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정취가 물씬 풍기는 덕수궁 돌담길 옆, 국립정동극장이 개관 30주년을 맞아 특별한 무대를 올렸다.
'서편제'는 작가 이청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며, 그동안 영화·뮤지컬 등 다양한 변주를 통해 관객과의 만남을 시도해 온 한국 예술사의 상징 같은 작품이다. 소리극 〈서편제; The Original〉은 이 '서편제'를 정동극장만의 시선으로 새롭게 풀어낸 시도다. ‘우리의 소리’로 세계와 공감하고자 하는 이번 공연은 한(恨)과 정서, 그리고 예술혼의 본질을 다시 묻는다.
정동극장의 장소성은 이번 기획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정성숙 대표는 덕수궁과 맞닿은 공간에서 내외국인이 함께 한국의 정서를 느낄 수 있는 무대를 만들고자 했다며 “언제라도 외국인들이 찾아와 우리의 예술을 경험할 수 있는 극장이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특히 이번 작품에는 판소리 다섯 마당의 눈대목과 단가 등을 포함해 총 스물두 곡이 담겨 있어, 한국의 소리를 총망라해 만날 수 있는 귀중한 기회를 제공한다. 전통 판소리에 충실히 접근하면서도, 예술적 본질에 대한 질문이라는 보편적 감성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작품이 바로 〈서편제; The Original〉이다.
연출을 맡은 고선웅 연출가는 “서편제 영화 개봉 당시 극장에서 한없이 울었다. 서편제는 내 인생작”이라며 남다른 감회를 전했다. 이번 작업에서 “원하는 일을 할 때의 행복”을 담아냈다는 고 연출은 “이 작품의 인물들은 단순히 선악으로 나눌 수 없다. 유한한 삶 속에서 예술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집요한 본질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밝혔다. 과감한 각색 대신 ‘오리지널’을 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음악감독 한승석 역시 소리를 '슬픔과 고통에 잠식되는 것이 아닌, 그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것'으로 정의한다.
무대 구성 역시 상징적이다.
회전하는 원형무대는 ‘인생길’과 ‘소리길’이 겹쳐지는 여정을 형상화했고, 배우들이 맨발로 무대를 오르내리는 연출은 그 길의 험난함과 진정성을 표현한다. 원형 무대 높낮이의 변주는 극적 긴장감을 더하며, 여백의 미와 소리의 울림이 공존하는 무대를 완성했다. 기존 고 연출의 작품들이 배우와 무대로 비교적 ‘꽉 찬’ 느낌이었다면, 이번 서편제는 ‘소리로 채워지는 무대’라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고 연출은 "원작이 단칸방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소리를 통해 인생이라는 우주를 펼쳐냈던 것처럼, 이번 무대를 통해 소리의 본질을 전달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특히 서편제의 가장 큰 특징은 ‘이름 없는 인물들’이다. ‘소녀’, ‘아비’, ‘사내’처럼 구체적인 이름 대신 상징적 호칭으로 불리는 인물들은, 개인을 넘어 한 인간의 유형을 대변한다. 그들의 삶과 감정은 소리의 흐름으로 이어지며, 서사는 ‘소리’를 통해 전개된다. 모든 소리의 울림이 인물의 감정 및 관계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주요 감상 포인트다. 또한 그 중심에는 새롭게 추가된 오리지널 캐릭터 ‘냉이’가 있다. 원작에는 존재하지 않던 ‘냉이’는 이야기의 매개이자 관객의 시선을 대신하는 존재로, 과거와 현재, 인물과 인물, 무대 안과 밖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한다.
한편 배우들의 소감에도 진정성이 묻어났다. "'The' 오리지널에 '더' 빠져들 수 있도록 연기하겠다"는 '아비' 역의 안이호를 필두로 '소녀' 역의 김우정, 박지현 역시 무사히 극을 마무리하다는 각오를 다졌다. '사내' 역의 박성우는 과거 창극 서편제에 코러스 단원으로 참여했던 인연을 회상하며, "사내라는 큰 역할을 맡게 되어 영광스럽고 감사하다"고 전했다. 같은 역의 정보권 역시 "유독 즐기며 임할 수 있었던 작품이고, 그 긍정의 에너지를 관객에게 전하고 싶다”는 의지를 더했다.
'냉이' 역의 박자희는 소리꾼으로서 작품의 주제에 깊이 공감했다며 “각자 걸어가는 소리길이 있듯, 각자의 인생길을 생각하며 봐주시면 좋겠다”고 밝혔다. 특히 “냉이는 작품의 무게감 속에서도 숨을 고르게 하는 쉼표 같은 존재다. 연출 의도를 최대한 반영하려 노력했다”며 이번 극의 독특성을 강조했다. 같은 역의 서진실 역시 "꼭 손수건을 챙겨와야 할 작품"이라며 극의 호소력에 대한 자신감을 보였다.
외국인 관객을 위한 세심한 배려도 돋보인다. 이번 공연에서는 자막 시스템을 도입해 언어의 장벽을 넘어선 소통에도 신경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정 대표는 “우리도 가끔 소리를 다 이해하기 어렵다. 외국인 관객이 문화를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도록 자막과 번역에 신경을 많이 썼다”며, 이번 공연이 가장 한국적인 것을 가장 올곧게 보여줄 수 있는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우리 정서에 대한 충실함과 새로움을 모두 담아낸 〈서편제; The Original〉은 오는 11월 9일까지, 국립정동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