할 대상에 가까웠다. 결국 어머니는 그의 손가락 하나를 잘라 극단에 맡긴다. 그것이 두지를 “살리기 위한 최후의 선택”이었을지 몰라도, 그 순간부터 두지의 몸은 자기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몸, 예술에 넘겨진 몸이 된다.
극단은 예술을 가르치는 학교라기보다, 몸을 재단해 예술에 맞게 깎아내는 도살장에 가깝다. 두지는 생존을 위해 우희라는 역할을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본디 여자로 태어났어(我本是女娇娥).”라는 대사를 반복하게 만드는 훈육은 단순한 연기 지도가 아니라, 자기 정체성의 수정이다. 두지는 무의식적으로 “나는 본디 남자야(男儿郎).”라고 말하려 하지만, 그 말은 철저한 폭력과 수치, 배제의 공포 속에서 교정된다. 그가 끝내 ‘여자’라는 대사를 온전히 말하게 되는 순간, 두지는 생존을 위해 자신의 자아를 포기하고, 예술이 요구하는 자아를 내부에 이식받는다.
그렇기에 우희라는 역할은 두지에게 하나의 배역이 아니라 인생 전체가 된다. 그는 그 역할에 과몰입해야만 환영받을 수 있고, 삶의 의미를 느낀다. 이때 시투(두안 샤오러우)의 존재는 결정적이다. 사부보다는 덜 폭력적인 형이자, 함께 맞고 연습하는 동료이자, 극 〈패왕별희〉의 패왕. 무대 위 우희는 패왕을 사랑하고, 그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두지는 무대 밖에서도 그 감정을 고스란히 품은 채 살아간다. 어쩌면 우희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버린 두지에게, 패왕이자 동료인 시투는 곧 예술이자 사랑, 그리고 세계의 전부였을 것이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의 불길은 그가 믿어온 모든 것을 일거에 부정한다. 신성하게 여겼던 무대는 혁명 앞에서 한순간에 모욕당하고, 전통 예술은 ‘봉건 잔재’라는 이름으로 조롱받는다. 두지와 시투는 혁명 앞에 끌려 나와 서로의 죄를 고발하고, 함께 쌓아온 사랑과 신뢰의 역사를 스스로 짓밟는다. 예술은 두지를 구원하지 않는다. 두지는 예술을 위해 모든 것을 내줬지만, 예술은 그를 단 한 번도 지켜주지 않았다.
“우리 평생 함께 노래하면 안 될까? (师哥, 我要让你跟我… 就让我跟你好好唱一辈子戏, 不行吗?)
반평생이나 함께 노래했잖아. (这不小半辈子都唱过来了吗)
아니! 평생을 함께 해야 해. (不行! 说的是一辈子)
한 해, 한 달, 하루, 한순간이라도 모자라도 한평생이 아니잖아! (差一年, 一个月, 一天, 一个时辰,都不算一辈子!)”
그럼에도 두지는 예술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우희만이 그의 정체성의 마지막 조각이자, 동시에 가장 깊은 상처를 남긴 대상이 된다. 세월이 흐른 뒤, 그들은 관객이 사라진 빈 극장에서 마지막으로 〈패왕별희〉를 공연한다. 폐허 위에 세운 허상처럼, 우희는 패왕에게 마지막 사랑을 고백한다.
극과 현실의 경계가 완전히 무너진 그 순간, 두지는 더 이상 어디까지가 연기이고 어디까지가 자기 삶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예술과 사랑, 정체성이 서로 뒤엉킨 채, 그는 우희의 결말을 자신의 결말로 택한다.
두지와 우희를 더 이상 분리할 수 없게 된 이상, 그는 예술 속에서 죽어야만 자기 존재를 끝낼 수 있었다. 그의 죽음은 자멸이 아니라, 그가 평생 연기해 온 역할과의 비극적인 완성이다.
역할과 자아가 겹쳐 정체성이 외부에서 덮어씌워지는 두지의 비극은, 〈블랙스완〉에서 정반대 방식으로 반복된다. 이번에는 바깥에서 주어진 역할이 아니라, 내부에서 갈라져 나온 자아가 스스로를 찢어버린다.
〈블랙스완〉, 완벽을 향한 순백의 욕망
니나는 얼핏 발레를 향해 순수한 열망을 지닌 인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열망의 이면에는, 실패한 발레리나인 어머니가 만들어 놓은 세계에서 자라난 조형된 자아가 있다.
어머니는 자기 미완의 꿈을 딸에게 투사하며, 니나를 사랑한다기보다 조각한다. 유아적 장식으로 굳어버린 방, 사생활이 봉인된 집, 철저히 통제되는 식단과 몸. 니나의 삶과 몸은 오래전부터 어머니의 손안에 놓여 있었다. 흠 없는 백조의 이미지는 니나가 사랑받기 위해, 존재하기 위해 지켜야 하는 조건이 된다. 완벽함은 선택이 아니라, 존재 최소한의 기준이 된다.
“너는 백조는 완벽하지만, 흑조는 아니다.”
감독 토마스의 이 한마디는 니나의 세계를 전복한다.
지금까지 그녀가 추구해 온 백조의 이미지는 순수, 통제, 순응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흑조는 자유롭고도 관능적이며, 파괴와 방종을 품은 존재다. 토마스는 니나에게 흑조를 연기하라고 요구하면서, 그동안 억압해 온 자아를 끌어올리라고 강요한다. 하지만 오랜 시간 순백의 이미지 안에 갇혀 있던 니나에게, 그 과정은 표현이라기보다 자기 붕괴에 가깝다.
거울 속 자신이 니나를 조롱하고, 몸에 나지 않은 상처가 비치기 시작한다. 니나는 흑조가 되기 위해 자기 안의 ‘다른 자아’를 연기하려 하지만, 그 자아는 너무 오래 눌려 있었고, 한 번 터져 나오자 연기와 실재를 구분할 수 없게 만든다. 그녀는 수시로 자신의 몸을 긁고, 손톱의 살을 뜯어내고, 발톱을 벗겨낸다. 현실과 환상, 자아와 역할의 경계가 모두 무너져 내린다.
릴리는 흔히 라이벌로 보이지만, 사실 그녀는 니나가 오랫동안 억눌러온 흑조적 자아의 그림자에 가깝다. 릴리는 자유롭고, 관능적이며, 통제되지 않는다. 니나가 결코 해내지 못한 모든 것을 태연히 해낸다. 그렇기에 니나가 릴리를 경계하고 질투하는 감정은, 타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의 억압된 자아를 향한 감정이다. 환상 속에서 릴리를 죽였다고 믿었던 순간, 배에 박힌 것은 결국 자신이 깨뜨린 거울 조각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장면은, 그 파괴가 온전히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었음을 폭로한다.
<백조의 호수>무대에서 니나는 마침내 백조이자 흑조가 된다. 두 자아를 건강하게 통합한 것이 아니라, 어느 한쪽을 선택한 것도 아니라, 자기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둘 모두를 연기하는 데 성공한다. 흑조로 무대를 장악할 때, 그녀의 눈빛은 완전히 다른 존재의 것이다. 그것은 연기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사라지고 역할만 남은 상태다.
“I was perfect. (나는 완벽했다)”
〈블랙스완〉의 비극은 니나가 예술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예술이 요구하는 완벽한 이상적 자아를 사랑하게 된 데 있다. 어머니의 실패, 토마스의 평가, 발레단의 서열,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의 순백 이미지. 그녀의 춤은 자유롭지도, 관능적이지도 못하다. 자아 불일치를 극단적으로 증폭시키는 구조 속에서 자기 자신을 파괴해 버린다.
그렇기에 그녀의 마지막 대사는 추구했던 완벽, 그 잔혹한 이상에 가닿은 순간이다. 예술은 그녀에게 날개를 주지 않았다. 어쩌면 그저 추락하기 좋은 높이만 만들어 주었을 뿐이다.
니나는 이상적 자아를 향해 안쪽으로 파고들다 무너졌다면, 〈국보〉의 키쿠오는 개인의 열망을 넘어, 이미 밖에서 완성된 전통과 세습의 구조에 부딪혀 파괴된다.
〈국보〉, 전통과 계보의 완벽이 한 인간을 어떻게 소모하는가
〈국보〉가 그려내는 예술은 단순히 전통과 계보가 강요하는 형식만이 아니다. 처음의 키쿠오에게 가부키는 무엇보다도 진짜 사랑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뒤 하나이 가문에 들어온 키쿠오는, 외부자라는 위치와는 별개로 무대 위의 세계 자체에 매혹된 아이다.
처음의 키쿠오는 결핍을 보상하기 위해 예술에 매달리는 사람이 아니라, 예술에 매료되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가 올라가고자 하는 자리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이 있다. 세습이라는 전통적 규칙, 피와 가문으로 이어지는 계보의 규범이 그것이다. 키쿠오는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가문의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결정적인 순간마다 부정당한다. 처음에는 사랑이었던 열망이 점점 ‘이 세계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나’에 대한 인식과 뒤섞이고, 그때부터 가부키는 순수한 기쁨의 공간이 아니라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장소로 변해간다.
반면, 명문가의 아들 슌스케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가부키의 기준을 상속받은 존재이다. 그에게 완벽은 선택이 아니라 가문이 요구하는 최소 조건이다. 둘은 라이벌 관계가 아닌 서로의 결핍을 비추는 거울이며, 서로의 한계를 자극하고, 서로의 파국을 가속하는 동반자이다. 사회부과적 완벽주의(socially-prescribed perfectionism)의 양면성에서 말하는 것처럼 슌스케는 '반드시 완벽해야 한다'는 외부의 시선 때문에 무너지고, 키쿠오는 '완벽해야만 나도 이 세계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결핍 때문에 붕괴한다.
"지금 내가 제일 원하는 건 네 피야. (今いちばん欲しいのはおまえの血だ)
내겐 나를 지켜줄 것이 아무것도 없어. (俺を守ってくれるものなんて何もない)
네 피를 컵에 담아 벌컥벌컥 마시고 싶어. (おまえの血をカップに入れて、ぐいっと飲み干したい)"
키쿠오에게 예술은 자기 존재를 증명할 단 하나의 길이었다. 슌스케에게 예술은 가문과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숙명이었다. 둘에게 예술은 기쁨도, 자유도, 창조도 될 수 없다. 그렇기에 순수하게 가부키에 매혹되었던 키쿠오에게 연습, 실패와 열망은 자기 실현보다 자기 삭제(self-erasure)의 과정으로 변한다.
영화의 제목이자 이야기의 중심축인 ‘국보’는 개인 예술가의 미적 성취이자 국가, 전통, 역사의 욕망이 만들어낸 명칭이다. 국보(國寶)는 영광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예술가를 개인으로 지운다.
둘의 비극은 개인이 무너진 데 있지 않다. 비극은 예술이 개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삶을 집어삼키는 구조가 이미 완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전통이 이미 완성해 놓은 형식, 계보가 정해놓은 서열, 국가가 부여하는 명예, 대중이 기대하는 이상. 이 모든 것들이 얽혀 예술가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완벽에 맞춰 몸과 마음을 재단해야 한다.
키쿠오와 슌스케는 예술을 사랑했지만, 그들이 사랑한 예술은 처음부터 그들을 사랑하지 않았다. 예술은 그들의 열망을 빌려 완벽을 재현했을 뿐이다.
이렇게 전통과 계보가 예술가를 소모하는 이야기 옆에, 〈위플래쉬〉는 보다 현대적인 방식으로 같은 비극을 되풀이한다. 이번에는 세습도, 극단도, 국보도 아니다. 천재의 신화와 폭력적인 스승의 철학이 한 사람을 연소시킨다.
〈위플래쉬〉자신을 연소시켜 만든 카타르시스
〈위플래쉬〉의 비극은 다른 예술 영화들과는 조금 다르다. 니나가 자기 내부의 억압과 싸우다가 자신을 찢어버렸다면, 키쿠오가 계보와 전통의 구조에 의해 정체성을 지워냈다면, 두지가 예술과 사랑을 혼동하며 자기 자신을 소모했다면, 앤드류는 외부의 폭력성을 욕망하며 스스로를 파괴하는 인물이다.
그의 자기 파괴는 강요된 것이 아니라, 내면화된 폭력에 자발적으로 굴복하는 형태라서 더 잔혹하다. 앤드류는 특별한 존재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불안과 야망을 안고 있다. 음악은 그에게 기쁨이나 해방감 이전에, 자기 존재를 보증하는 유일한 통로다.
플레처는 그런 앤드류 앞에서 폭력을 성장의 촉진제처럼 휘둘러댄다. 그는 상처를 재능으로, 파괴를 천재 탄생의 의식으로 믿는 인물이다. 찰리 파커의 일화를 집요하게 들려주며, '심벌즈가 던져지지 않았다면 버드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서사를 정당화한다. 그에게 폭력은 예술을 정제하는 불이다.
영화 중반부에서 앤드류는 자신이 플레처에게 학대당하고 있다고 느끼면서도, 그 학대가 자신을 특별하게 만들어줄 것이라는 신념을 내면화한다. 이때 발생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은 학대의 승인(Acceptance of Abuse). 즉, 자기 파괴적 성취동기(Self-Destructive Achievement Motivation)이다. 피를 흘려도, 고통스럽게 연습해야 인정받을 수 있고, 자신을 인정할 수 있다. 플레처는 폭력을 제공하고, 앤드류는 그 폭력을 자기 욕망으로 끌어들여 연료처럼 태워버린다.
앤드류는 연인을 버리고, 가족과 멀어지고, 동료들과 충돌하며 자기 삶에서 인간적인 감정을 하나씩 절단해 나간다. 그는 완벽을 위해 정서적 연결을 죄처럼 여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블랙스완〉의 니나처럼 내면에 자리한 완벽주의가 만들어낸 폭력이 그를 잠식한다. 예술가가 인간성을 잃을수록 예술은 완벽해진다는 신화가 완성되는 순간이다.
경연장에 가다 자동차 사고로 피를 흘리면서도 무대에 올라 드럼을 치려는 장면은, 육체적 파괴와 예술적 욕망이 겹친 절정이다. 앤드류의 몸은 더 이상 연주할 수 없는데, 그의 정신은 멈추지 않는다. 그는 더 이상 연주하는 인간이 아니라, 연주라는 행위를 위해 인간성을 소모하는 연료가 된다.
마지막 연주 장면에서 플레처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앤드류를 망신시키려 한다. 이 순간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는 깨지고, 같은 폭력적 신화에 중독된 두 예술가의 재회처럼 보인다. 앤드류는 실패를 거부하고, 플레처의 손을 뿌리치며 자신의 연주를 시작한다.
그 악장의 클라이맥스는 누군가의 승리가 아니라, 공동 파멸의 카타르시스에 가깝다. 플레처는 앤드류의 연주를 인정하는 순간 미소를 짓고, 앤드류는 플레처의 승인을 확인하자, 더욱 광적으로 몰아친다. 플레처는 자신이 바라는 천재를 완성했고, 앤드류는 자신이 바라는 완벽을 달성했다. 그러나 그 완벽은 더 이상 삶을 확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성을 태워버린 뒤 남은 마지막 불꽃에 가깝다.
예술은 천재를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천재의 신화를 믿는 사람들을 조용히 파괴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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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인간을 강렬하게 흔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총이나 칼은 타인의 몸을 파괴하지만, 예술은 창작자를 먼저 파괴한 뒤, 그 잔해로 세계를 울린다. 무기는 누군가를 죽일 수는 있지만, 자신을 죽이며 완성되는 정점이라는 것은 예술만이 보여줄 수 있는 장면이다.
예술가의 몸과 삶, 시간과 상처, 사랑과 결핍이 조용히, 그러나 맹렬한 속도로 갈려 들어가며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탄생한다. 〈패왕별희〉의 두지는 사랑과 정체성을 예술에 투입했고, 〈블랙 스완〉의 니나는 이상적 자아를 위해 현실의 자신을 찢었으며, 〈국보〉의 두 인물은 전통과 계보가 정한 완벽을 위해 자신의 존재를 내어줬다. 〈위플래쉬〉의 앤드류는 타인의 폭력을 욕망으로 바꿔 연소시켰고, 그 불꽃 속에서 단 한 번의 완벽을 낚아챘다. 이들의 예술은 모두 무언가를 창조한 결과가 아니라 무언가를 소멸시킨 대가였다. 예술은 그들의 손끝에서 태어났지만, 그 창조의 순간에 그들 자신은 조금씩, 혹은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예술의 본질이 자기파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누군가는 웃음으로, 누군가는 기쁨과 자유로 작품을 만든다. 예술은 반드시 고통을 통해서만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이 이토록 강렬하고 깊숙이 인간에게 파고드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술이 한 인간의 생애를 재료로 삼기 때문일 것이다.
예술은 고통을 미화하지 않지만, 고통을 통과한 인간의 진실을 품고 있다. 예술은 파괴를 요구하지 않지만, 파괴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 서 있다. 예술은 우리를 다치게 하지 않지만, 이미 다친 존재의 온도를 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술 앞에서 흔들리고, 때로는 신음하고, 또 때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파문을 겪는다.
예술은 누군가의 삶 전체가 깎여 나간 자리에서 태어난다. 그 깊이를 알고 나면, 우리는 작품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목숨이 만들어낸 빛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예술은 총보다, 칼보다, 그 어떤 폭력보다 더 깊게 인간 안으로 들어온다. 예술은 파괴가 아니라 생애의 잔해로 만든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