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이 일만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는 기다림을 겪어본 적이 있는가. 수능 끝나면 진짜 삶이 시작된다든지, 대학 졸업 후 취업 준비 중에는 취직을 하면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든지, 취직하면 결혼을 기다리고, 아이를 낳으면 아이가 크기를 기다리고, 정년을 기다리고… 하지만 모든 과업을 마친 후에도 인생은 끝나지 않는다. 무엇을 달성한다고 한들 진짜 삶은 시작되지 않는다. 기다림의 끝에는 완성된 무언가가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도달점이 ‘죽음’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끝나지 않는다. 그러고 나면 이 모든 것은 정말 부조리하게 느껴져서, 생을 살아가는 의미에 회의감이 생긴다.
삶의 부조리성에 대해 줄곧 곱씹으며 지냈는데, 근래 깜짝 놀랐던 일이 있었다. 엄마와 대화를 나누던 중, ‘아무리 살아도 삶이 끝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였다. ‘진짜 삶’이라는 명제는 허상이고, 사실은 죽기 전까지는 끝나지 않는 무한한 과정이라는 깨달음을 함께 느끼는 모녀. 철학이란 20대인 나와 50대인 엄마가 같은 질문과 고민을 하게 만드는 학문이었다.
삶의 부조리를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다뤘다. 에세이 전체에 걸쳐 카뮈는 부조리를 이야기하고 있다. 시지프 신화에 대한 논의는 최후반부에서 짧게 등장한다. 그리스 신화의 시지프는 신을 모독한 죄로 죽은 후 바위를 산꼭대기에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뾰족한 산꼭대기에서 바위는 다시 떨어져 버리기 때문에, 의미 없이 다시금 바위를 올리는 일을 반복해야 한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이 형벌이 인간 삶의 무의미한 반복에 비유되는, 언뜻 매우 부정적으로 보이는 이야기다.
『시지프 신화』는 ‘정말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뜻밖에도 ‘행복한 시지프를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로 끝맺는다. 카뮈는 부조리와 자살에 관해 이야기하면서도 우리에게 자살을 권유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시지프의 삶에 대한 열정, 고귀한 성실성,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 등을 강조하며 행복과 부조리는 같은 땅의 두 아들이라 말한다.
이러한 부조리성을 희곡으로 풀어내어 ‘부조리극’이라고 불리는 작품이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다. 등장인물로는 에스트라공(고고)과 블라디미르(디디), 포조와 럭키, 양치기 소년이 나온다. 고고와 디디는 황량한 들판에서 ‘고도’를 기다린다. 이때 고도가 누구인지 혹은 무엇인지, 왜 기다리는지 등의 묘사가 정확하게 등장하지는 않는다. 둘은 고도를 기다리면서 무계획적인 행위들을 한다. 그렇지만 행동에 가치는 없어 보인다. 양치기 소년은 고도가 곧 올 거라고 말하나 고도는 등장하지 않는다.
2막이 열린 후 포조와 럭키는 극 속에서 많은 시간이 지났음을 보여준다. 고고와 디디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눈치채지 못한 채 여전히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 결국 극이 끝날 때까지 고도에 대해 밝혀지는 바는 없다. 사실상 『고도를 기다리며』에는 사건이라 부를만한 줄거리가 부재한다. 그러나 『고도를 기다리며』가 함의하는 철학적 질문이나 문학사적 의의는 이 작품을 생각해 봄 직하게 만든다. 극을 통해 인간 본질의 의미 없음을 드러내고, 실험적인 내용과 형식으로 ‘부조리극’이라는 장르 자체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도가 무엇인가, 그건 아무도 모른다. 자신이 생각하는 ‘고도’는 사람마다 다를 터이다. 앞에서 설명했듯 어떤 과업 달성 후의 상황이 될 수도 있고, 어쩌면 죽음이 될 수도 있겠고. 어쨌든 우리 모두 ‘고도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인간은 원래 목적 없이 세계에 던져진 존재라고 본다. 그런 우리는 모든 것들에 대해 하나하나 가치를 생각하고, 인간관계와 성취를 갈망한다.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며 살고, 고도를 기다리는 것처럼 어떤 목표를 달성해 낸다면 진짜 삶이 올 것이라 생각한다. 그건 인간의 존재에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없다는 사실이, 부조리할뿐더러 고통스럽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고와 디디처럼, 무슨 행동을 하든 우리가 바라는 고도는 오지 않는다. 오는 것 같다가도 금세 떠나가 버린다.
어느 순간부터 그런 기다림에 익숙해진 채 살아왔다. 항상 꼭대기를 향해 바위를 밀어 올린다. 과업 달성을 위해 현재의 삶은 그저 유보된 하나의 과정으로써 존재한다고 느낀다. 아직 진짜 삶은 오지 않았다는 생각에 갇혀 현재를 내다 버린다. 고고와 디디 역시 비슷하다. 무의미한 행위를 하며 고도를 기다리는 것은 삶을 견디게 함과 동시에 유예하려는 핑계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고도를 기다리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태어난 이래 죽어가고 있고, 죽기 위해 살고 있다. 삶의 끝에는 언젠가 죽음이 오고 누구든 피해 갈 수 없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고도가 오느냐’가 아니라, ‘고도를 기다리는 동안 무엇을 해야 하느냐’다. 기다리는 시간이 삶 그 자체이므로. 시지프가 바위를 밀어 올리는 그 행위 자체가 존재, 삶 그 자체다. 그것이 실제로는 무가치하더라도.
인간의 존재는 의미도 목적도 없지만 삶에 의미가 없다는 것이 곧 죽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결국 부조리한 세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다림 자체를 삶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바위를 밀며, 고도를 기다리면서 살아내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