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세계에서 만난 것 중
가장 참혹하지만 가장 다정한 현상.
- 시인의 말
현상의 사전적인 의미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사물이나 존재가 바깥으로 드러나 인간이 지각할 수 있는 외적인 모습을 뜻하는 ‘현상(現象)’, 그리고 노출된 필름이나 인화지를 약품으로 처리하여 상이 나타나도록 함의 ‘현상(現像)’이다.
이때 후자에 해당되는 ‘像’(모양 상)은, ‘像(모양 상)’은, 전자의 ‘象(형상 상)’에 사람 인(亻) 부수가 더해진 한자이다. 즉 現象은 있는 그대로의 드러남이지만, 現像은 사람의 개입이 있어야 가능한 드러냄이다.
한영원의 첫 시집 『코다크롬』의 표제는 1935년, 코닥이 출시한 전설적인 컬러 슬라이드 필름의 브랜드명이다.
최초의 컬러 필름 중 하나인 이 카메라는 2009년 단종되었지만, 선명하고 쨍한 콘트라스트와 뛰어난 색감으로 유명해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위 글에서의 현상이 과연 어떤 의미일지 시인은 정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목인 코다크롬처럼, 한영원은 시라는 카메라를 통해 무수한 현상을 현상해 낸다.
1. 부르는 대로 이름이 생겨난다
한영원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조각조각 쪼개어 현상한다. 여기서 이 무수한 자신에게 이름과 인칭을 붙이는 것은, 내면의 불가해함과 관계 맺는 시인만의 주술적인 방식이다.
「애쓰는 마음」에서의 애수哀愁는 “여러 지역의 사투리를 섞어 쓰는 버릇을 가졌고/그래서인지 사람들을 너무 많이 사랑해버렸고/어쩐지 애환이 많은” 인물이다. 「마치」 속의 마치는 “마치 이게 과정이 아니라면 좋겠어”라고 말한다. 「람다 세계」의 ‘람다’는 “슬픔을 연습하는 사람을 보았”다며, “우리에게 있어 슬픔은 어떤 신화에 나오는 열한 번 반복되는 세계와도 같다고” 말한다.
이름은 어떻게 태어나 나의 가죽을 쓰고 걸을까
죽음의 앞과 뒤에는 어떤 공식을 대입하는 게 나을까
내가 쓴 편지를 보여주는 너 때문에
내가 나였음을 믿을 수 없다
네가 쓴 편지를 보면
우리 과거를 믿을 수 없듯이
삼월의 무덤은 동그란 책처럼 보인다
너는 결코 혼자 집필되지 않는다
예수의 무덤일까
아니야 그건 두꺼비집이다
삼월에는 부르는 대로 이름이 생겨난다
- 「부르바키」 中
이 ‘이름 붙이기’의 주술적 성질은 「부르바키」에서 자세히 엿볼 수 있다. 부르바키란 익명의 프랑스 수학자 단체의 필명이다.
이들이 공동집필한 『수학 원론』의 기본적인 명제는, 집합론을 기초로 하여 수학 전반을 구조적으로 체계화하는 데 있다. 시는 외적으로는 새학기 교정, 즉 삼월을 표상하고 있으며 어린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우리’는 “두꺼비집을 만들어 연신 두드리며 / 예수는 어서 나오라고 소리치고” 있다.
그것이 예수의 무덤일지, 두꺼비집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호명하는 순간 즉시 “이름은 생겨나고”, 대상은 곧바로 “나의 가죽”을 쓰게 된다는 것이다. 즉 본래의 ‘그것’에서부터 탈피되어, 시인의 시선, 감각과 언어의 외피를 입는다. 렌즈 안에 정렬되며, 이름이라는 분류 아래에서 세계는 선명해진다.
‘이름 붙이기’란 결국 대상을 구조화, 가시화하는 동시에 그 고유성을 살해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는 ‘너’와 ‘내’가 과거에 쓴 편지로 서로가 부정되는 것처럼, 세계는 “결코 혼자 집필되지 않는” 피카레스크적 텍스트이다.
‘너’와 ‘나’는 이에 동조한 공범이며, 영매이다.
2. 귀神
그러나 이 ‘호명으로서의 살해’는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아니다. 이는 인간이 언어를 배우는 순간 피할 수 없이 범하게 되는 인식의 방식이며, 동시에 시 속에서 시인이 죽음과 동행하는 과정의 필연적 장치이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이러한 명명이 이 세계에서 어떤 식으로 작용하고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으며, 그에 대해 명백한 책임을 지고 있다.
시집 곳곳에는 반복적으로 죽음의 이미지가 등장하며, 「패러독스 빛」과 「아게하」에서는 ‘귀신’이라는 명확한 영적인 인격체로 등장한다. 「패러독스 빛」에서의 귀신은 ‘나’의 등에 업힌 채로 칭얼댄다. “네가 되지 못한 너를 먹고 커라 장성해져라”와 같은 주술적인 속삭임은 귓가에 신이 속삭이는 ‘묵시’로 읽히기도 한다.
우주에는 어떤 작은 행성이 있는데 그 행성에는 자기를 신이라고 말하는 이가 살았대 그는 행성에 오는 사람들마다 신도로 삼았는데 너무 악독한 나머지 모두 금방 떠나버렸대 그래서 영원히 혼자가 되었다
혼자가 되었는데 어떻게 신이야
네가 물었다
혼자가 된 것도 서러운데
할 말이 없어졌다
신 자격 박탈이라니
- 「유예와 나」 中
종종 불쑥 ‘샤먼’이 시집 내에서 고개를 내민다. 그는 신과 영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존재이므로 세계의 끝, 즉 ‘시인’의 ‘육체’ 가장 바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존재이다. “긴 목도리를 꺼내” 두르자 “세계는 정말 한 꺼풀”이었다며 그는 증언한다. 세계가 이토록 얇은 껍질로 이루어져 있음은 「유리의 안과 밖」에서 “우리는 거인의 품에 있다/(...)/계속해서 거인의 안을 걸었지/세계는 매일 거인의 몸을 짓이겨 만들어진다”로 이미 예고된 바 있다.
「유예와 나」 연작 중 61페이지에 수록된 이 시는 영원히 혼자가 되어버린 한 신, 심지어 혼자이기에 자격을 박탈당하기까지 한 신에 대해 얘기한다. 이야기를 마친 후 유예와 나는 껌을 싸둔 종이를 씹는데, 이 장면은 추후 「애쓰는 마음」에서 애수와 나의 대화로 재현된다. “시대와 싸우고 있다는 말”을 하는 애수에게 “내가 그런 게 과연 존재하느냐고 묻자 / 믿든 믿지 않든 신의 존재 비슷한 것을 / 껌 종이처럼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그는 대답한다. 그러나 이 시 속의 인물들은 무참히 껌 종이를 씹어버림으로써, 세계를 짓이기기도 한다.
표제작 「코다크롬」 속 ‘너’는 “종말을 다른 세계의 입구라고 생각”한다. ‘나’와 ‘너’, 시 속에서 이름 붙여지고 대상화된 모든 것은 시공간을 바꿔가며 반복적으로 재현된다. 이는 명명, 즉 ‘쓰임’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신’과 ‘시인’의 발음적 유사성처럼, 시인은 이 모든 것을 스스로 쓰고, 섬기고, 회귀하고 있다. 화자인 ‘나’의 등에 업힌 채, 오로지 자신만이 신이자 신도인 세계를 창세하고 있다. “왔니? 스스로 귀환하는 나의 참된 아이들아,”로 시작한 물음은 “너희는 나를 선지자라고 불렀다.”는 신의 목소리로 완결된다.
3. 하멜른의 아이들에게
빛의 미래에서 무엇을 보고 왔니
나를 보자 민은 물었다
왜 울어? 우리 그렇게 어두워?
민이 다시 물었다
나는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미래의 우리에게 진 거 같아
넘겨본 사진집은 계속해서 동일한 필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나는 언젠가 그 필름이 단종되었을 때
사진가의 마지막을 생각했지만
길을 걷다가 본 잿빛 공터는 누군가에 의해 점유되고 있었다
우리는 점유되는 것과 점유되지 못한 것
둘 중 무엇을 질투할지 얘기하며
엊그제 강가에서 빛무리를 보았다
너울너울 흩어지는 빛은 아라베스크 무늬가 되었다가
그로테스크한 무늬가 되었다가
이내 아름다운 초록빛으로 흩어져버렸다
필름은 채도가 높고 쨍한 색 온 세상의 빛을 가져다 쓴 것만 같아
사진집의 사람들은 온통 젊거나 늙어 있다
너는 양면의 세계가 지속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종말을 다른 세계로의 입구라고 생각하는 너는
네 질투는 조금 더 선한 쪽으로
모두를 한꺼번에 사랑하기 위함인 듯하고
사진가의 사진은 미래가 없이도 지속될 거라고
우리의 사랑하는 마음은 믿어 의심치 않고
그것은 더 나은 방향입니다
빛의 미래에서 본 것은
가끔 진다고 해도 넘어지지는 않는 세계의 배면
- 「코다크롬」 전문
그러므로 이 세계는 명명과 해석으로 죽음을 선고하고, 다시 새로운 생으로 열리는 무한회귀의 구조를 띠고 있다.
표제작 「코다크롬」에서 셔터가 눌리는 순간, ‘나’는 빛의 미래를 목도하고 돌아온다.
“미래의 우리에게 진 것 같다”며 순간 눈물을 흘리지만, 그는 분명히 알고 있다. 저편의 문으로 “왜 들어간 사람들은 왜 돌아오지 않을까”하는 물음에 “종말을 다른 세계로의 입구라고 생각하며 질투하는 너”는 “조금 더 선한 쪽으로/모두를 한꺼번에 사랑하고”, 이 순간이 존재했음은 변하지 않는다.
“미래가 없이도 지속될” 필름 사진처럼. 이 시집은 외로운 창세기로서가 아니라, 기록과 명명으로, 코다크롬의 따뜻하고 선량한 색감으로 다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