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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One Battle After Another. 한국어 화자가 단번에 이해하기는 어려움이 있는 이 문구는 하나의 전투 후 이어지는 또 다른 전투, 즉 끝없는 투쟁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1969년, 혁명단체 웨더 언더그라운드가 발표한 성명에서 딴 것으로 멈추지 않는 전쟁과 혁명 등 '계속되는 투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를 제목으로 새롭게 개봉한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세상을 바꾸려는 혁명가들과 그들을 옥죄여 오는 경찰, 이들과 떨어질 수 없이 지독하게 엮여버린 10대 소녀까지 다양한 인물들의 관계와 서사를 다루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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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진 목록과 포스터를 보고 떠올릴 수 있는 전형적인 블록버스터 영화의 문법이 있다. 하지만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관람객이 떠올렸을 전형을 통쾌하게 뒤집는다. 박진감 넘치는 음악, 매력적인 인물들, 영화관에서 웃음을 참을 수 없게 만드는 블랙 유머, 치밀하고도 유려하게 촬영된 영상까지. 이 영화는 소위 말해 ‘거를 타선이 없다’. 당신이 이 영화에 대해 무엇을 상상했든, 그 상상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당신을 이끌어줄 것이다. 그리고 그 예상치 못함을, 당신은 꽤 마음에 들어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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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밥 퍼거슨(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은 폭탄 전문가로서 반정부 좌익 혁명 단체 '프렌치 75'에서 활동했다. 정부 청사와 전신주 등을 겨냥한 폭탄 테러를 도맡았으며 그 과정에는 항상 그의 혁명 동지이자 연인인 퍼피디아 베벌리 힐스(테야나 테일러 분)가 함께했다. 밥은 혁명가로서의 신념이나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야망보다는, 그저 폭탄과 전투 그리고 퍼피디아와의 사랑이 주는 도파민에 취해 혁명 전선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퍼피디아는 매력적이고 섹시한 외모와 혁명에 있어 망설이지 않는 태도, 두터운 인망까지 갖춰 프렌치75의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민자 수용소를 습격하던 과정에서 스티븐 J. 록조 경감(숀 펜 분)을 불필요하게 자극하고, 이로 인해 록조의 성적 욕망을 깨워 그에게 집착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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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퍼피디아가 아이를 임신하고, 밥과 퍼피디아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밥은 이제는 전선에서 싸우며 세계를 바꾸기보다는 우리의 가정과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으로 혁명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다. 반면 퍼피디아는 심한 산후 우울증을 겪으며, 자신보다 아이를 중요시하는 듯한 밥의 태도에 외로움을 느끼고 우울감을 달래기 위해 더욱 혁명에 집중하려 한다.

 

그런 퍼피디아는 은행을 털던 도중 은행의 경비원을 살해하게 된다. 이후 퍼피디아는 경찰에 붙잡히고, 록조의 회유의 넘어가 자신이 살기 위해 동료들을 밀고한다.

 

상황을 파악한 밥은 곧바로 갓난아기인 딸과 함께 도주한다. 신분도, 출신도 바꾸며 원래 이름인 ‘팻 캘훈’을 버리고 ‘밥 퍼거슨’으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이후 16년이 흐른다. 밥은 혁명 활동의 후유증과 언제 경찰이 자신을 잡으러 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심각한 마약 중독에 빠졌고, 사춘기를 겪는 고등학생 딸 윌라와의 관계도 좋지 않다. 그러던 중 학교 댄스 파티에 간 딸이 록조 경감에게 납치당하고, 밥은 딸을 구하기 위해 과거의 혁명가 경력을 되살리려 했으나 이미 오랜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그에게는 모든 것이 쉽지 않다.

 

 

 

폭탄보다 뜨거웠던 배우들의 연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라는 할리우드의 거물 배우부터 숀 펜, 베니시오 델 토로, 레지나 홀, 테야나 테일러 등 베테랑 배우들의 열연으로 3시간에 육박하는 러닝타임이 길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지루할 틈 없이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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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 특히나 빛나는 것은 체이스 인피니티라는 새로운 얼굴의 등장이다. 그녀의 말간 얼굴과 강인한 눈빛은 그 자체로 밥이 혁명을 내려놓고 아빠가 되어야 했던 세월과 그 이유를 납득시켜 주었다. 2000년생의 신예인 체이스 인피니티는 이번 영화로 첫 스크린 데뷔를 맞았다.

 

술과 마약에 허덕이는 망상병 환자 아빠 밑에서 자랐지만 올곧고 바른 청소년으로 성장한 윌라는 위급 상황에서 기지를 발휘하는 판단력과 두려움 앞에 맞서는 용기, 가라테로 다져진 체력까지 엄마인 퍼피디아의 피를 그대로 물려받은 듯 혁명가의 자질을 갖췄다. 하지만 추적당하는 상황에서도 휴대전화를 포기하지 못하는 어린 마음과, 모든 사건이 종료된 후 아빠의 품에 울며 안기는 여느 10대 소녀같은 면모까지 지닌 입체적인 인물이다. 체이스 인피니티는 이 모든 면을 훌륭하게 연기했으며, 베테랑 배우들 사이에서도 단연 존재감을 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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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밥과 윌라의 가라테 스승이자 패닉에 빠진 밥을 도와주는 조력자 세르히오 생카를로스를 연기한 베니시오 델 토로 역시 영화의 대표적인 ‘씬 스틸러’이다. 혁명가로서의 기세가 다 빠진 밥이 당황할 때마다 ‘파도를 떠올려라’고 말하며 밥을 진정시키는 느긋함과, 적재적소에 필요한 도움을 주며 밥을 돕는 리더십, 그리고 경찰에게 검문당할 때 그가 말하던 ‘오션 웨이브’를 연상시키는 춤까지. 그는 밥과 더불어 잔뜩 긴장한 관람객까지 여유롭게 이완시켜 준다. 참으로 매력적인 조연이다.

 

 

 

부성애만큼 아름다웠던 영화의 감각적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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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음악은 전설적인 밴드 라디오헤드(Radiohead)의 멤버 조니 그린우드가 맡았다. 그는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과 2007년 〈데어 윌 비 블러드〉부터 함께했으며 그의 음악은 영화의 큰 매력 요소 중 하나로 작동한다. 반복되는 경쾌한 리듬과 선율은 영화의 강약을 조절해주며 관객에게 환상적인 시네마 경험을 선사한다. 또한, 영화 내에서 믿어도 되는 사람을 판별하기 위해 사용되는 ‘Trust Device’의 어딘지 음울하면서 신비로운 느낌의 멜로디는 특정 장면에서 영화의 BGM처럼 장면과 동화되며 감정을 고조시킨다.

 

영화에는 많은 아름다운 장면들이 있지만, 후반부의 아무도 없는 언덕길에서 이루어지는 자동차 두 대의 추격 장면은 그야말로 수작이다. 여느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나오는 빠르고, 거칠고, 과격한 자동차 액션과는 완전히 다르다. 백미러와 앞유리에서 상대방의 자동차가 나타났다가 언덕을 내려가면 다시 사라지며, 시소를 연상시키는 새로운 형식의 추격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철두철미하고 냉정한 인물들이 아닌, 배신하고 절망하고 단점 투성이인 인물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러한 장면이 존재할 수 있었으리라.

   

이 영화는 제목 그대로, 또 다른 투쟁의 시작과 새로운 세대의 변화를 암시하며 끝난다. 이 영화에서 그들이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역사적 맥락이 어떤지 완벽히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영화의 시퀀스를 따라가며 인물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충분히 재미있고 유쾌하며 그만큼 잘 만들어진 명작이기 때문이다. 감히 올 한 해 최고의 영화로 뽑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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