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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이 기사는 <같지만 다른 두 공연, 발레 '지젤'의 두 버전>에서 이어집니다. 많은 사전 정보가 생략된 채 서술되었기 때문에 발레 <지젤>의 구체적인 줄거리 및 캐릭터는 선행 문헌을 참고하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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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낭만 발레 <지젤>은 테오필 고티에와 베르노이 드 생 조르주의 대본과 아돌프 아당의 음악, 그리고 장 코랄리와 쥘 페로의 안무로 구성된 작품이다. 파리에서의 초연, 그리고 러시아로의 ‘수입’, 그리고 유럽으로의 ‘재수입’ 등 다양한 과정을 거치면서 안무와 설정의 변천사를 겪은 이 작품은 구체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1막과 2막의 대비, 사랑의 배신, 윌리라는 존재라는 더 큰 공통점 덕분에 세계 많은 발레단의 대표 레퍼토리로 자리잡았다. 국립발레단은 2011년, 파리 오페라 발레단(POB)에 몸담고 있던 파트리스 바르(Patrice Bart)가 기존의 틀을 유지하면서 새롭게 안무한 버전을 새롭게 채택한 후 이 버전의 지젤은 국립발레단의 안정적 레퍼토리가 되었다. <지젤>이라는 작품을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그 환상성이 유도하는 여백을 추측하면서, 그리고 가능성을 던지면서 관람 포인트를 잡아왔는데, 이 글은 그 속에서 공식적인 기록이 되지 못하고 남겨진 사견들의 모음이다.

 

 

 

사랑에 빠진 지젤과 알브레히트, 계급이 개입하는 ‘사랑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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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공연을 보고 가장 흥미로웠던 점, 알브레히트는 자신의 계급성을 철저히 숨기려고 하는가? 아니면 단지 ‘신분’과 정체만 숨길 뿐 자신이 귀족으로서 쌓아 온 모든 자원들과 체화된 몸의 태도는 굳이 숨기지 않는가? 누군가는 애정을 가지고 찾아온 알브레히트이고, 누군가는 단순히 아름다운 지젤과 순간적으로 즐기기 위해 찾아온 알브레히트이다. 전자는 무지가, 후자는 오만함이 더욱 강조되어 비극으로 이끈다. 주관적인 해석이지만, 마린스키 발레단과 동일한 버전을 따르는 유니버설발레단은 전자의 해석이 더욱 강세이고, 계급적 차이를 강조한 POB 버전과 동일한 국립발레단은 후자의 해석이 더욱 강세인 것 같다.

 

바틸드가 (자칫 보기에) 무례해보일수도 있는 지젤에게 목걸이를 준 이유는 시골 소녀인 지젤이 귀족인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틸드는 지젤을 "귀여워" 한다. 하지만 귀여워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지위가 높은 사람이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목걸이를 선물로 주는 것은 엄청나게 시혜적인 행위이며, 바틸드의 고고함은 체화된 우월감에서 나온다. 물론 지젤이 자기랑 사랑하는 상대가 같아도 마찬가지인데, 지젤은 절대 바틸드에게 위협이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바틸드는 불쾌해하고, 자신을 속인 알브레히트에 싸늘해지긴 하지만 지젤을 동일한 연적으로 경계하고 두려워하지 않는다. 약혼자 바틸드는 지젤이 미쳐서 나락으로 떨어지는데도 죄책감과 책임을 느끼지 못한다. 지젤이 바틸드에게 받은 목걸이를 바틸드에게 던지는 장면이 신분의 차이라는 규범, 질서를 이탈하려는 시도로 읽히는데 그게 합리성의 결여, ‘미친 상태’에서만 가능했다는 점이 슬프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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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라리온이 알브레히트의 정체가 ‘로이스’라는 이름의 귀족임을 폭로한 후 이어지는 ‘매드 씬’에서 지젤은 왜 미칠 수밖에 없었을까? 단순히 사랑에 배신당한 충격은 아닐 것이다. 평등한 관계 속 연애가 아니라 평민 소녀를 귀족 남자가 ‘건드렸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사랑의 배신을 당했어도 어디 토로할 곳 없고, 자신의 ‘농락당한’ 마음이 법과 제도라는 세속적 형태로는 보상 받을 수도 없고 무력한 피해자이자 운 나쁜 평민으로만 남아있어야 한다는 절망감이 그녀를 미치도록 만들지 않았을까? 파트리스 바르 버전에서 항상 처음 보는 이에게 설명해주면 초심자의 당황을 야기하는 설정인 삼각 관계 속 출생의 비밀 역시 ‘어머니의 운명’이 딸에게도 대물림된다면 문학적 코드를 감안한다면 그 의도가 납득이 되는 설정이다. 하지만 이러한 대물림, 즉 재생산은 세대가 지날수록 더욱 강화된다. 단순히 제도적 인정을 받지 못한 어머니와 달리 지젤은 그 운명에 뛰어든 결과 죽음을 맞게 되기 때문이다.

 

매드 씬의 연기를 감상하기 좋은 포인트가 있다면 힐라리온이 알브레히트가 가지고 있던 귀족의 칼을 폭로함에도 그것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은 지젤이 알브레히트한테 안기지만, 그때 본능적으로 힐라리온의 말이 진실임을 직감하며 서서히 알브레히트의 품을 벗어나 미쳐가는 과정이다. 바르 버전 특유의 지젤을 중심으로 무대 속 모든 인물들의 행동이 멈추고, 조명을 통해 이 세계를 인식하는 지젤의 시점에 균열이 가고 있음을 알리는 연출은 지젤이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이행하고 있음을 알린다.

 

 

 

<지젤>이 분할한 세계, 그리고 그 세계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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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젤>은 젠더와 계급이 낮과 밤, 마을과 무덤, 물질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유령, 윌리)이라는 여러 이항대립적 코드를 만나면서 반전되는 작품으로, 이것이 다른 발레의 고전들에 비해 이 작품을 더욱 사회학적 분석이 가능하도록 만든다.

 

1막의 복선이 되는 장면은 지젤의 어머니 베르테가 윌리라는 존재를 남자들에게 경고하며 특히 알브레히트에게 이를 강조하는 부분이다. 지젤과 어머니는 현실 세계에서 평민이면서 여성인 하위주체이기에 스스로를 방어할 힘이 그러한 신화적 영역, 비합리적 영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존재다. 알브레히트가 지젤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소개한 이후 지젤의 어머니는 지젤의 몸 상태에 대한 경고를 하고, 윌리에 대한 신화와 금기를 선언한다. 보통 다른 작품에서는 금기를 선언하는 이는 (대문자) 아버지인데 상징적인 아버지가 사실상 부재한 상황 속에서 어머니가 금기를 선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러니하게도 극적 장치를 고려한다면 결과적으로 지젤은 (심장이 약하니) 과하게 춤추지 말라는 명령을 어겼기 때문에 죽는 것이 되어버린다. 이는 2막에 지젤이 윌리가 되었을 때 다시 반전되어 재현되는데, 춤을 추면 죽을수도 있는 취약한 물리적 신체가 지젤을 구속했던 것과 달리 육체라는 제약이 사라진 상황 속에서 1막의 일탈이자 금기는 일상이 되고 ‘산 상태’의 일상은 일탈이 된 것이다. 지젤이 살았을 때와 윌리가 된 후의 제약이 달라진다. 1막의 지젤의 어머니는 지젤에게 과도하게 춤추지 말라고 하고, 죽어서의 미르타는 알브레히트를 춤추다 죽게 놔두라고 명령한다. ‘Mother Nature’이라는 관념을 연상시키는 미르타는 윌리들의 상징적인 어머니이며, 지젤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모성적 지배를 거스르는 인물이 된다.

 

2막을 보면 지젤만 미르타의 명령을 거스르는 윌리다. 지젤이 윌리가 된 지 얼마 안 된 것이라서 그런 것일까? 그래서 지젤은 삶과 죽음 가운데, 경계선에 있는 느낌이다. 알브레히트를 향한 마음 역시 사랑이라는 인간적인 감정에서 기인한 것인데, 미르타에게 알브레히트를 살려달라고 애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2막의 윌리가 된 지젤은 신체의 한계를 초월할 권리(죽음)와 인간의 마음(삶)을 모두 가진 이중적이면서도 양가적인, 경계선 위의 존재다.

 

 

 

응징하는 윌리들, 2막의 아름다움과 환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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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성이라는 인간의 조건 중 하나를 잃고 춤을 계속 추다가 심장마비로 죽은 지젤을 자신의 새로운 일원으로 받아들인 윌리들은 자신의 시공간적 영역을 침범한 남자들을 죽게 만들기 위해 춤을 추도록 해서 심장이 터져 죽게 만드는 윌리들은 죽음 이전의 세계에서 그들을 억압했던 것을 역전시켜서 억압의 주체에게 돌려준다. 육체성에서 탈피한 윌리들은 일종의 영적, 정신적 존재이기 때문에 춤을 계속 춰도 절대 죽지 않고 죽는 이들은 오직 인간뿐이다. 윌리들의 움직임은 다소 집합적인 군집으로 읽히기도 하고, 자연 법칙을 떠오르게 한다. 즉, 그냥 흘러가는 것. 그들의 응징은 자연 법칙을 거슬렀던 자들에게 행하는 징벌이 되는 것인가? <지젤>에서 중요한 꽃의 등장 속 미르타가 들고 있는 로즈마리, 미르틀 가지는 땅(흙)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식물이다. 이는 앞서 언급했던 ‘Mother Nature’을 연상시키는데, 그러한 ‘어머니 대지’가 남성과 여성을 문명과 자연으로 이분화했던 근대적 시선과 달리 과연 자비롭기만 한 것인지 질문할 필요가 있다. 윌리들의 발레 블랑의 환상성은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일종의 ‘숭고함’, 거대한 자연물에 대한 공포와 맞닿아 있다. 윌리의 존재 자체가 젠더의 역전아며 지젤-알브레히트 구도까지 더하면 젠더와 계급(신분)의 역전이 된다. 미르타와 두 윌리라는 삼각형 구도가 삼위일체를 연상시킨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는데, 만약 그렇다면 윌리들의 체계는 기존의 질서에 대한 효과적이고 낭만적인 패러디 아닐까?

 

그렇다면 윌리들의 응징 속에서 왜 힐라리온은 죽었고 알브레히트만 살아남았는가? 장난식으로 남자 주인공과 영원한 서브 남주의 차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하고는 했는데, 이번 공연에서 알 수 있었던 것은 힐라리온은 반성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지젤을 대면하지 못했기 때문에 반성할 기회가 없었다는 것에 가까울 수도 있다.) 힐라리온과 알브레히트는 모두 죽은 지젤을 그리워했고,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무덤에 찾아온다. 하지만 윌리들에게 춤을 명령받는 힐라리온은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지 못하고, 반성을 위한 전제가 되는 선행 지식이 부재한 것처럼 보인다. 즉, 지젤이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경로에서 자신이 어떠한 부정적 영향을 미쳤는지, 그게 왜 잘못인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윌리들이 힐라리온을 죽음으로 이끄는 과정을 보면 자신의 자유 의지에 반하여 통제할 수 없는 신체의 명령으로 춤을 추게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알브레히트는 춤 자체가 거대한 속죄 의례이자 죄의식과 후회를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지젤과의 접촉 속에서 알브레히트는 살 기회 자체가 박탈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윌리들이 등장하는 2막은 물리적인 세계 그 이상의 초자연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스펙타클로 구성된 세계다. 무대 위 윌리들의 모습은 비물질성의 시각화이며 그 세계에 근접성을 통해 접속되지 않았다면 윌리의 모습이 제거된 채 단지 꽃들이 자연적으로 날아다니는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다. 비물질적인 세계를 시각적으로 볼 수 있는 이는 윌리들의 세계에 다양한 감정들로 인해 접속된 이들 뿐인가? 알브레히트가 환각에 빠지고 깨어나는 듯한 연출적 장치도 있지만, 2막을 단순히 알브레히트의 환각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윌리들이 머물렀다는 사실이 여러 꽃들을 통해 증명된다.

 

지젤은 죽기 전의 알브레히트와 사랑을 나눴을 당시의 꽃잎을 따던 손짓을 반복하기도 하며, 알브레히트는 지젤과 접촉하면서 그의 존재를 느낀다. 이때 지젤은 무게가 없는 존재이지만 알브레히트와의 맞닿음을 통해 현현될 수 있다. 하지만 날이 밝아온 뒤 다시 낮의 질서, 세속적 질서가 도래하면서 윌리들은 ‘비활성화’되듯 서서히 사라진다. 지젤 역시 마지막으로 무덤으로 사라지는 듯한 연출을 통해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게’ 되며, 절규하는 알브레히트의 모습이 이 작품의 마지막이다. 그렇다면 결말 이후는? 알브레히트는 일상에 복귀해서 약혼자였던 바틸드와 결혼하고 살 수 있었을까? 비극의 주인공이라면 응당 그 값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과연 ‘제 정신’으로 살 수 있었을까? 지금은 살아났을지라도 며칠 뒤에 알브레히트가 지젤 무덤가에서 죽어있더라도 그것은 마지막 로맨틱일 것이다. 지젤은 이제 윌리들의 세계에 완전히 동화되어, 응징을 반복하는 일원으로 살아갈 것이다. 인간과 윌리의 경계선 속에서 지젤이 살린 이는 알브레히트일 뿐일 것이다. 작품 이후에 그들은 어떠한 삶, 혹은 삶이 아닌 삶을 살았을까?

 

 

 

마지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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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국립발레단 <지젤> 공연은 파리 오페라 발레단 에투알 박세은 발레리나가 객원으로 초청된 전막 공연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박슬기 발레리나가 출산 이후 전막 발레의 주연이자 대표적인 캐릭터인 ‘지젤’로 다시 복귀하는 공연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박슬기 발레리나는 아마 한국 ‘현역 발레리나’ 중에 지젤이라는 역할을 많이 맡은 발레리나 중 하나일 것이다. 테크닉과 연기 모두 최고의 무대를 보여준 박슬기 발레리나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또한 국립발레단 버전의 <지젤>을 안무했던 안무가 파트리스 바르가 지난 달 6일 세상을 떠났다. 아름다운 작품을 안무하고 신선한 연출을 더한 그의 죽음에 애도를 표한다. 발레 공연을 안무한 안무가들의 죽음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그들의 삶 자체가 작품에 녹아 있기에 공연 자체가 추모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죽음 이후에도 예술은 영원하다는 예술지상주의적인 발언을 믿고 싶은 공연이었다.

 

 

* 본 기사문에 사용된 사진의 출처는 국립발레단 공식 홈페이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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