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과학의 시대라고들 말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귀신과 영혼의 이야기에 끌린다.
그 세계는 일상의 반대편에 서 있는 듯하면서도, 밤늦게 불 꺼진 방의 기척처럼 우리의 감각과 기억 곁을 맴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비합리’가 미디어와 대중문화 속에서 생생히 살아 있다는 사실, 그리고 예술이 그 사이를 안전하고도 풍요롭게 건너게 하는 매개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제 13회 서울미디어시티 비엔날레는 이러한 예술의 역할을 바탕에 두고, 아래와 같은 질문으로 출발한다. “근현대 미술의 전개에 있어 영적 경험은 어떤 역할을 해왔는가?”
전시의 제목 중 ‘강령’은 전시를 통해 일상 너머의 세계와 접속되는 매개적 경험을 제공하고자 함을 밝힌다. 또한, ‘영혼의 기술’은 주류적인 세계 질서로부터 배제된 힘과 개체, 지식까지 공존케 하는 능력이다.

올해 전시의 가장 특이한 장치는 색이다.
조직위원회는 ‘컬러 매니페스토’를 통해 하얀 벽의 중립성 신화를 거부하고, 마젠타·그린·바이올렛·블루 같은 색 영역을 전시의 배치 논리로 삼는다. 색은 기호적 장식이 아니라 동선과 관계 맺기, 의미 생성의 매개이며, 작품들을 연대기나 장르 대신 ‘공명과 성향’으로 묶어 주는 구조적 도구로 기능한다.
이 매니페스토는 칸딘스키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에서부터 르 코르뷔지에의 색채 건축, 바우하우스의 관계적 색, 신지학과 인지학, 그리고 비서구의 색 체계(오방색 등)까지 폭넓은 역사적 계보를 호출한다. 색을 표면의 장식이 아닌 지각의 구조, 공간의 힘, 내적 경험의 조정 장치로 다루는 전통은 전시 공간 구성의 방식과 연결된다.
1장 “어제 온다면, 내일은 최초가 되리라”는 루돌프 슈타이너의 칠판 드로잉 연작으로 시작한다. 인지학의 영적 도식들이 분필의 선으로 응축되어, ‘추상’이 곧 수행이자 사유의 도구였음을 상기시킨다. 날짜와 장소가 표기된 여러 장의 도르나흐 강연 드로잉들이, 근대 예술사의 다른 계보—보이지 않는 질서와 형상—를 펼쳐 보이며 전시의 시간 축을 길게 당긴다.

2장 “마녀와 영매의 것”은 이 비엔날레의 정조를 가장 또렷이 드러낸다.
미술관에 들어오자마자 시선을 사로잡았던, 악마를 그려낸 거대한 직물 작품은 요하나 헤드바의 시리즈 작업이다. 〈그 시계는 항상 틀린다〉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기존의 안정적이고 선형적인 시간의 속성을 뒤틀어 보인다.
키네틱 작업 ‘다른 입’에선 타르같이 끈적한 검은 액체가 둥근 유리관에서 아주 느리게 떨어진다. 거의 정지해 있는 듯한 모습은 직물 작업 속 악마를 출산하는 형상이 어렴풋이 연상되기도 한다. 유리관에 남은 액체, 떨어지는 액체, 바닥에 고인 액체 앞에 서면 평소와 다른 기이한 시간 감각이 느껴진다.
3장 “트랜스”에서는 의식의 경계가 얼마나 다공성인지 체감된다. 요아킴 쾨스터의 〈타란티즘〉은 집단적 황홀의 리듬을 영상으로 번역하며, 타마르 귀마래스 & 카스페르 악호이의 작업은 영매의 몸을 스쳐 지나가는 도시의 이미지—엑토플라즘처럼 새어 나오는 근대의 환영—를 몽타주로 교차시킨다.
작품들은 물리적 사물의 너머에 있는 것들을 ‘불러내’ 고정된 전시물 대신 움직임 그 자체를 제의로 만든다.

이후 우주론을 관념이 아니라 삶의 기술로 다룬 4장 “실천적 우주론”부터 치유의 매개체로서 예술을 다룬 5장, 기술과 영적 경험의 상관성을 새롭게 밝힌 “테크네”, 물의 순환과 교류를 통해 지구의 존재들이 관계맺는 방식을 들여다보는 “등가 교환”을 거쳐 망자의 귀환과 공존을 시사하는 서울시립미술관의 마지막 장에 다다른다.
전시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증명 가능한 것과 체험으로만 남는 것의 겹을 어루만지며, 미신이라 치부된 서사를 다시 듣는 법을 가르친다.
소환이나 믿음을 강요하는 대신, 색과 이미지, 몸의 리듬을 통해 서로의 존재 방식을 ‘공존 가능한 규칙’으로 번역해 내는 것. 그래서 이 전시에서 영적 세계는 도피처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살기 위해 상상해야 할 또 하나의 현실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