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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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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은 뒤 내뱉은 외마디는 '흡입력 있다'. 그리고 난 다음, 커서가 뻐끔거리는 모니터 화면을 보고 단번에 평을 써내리지 못했다. 뻔한 레퍼토리 속에서 불편함이라는 감정을 뽑아냈다. 자기파괴적이다. 내가 느낀 소설의 전부다. 소설 'fin'을 정리한다면 '자아찾기 미스테리' 소설작이 아닐까. 내가 나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일종의 위로를, 또 내가 나를 잘 안다고 규정하는 이에게는 '본질'과 '본심이 같냐는 질문을 남긴 채 사라지기 때문이다.

 

정돈된 인물이 없다. 이야기의 포문을 여는 '기옥', 기옥에게 추태를 부리는 '태인', 이 정도는 허용되지 않을까의 하한선을 규정 짓는 '윤주', 살아 숨쉬며 우리 곁에 있을 것 같은 '상호'까지. 기본적으로 본질과 본심이 같지 않은 네 인물 덕에 읽는 나도 느껴지는 감정의 본심과 책의 본질을 분리해서 보는 게 가능했다. 휘몰아치는 줄거리 뒷편에 있는 작가의 말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게 이 책의 본질 그리고 미친 공감력으로 기옥이 됐다, 태인이 되었다 윤주로 변심했다 상호로 마무리되는 게 감정의 본심이다.

 

독서를 하며 가장 공감됐던 이야기는 네 명 중 그 누구도 아니었다. 각자 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난 배우로서 연기를 해본 적도, 누군가를 의무적으로 챙겨야 하는 입장도, 불의의 사고로 주변인을 떠나보낸 후 형사에게 취조를 당하는 입장이 되어본 적도. 그렇다고 내 꿈을 못 이루는 입장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심적으로 위로를 받았다면 그건 그들 하나하나 일궈온 자신의 인생들이 공허감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사람 사는 건 다 똑같지 않느냐는 공통된 일념, 그것의 내용이 무엇이건 너와 나의 공통분모로서, 당장 눈 앞에 있는 불안도 떨쳐지게 만든다.

 

사람이 아닌 약물에 의존한 채 나를 알아달라고 울부짖는 기옥은 윤주의 삶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윤주는 챙겨야 한다는 역할에 집중한 채 기옥의 진심을 외면한다. 그리고 윤주의 이야기를 마저 한다. 어렸을 적부터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지 않고 당장의 편함에만 집중하며 살아온 상호는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그때 자신의 혐오와 불편감,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탓하며 "원래 이렇게 생겨먹은 데다가 가난한 집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것이 번번이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된 원인 같았다. 의지와 무관하게 나를 이루는 것들."이라 결론을 내린다.

 

등장인물 중 핑계를 대지 않고 자신의 신물 나는 악취에 맞서는 자는 없다. 그렇다고 겸허히 받아들이는 쪽도 아니다. 기옥은 윤주의 핑계를, 윤주는 기옥에게서 변명의 이유를 찾는다. 태인이 그나마 죽음으로 인해 솔직하게 그 감정을 드러냈고, 상호는 포장에 포장을 덧댄다. 작가는 등장인물들을 나쁘게 작성하지 않았다.

 

<몸과 빛>의 이야기를 잠시 빌리자면, "'죽음의 수용이란, 단순히 지나간 삶의 기억에 대한 확인을 통해 이루어지는 어떤 체념이나 해탈이 아니라, 오히려 삶 그 자체가 하나의 불확실한 유령이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회의를 통해 이루어지는 혼돈과 무질서의 증식에 대한 기록이다. 그 증식의 '현실'이 다름 아닌 육신의 점차적 소멸을 겪는 유령의 입을 빌려서 이야기 된다는 이 가장 '비현실적' 역설이 바로 이 소설의 중핵이다."라고 말한다.

 

삶을 살아가는데 확실한 이유가 필요한가. 아니 이유를 덧대도 변명을 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어떤 선택을 했던 그건 나의 '온전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타인이 봤을 때 피폐해보일 수도, 찌질할 수도, 싫어할 수도 있지만 그건 또 타인의 시선 곧, 그의 선택일 뿐이다.

 

할 수 있는 유일한 그리고 온전한 방법은 나의 선택과 타인의 선택을 '잣대'를 가지고 보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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