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상처 난 마음들이 머무를 곳을 찾을 때


 

작은 스마트폰 스크린 속의 이야기를 눈앞의 무대로 옮겨온다면 어떨까? 드라마가 된 소설, 영화가 된 만화 등 활발한 미디어믹스 작업이 이어지는 요즘이지만, 뮤지컬 ‘집이 없어’는 웹툰의 뮤지컬화라는 신선한 시도로 유독 선명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한 작품에 다른 장르의 옷을 입히는 방식은 다양하다. 어떤 작품은 원작의 감성을 온전히 옮겨오고, 또 어떤 작품은 무대만이 줄 수 있는 새로운 결을 만들어내며 관객을 설득한다. ‘집이 없어’는 그 두 방향을 자연스럽게 아우르는 작품이다. 익숙한 웹툰의 장면을 보는 듯하면서도 소극장이라는 공간이 주는 온기와 생생한 감정적 밀도를 고스란히 품어낸 덕분이다.


작품은 막이 오르기 전부터 관객의 마음을 은근히 두드린다. 교과서와 간식 거리, 함께 찍은 사진, 자리 주인의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책상들, 그리고 귀신의 산발이 드리워진 이층 침대까지. 입장 전 극장 로비에 마련된 작은 전시 공간에는 작품 속 ‘귀신의 집’이 현실감 있게 구현돼 있었다. 이는 원작 팬들에게는 반가운 이스터에그처럼 다가오고, 처음 작품을 접하는 관객에게도 이 무대가 다루게 될 감정의 결을 조용히 예고한다. 무대에 오르기도 전에 작품의 세계로 관객을 빨아들이는 이 섬세한 접근은 이번 초연의 분위기를 결정짓는 출발점이 되었다.

 

 

뮤지컬 [집이 없어] 포스터.jpg

 

 

이번 무대는 원작의 주요 인물들 중 특히 고해준과 백은영, 두 인물의 서사를 더 정교하게 조명한다. 해준은 사고로 어머니를 잃고 난 뒤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소년이다. 귀신이 보인다는 이유로 학교에서도 자연스레 외곽에 머물게 된 해준의 곁에는 언제나 외로움이 따라붙는다. 그럼에도 유년 시절 어머니에게서 듬뿍 받은 사랑 덕분에, 해준은 마음 한쪽에 언제나 따뜻한 온기를 지닌 인물로 남아 있다.


한편 은영은 겉모습만 보면 해준과 정반대에 서 있는 듯하다. 화려한 외모와 언변으로 학교에서 인기가 많지만, 때로는 충동적이고 날카롭게 튀어나오는 행동들로 주변을 밀어내기도 한다. 극 중반 이후에야 드러나는 그의 내면에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집에서 비롯된 불안과 고립감이 자리한다.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주변 속에서 스스로를 지켜야 했던 세월은 은영을 외롭게 만들었고, 동시에 타인의 상처를 누구보다 먼저 감지하는 인물로 만들기도 했다.


처음 두 사람의 관계는 앙숙에 가깝다. 기숙사 신청 기간을 놓쳐 어쩔 수 없이 '귀신의 집'에 들어오게 된 해준 앞에, 해준의 지갑을 훔쳐간 은영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순간에 서로를 도와 오해를 풀어주면서 둘 사이의 벽은 천천히 무너진다. 결국은 누군가의 상처를 외면하지 못한다는 점, 마음 한편으로는 누군가와 작은 온기를 나누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둘은 서로 닮아 있었다.


특히 식탁에 마주 앉아 갓 차린 아침 식사를 함께 먹고, 잘 다녀오라는 짧은 안부 인사를 나누기 시작하는 순간들은 이들의 변화를 담아내는 가장 상징적인 장면이다. 으스스한 소문에 둘러싸인 곳에서 불편한 동거를 시작한 은영과 해준이었지만, 어느덧 그 스산했던 공간은 둘에게 좀처럼 허락되지 않았던 '집 같은 집'이 되어준다. 불안과 외로움으로 얼룩져 있던 해준과 은영의 일상에 작은 온기가 스며들기 시작하면서, 그 변화는 무대 밖 객석으로도 잔잔히 번져 온다.

 

 

집이없어_포스터모음.jpg

 

 

한편 주완, 민주, 하라 역을 맡은 조연 배우들 역시 작품의 구성을 탄탄하게 만드는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며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 원작에서 개성적인 서사를 가진 서브 캐릭터들이 비교적 간결하게 재구성되었지만, 그럼에도 캐릭터들이 각자의 '집'에서 느끼는 고충의 핵심은 무대 위에서도 뚜렷이 전달된다. 특히 일인다역을 소화하는 배우들의 활약은 극 전체의 흐름을 부드럽게 이어주고 있어 인상적이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작은 농담과 표정, 몸짓들은 자칫 심각해지기 쉬운 작품의 무게감을 덜어주며 서사를 안정적으로 지탱한다.


밴드 사운드를 기반으로 한 음악에서는, 화려한 음악적 기교 대신 장면과 감정의 압축에 초점을 맞춘 구성이 돋보인다. 2시간이 채 되지 않는 러닝타임 안에서 긴 웹툰 분량을 풀어내야 하는 특성상, 음악의 호소력을 적극 활용한 것이다. 넘버들은 대사로 이루어진 장면들과 자연스럽게 교차하며 극의 흐름을 빠르게 이어 붙인다. 동시에 원작에서 가장 중요하게 꼽히는 장면들, 관계의 방향을 바꾸거나 인물의 내면을 또렷하게 드러내는 장면들에서는 배우들의 대사와 섬세한 호흡을 통해 서사가 직접 표현되기도 한다. 덕분에 원작을 기억하는 관객에게는 익숙한 문장이 또렷하게 되살아나고, 처음 접하는 관객에게는 인물의 마음이 보다 선명히 전달된다.

 

사랑도 상처도 유난히 깊이 남던 시절, 세상의 모든 것이 지나치게 선명하게 다가오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작품은 그렇게 조용히 호출한다. 격변하는 환경 속에서 무엇보다 돌아갈 곳을 필요로 했던 그 시간들. 안락해야 할 집에서 상처받은 이들이 낯선 공간에서 서로의 마음을 쓰다듬고, 때로는 부딪치며, 마침내 편안함을 찾아가는 과정은 해준과 은영의 변화에 그치지 않고 우리 모두의 성장기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한다. 누구나 한 번쯤 지나왔을 ‘집이 집 같지 않았던 순간’, 그리고 그 시간을 견뎌온 자신을 다정히 돌아보게 만드는 것이다.

 

마침내 귀신의 집에서 피어오른 작은 온기는, 무대를 넘어 우리 기억 속에 스며들어 종종 말을 건넨다.괜찮았다고, 잘 견뎌왔다고. 그랬기에 지금의 네가, 또 우리가 있는 것이라고.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