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자와 부정의 종말은 자아를 비대하게 만든다. 세상의 모든 것을 ‘나’의 위치에서만 바라보는 사람은 역설적으로 나를 잃어버린다. 내가 아닌 모든 것들로 인해 내가 나로서 있을 수 있음을 모르고서 왜 내가 나인가를 궁금해하지 않을 때 나를 잃어버린다.
여기서 다시 한번 모순되게도 그 흐름의 반복은 나라는 사람의 자아를 비대하게 만든다.
["우리는 글렀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계속 막이 내리고, 밤이 오고, 악몽을 꾸며, 사람을 만나고, 박수 치고, 안부를 묻고, 상처를 주고받으며, 병들고, 앓다가, 그렇게 쇠락하는 걸 지켜봐야 한다는 거겠지."] - 20쪽
기옥, 윤주, 태인, 그리고 상호라는 네 명의 인물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네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당신은 나를 모른다는 태도로 일관한다. 분명 그들은 각자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지만 그 시선에 비친 것은 상대가 아닌 자신의 모습이다.
분명히 상대에게 말하고 있지만 그들이 말을 건네고 있는 것은 상대의 눈에 비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다. 기옥은 윤주에게서, 윤주는 기옥에게서, 태인은 상호에게서, 그리고 상호는 태인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본다. 네 개의 거울이 서로를 비추며 빛을 난반사시키고 있는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우리들의 삶의 표상이다.
비관적인 나르시시즘에 빠져버린 인간들의 초상이란 참으로 초라하기 짝이 없다. 연기라는 건 나에게 누군가를 뒤집어씌우고서 그 사람의 자아를 보여주는 행위다. 그렇게도 다양하고 많은 자아를 뒤집어쓰는 일을 밥 먹듯이 하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에게 타자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문법으로, 오롯이 자신의 규칙으로 이루어진 부름에만 응하는 자아를 몇십, 아니, 몇백 개를 뒤집어써 본들 거기서 타자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것은 운명도 뭣도 아니다. 행운도 불행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기에 누구를 탓할 수 없다. 그게 무엇이든 아주 작은 먼지에 불과하다. 이제 그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나는 홀로 남았다.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타오르는 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 그것은 비명이자 환호."] - 143쪽
네 명의 등장인물이 보여주는 것은 현대의 삶이다. 비대해진 주체만 남고 타자가 멸종해 버린 지금의 사회다.
우리는 왜 우울하고, 왜 소진되며, 왜 병들어가는지에 대한 답이 여기에 있다. 무차별적이고 무분별하고 멈추지 않는 자기 재생산을 위한 미디어로 스스로를 사용하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이 여기에 있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나르시시즘에 빠져있다. 차 사고로 인해 자기 자신이라는 미디어가 중단된 덕에 태인은 그 사실을 마지막에라도 깨닫지만 이미 늦었다.
그의 죽음에서 봐야 할 것은 한 배우의 말로가 아니라 현대인에게 던지는 인제 그만 일어나라는 일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