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7.jpg

 

 

한동안 만연했던 혼합 매체 설치 작업에 대항하듯, 요즘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다시 회화 작품이 많이 전시되고 있다. 오늘날 경계가 없듯 팽창하는 미술의 범주 속에서, 회화라는 가장 전통적인 시각 예술 매체가 유효한 가치와 의미를 지닐 수 있을지 실험하고 탐구하는 경향이 보인다.

 

국제갤러리에서 진행중인 《Next Painting: As We Are》 역시 전시 제목에서 명시하듯 ‘회화 이후의 회화’, 즉 도래할 ‘다음 회화’를 가늠하고자 한다. 전시는 1980-1990년대 사이에 태어난 6인의 젊은 작가들의 회화 작업을 선보인다. 밀레니얼 세대로 디지털 미디어 환경 속에서 자라난 이들이, 오랜 시간이 집적되고 물질성이 드러나는 회화를 어떻게 다루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전시는 작가들이 포착하는 이미지의 특성과 회화적 물성을 어떻게 교차시키는지 주목하며, 이미지 과잉 시대에 회화가 확보할 수 있는 비판적 위치를 드러낸다. 또 디지털 네이티브로 성장한 작가들의 이미지 경험이 사물ᐧ물질로서의 회화와 충돌ᐧ융합되는 지점을 제시함으로써, 앞으로도 회화가 굳건히 독보적인 이미지 경험과 감각을 촉발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궁극적으로 이번 전시는 앞으로 도래할 ‘다음 회화’가 디지털 이미지의 쏜살같은 가속도를 거스르며, 느린 속도의 감각 경험과 물질적 실체로서의 중요성을 지속적으로 담지할 것임을 주장한다.

 

 

3.jpg

 

 

유신애 작가의 〈포칼립(POCALYEAP)〉 시리즈(2024-)는 그의 다른 영상 작업을 위해 만들어낸 가상의 패션 브랜드다. 그 중 일부인 〈Art Student〉 연작은 서양미술사의 전통적인 도상과 형식을 차용한다. 그 과정에서 애니메이션과 게임 등에서 '아름답게' 나타나는 여성의 신체를 왜곡, 훼손하여 불쾌함을 건넨다.

 

〈Innovation in Exploition〉(2025)과 〈Fishing Fantasy〉(2024)와 같이 오락기 자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반짝거리는 오락기의 몸체와 모니터는 사진과 같은 정밀성을 넘어 실제로 눈앞에 있는 듯 생생하다. 그러한 단단함은 현대 소비문화 속에서 깃든 선정성과 사행성, 폭력성을 물질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6.jpg

 

 

정이지 작가(b.1994)의 It's tomorrow는 픽셀로 이루어진 화면처럼 느껴진다.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색감의 일출 장면은 일출을 마주하던 작가의 개인적인 감정을 그대로 전달하면서도, 우리가 언젠가 한번쯤 디지털 장치를 통해 인터넷에서 본듯한 이미지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는 디지털 이미지 환경과 실제 환경을 오가며 사진을 찍을 때 프레임을 잡는 법, 예쁜 풍경 사진의 전형을 무의식적으로 익힌 결과일지도 모른다.

 

 

2.jpg

   

 

전병구 작가(b.1985)는 일상 속 특정 사물들의 사진으로부터 작업을 시작한다. 하지만 새로 구축한 공간에 배치하면서 대상은 다른 맥락에 놓이게 된다. 본래 있던 시공간에서 벗어난 사물은 관람객의 개인적인 서사를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박물관에 고정된 유물과 같이 견고한 벽에 의해 다가가기 어려워 보이기도 한다.

 

고등어 작가(b.1984) 〈신체 이미지(Body image)〉 드로잉에선 꿈속 장면 하나하나를 그려낸듯 기이한 배경과 인물이 등장한다. 여성의 신체가 처한 다층적 상황을 환성적으로 구성한 흑백의 이미지는 이후 물감으로 색채가 더해지며 무의식 어딘가에 내재된 흐릿한 기억에서 비현실적인 생동감을 지닌 공간으로 이어진다.

 

 

1.jpg

 

 

김세은 작가(b. 1989)는 변화하는 도시의 공간과 그곳을 이동하는 경험을 신체를 누비고 감각하는 경험과 나란히 놓는다. 특히나 터널은 서로 다른 공간을 이어주며 개발의 운동성을 단적으로 보여줌과 동시에, 어둡고 긴 곳에 들어가고 나오는 체험이 신체 내·외부를 오가는 감각을 건네주기에 주요한 모티프가 된다.

 

한편, 판데믹 시기 이동의 제한으로 접근할 수 없는 공간에 대한 사색이 신체 내부와 연결되며 신체 기관과 골격이 도시 공간처럼 구조화된 〈터널(Sinus)〉(2022), 〈힘의 줄(Collected sinew)〉(2022)과 같은 작품이 나타나기도 했다.

 

 

5.jpg

 

 

이은새 작가(b.1987)의 작품 속 대상들은 신선하거나 온전치 못했다. 조금 상해 보이는 포도, 다치거나 뭉개진 듯한 사람들, 화면을 가득 채운 진드기 등은 상처, 부패, 오염과 같은 개념들을 떠오르게 한다. 이와 같은 자극과 충돌의 흔적은 대상의 영속적인 본질보다 순간적인 표면을 담아낸 것 같다. 특히 회화 작품들과 마주한 해골 두상 조각은 존재의 덧없음을 죽음으로 부각시키는 듯하다.

 

각 작가는 회화에 대한 자신만의 관점과 이해를 바탕으로 특색있는 작업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에 반해, 전시의 방향과 의도에 대해선 다소 아쉬움도 남았다. '회화 이후의 회화'를 살펴보려 한다는 목표 아래 전시가 주목한 부분은 현대 디지털 이미지의 속도감과 가상성, 그리고 이와 대조되는 이미지로서 회화의 느린 시간과 감각적인 물질성이었다.

 

물론 느린 시간과 물질성은 회화에서 중요한 속성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회화와 함께 대표적인 전통 매체 조각에도 해당되는 속성이며, 요즈음 몇몇 설치 작업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매체와 구분되는 ‘next painting’의 가장 핵심적인 속성으로 물질성에 무게를 둘 수 있을까. 이와 함께 '이전의 회화'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제시되지 않는다.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작가들이 다루기에, 또 그들이 현대의 이미지를 캔버스에 표상했다는 이유만으로는 회화 다음의 회화를 논의하기에 다소 부족한 점이 있다.

 

전시에서 가장 무게를 둔 개념은 가상성과 물질성의 대립이다. 가상성은 곧 디지털 이미지를, 물질성은 회화를 대표하는 속성이라고 밝힌다. 하지만 이 속성은 각 차원에서 동일한 위치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출품된 회화 작품들은 대부분 캔버스의 평면 위에 매끈하게 달라붙은 형상을 보여준다. 일종의 가상 공간인 이 표면은 우리로 하여금 직물 너머의 무언가를 보게 만든다. 디지털 이미지의 가상성에 대항하는 물질성이 무엇인지 모호해지는 지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Next Painting: As We Are》는 회화가 여전히 유효한 시각적 사유의 장이라는 점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디지털 환경 속에서 익숙해진 시선, 가속화된 이미지 소비에 익숙한 세대의 작가들이 ‘다음 회화’를 질문하며 구축한 각각의 회화적 실험은, 단지 물질성의 복원이나 과거 매체에 대한 회귀가 아니라, 동시대의 감각과 충돌하며 ‘회화로 사고하기’의 가능성을 확장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전시의 개념적 장치들이 더 세밀하게 조율되었다면 좋았겠지만, 지금 이들의 회화는 “무엇이 다음인가”라는 질문을 새롭게 던지는 출발점이 되어준다.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