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은 자신의 시론에서 시를 쓴다는 것과 시를 논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묻고 답한다. 그의 말처럼 시를 대하는 사람은 두 부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시를 쓰는 사람과 논하는 사람, 한 부류를 더 논하자면 둘 모두에 속하는 사람이 있다.
읽기만 하는 사람은 언젠간 쓰게 되고 또 언젠간 시를 논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시 세계에 들어와 한 명의 시인이 되는 것이다. 이번에 온몸의 시론을 읽으며 김수영은 이 모두에 해당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김수영은 「시여, 침을 뱉어라」에서 ‘온몸의 시론’을 말한다. 해당 부분을 살펴보자.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라는 말이다. 그러면서 그 뒤에 존재하는 그림자에 의식하지 않고 의지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즉, 시를 그 자체로 정말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순간에 시작할 수 있으며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온몸으로 미는 것도 아닌 밀고 나가는 것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민다는 행위로 힘만 주고 제자리에 서 있는 시는 모험이 찾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앞으로 나아가며 시가 가야 할 길을 주어야 한다.
또한, 그는 “시인은 자기가 시인이라는 것을 모른다. 자기가 시의 기교에 정통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라는 말을 한다. 그는 이 말로 자기 지시적 진술(고백)의 불가능성을 말한다.
시인이 쓴 시와 시인 사이에 무조건적으로 발생하는 근원적 어긋남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혼란의 상황과 연계되어 있으며 다시 말해 그의 주장은 시인이 시를 쓸 때 발생하는 혼돈의 중점을 꼬집는다.
시인이 자기가 시인임을 모른다는 것, 시의 기교가 정통하고 있음을 모른다는 것은 쉽게 생각해 보자. 우리는 시를 쓴다. 그리고 다 쓴 시를 다시 읽는다. 그러면 시는 나의 시가 아니게 된다. 시를 읽고 합평하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시의 의미가 생기고 사라진다. 즉, 시가 가진 혼돈(미지)의 공간은 시인이 붙잡아둘 수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이는 사람이 한순간이자 동시에 자기의 온몸을 볼 수 없는 세상의 법칙과 동일하다.
김수영이 말했듯 시인이 온몸으로 시를 밀고 있음에도 시인임을 모르는 것은 사람이 자기의 전신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온몸을 단 한 번도 볼 수 없음과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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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의 「참여시 정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시인이나 시는 자기의 시의 증인이 될 수 없다.”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이 말은 단순히 자신의 시에 대한 무지의 언급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분명히 그가 「시여, 침을 뱉어라」의 서두에서 자신이 시에 대한 사유가 아직도 불명확하며 그렇기에 발생한 모호성은 무한대의 혼돈에의 접근을 위한 도구로 유용하기에 부끄럽지 않다고 말했다. 이 점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 김수영이 자신의 시론에서 첫 문장으로 꺼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문장을 다시 머리에 새기고 방금의 말로 돌아가 보자. 아마도 그는 시의 언어, 시적인 말이 모험을 떠났던 미지의 혼란스러운 공간이 다시 앎의 질서 안으로 돌아오는 것을 경계하고자 하지 않았을까?
김수영의 말에서 증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시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과정을 완전히 소멸시킨다고 받아들이면 안 될 듯하다. 시인이 자신의 시조차 미지의 영역에 두고 옴으로 인해 시에 발화될 수 있는 공간을 남겨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시를 읽을 때를 떠올려 보자. 시를 읽고 시집을 덮는가? 그렇지 않다. 시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거나 공유하면서 각자가 모험한 시의 미지의 공간을 찾아낸다. 이처럼 그는 시엔 완전무결한 증인이 없다는 말을 통해서 결국 시인이 미지의 공간에만 있기를 추구한다고 해서-물론 그렇지는 않겠지만- 시가 온전히 정적으로 그곳에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점을 말한다.
시는 다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로 되돌아오고야 만다. 이때 돌아온 시를 보며 시인은 자신의 시의 주인이 스스로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현실 세상에서 여러 때를 묻혀온 시를 보며 타자라는 증인을 발견한다.
이는 시인 스스로 타자화를 통해서 가능할 수도, 미지의 공간에 나타난 타자를 통해서 가능할 수도 있다. 그때가 되어 타자를 받아들이는 순간 시인은 좋은 기분을 느끼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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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이 추구하고 끝내 얻어낸 타자화의 시는 참여시로 드러난다. 그의 「참여시 정리」에 나오는 시의 키워드는 크게 ‘죽음’, ‘노동’, ‘혁명’이다. 시 「못 나고 깬 아침」의 ‘노동이 나를 깨우러 왔을 때/나는 이미 눈 뜨고 있었고’에선 노동을 직접적으로 언급한다.
유치환의 시 「칼을 갈라」에선 ‘남나의 어느 모가지든 닥치는 대로 컥 컥 찔러’와 같은 죽음을 연상케 하는 시어가 나온다. 세 키워드 모두 타자화되어야 하는 부분이다.
살아있는 사람 그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한 죽음은 각자만의 의미가 있다. 노동의 전면에서 노동시를 쓴 시인들 역시 노동이라는 행위로 묶인 여러 타자를 불러일으킨다. 혁명 역시 그 시대의 사회를 경험 해보진 못했지만, 여러 문학과 역사를 통해서 접하면서 후세의 사람들도 나름대로 혁명을 기억한다. 그리고 이를 통한 생명의 힘은 시에서 넘쳐흐른다.
결국 김수영은 1960년대 시인들의 시가 타자화를 통해서 여러 증인을 만든다는 말을 하고자 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유와 사랑의 동의어로서의 ‘혼란’의 향수가 문화의 세계에서 싹트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미미한 징조에 불과한 것이라 하더라도 지극히 중대한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의 본질적인 근원을 발표시키는 누룩의 역할을 하는 것이 진정한 시의 임무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누룩은 술을 빚는 데 쓰는 발효제라는 의미와 빵을 만들 때 부풀게 하는 효소라는 의미가 있다. 두 의미 모두 무언가를 형성하고 완성하기 위한 필수 요소임은 틀림없다.
진정한 시의 임무는 누룩이라는 말, 기억에 남기고 싶은 말이다. 김수영은 혼란의 향수를 시에 뿌린다. 혼란은 그가 말하는 침을 뱉으라는 행위와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작은 목소리로 시작한 일은 언젠가 침을 뱉고 온몸을 움직여 소리낼 수 있게 만든다. 혼돈, 혼란에서 시작할 용기가 있다면 말이다.
김수영은 스스로 “딴사람의 시같이 될 것이다. 딴사람-참 좋은 말이다. 나는 이 말에 입을 맞춘다”(김수영, <생활의 극복>, <김수영 전집2>, 민음사, 2003, 96p)라고 했다. 온몸으로 시를 밀어 나갈 때, 시인의 시가 타자화될 때, 미지의 혼란 속에서 사유할 때‘, 내 시의 새로운 증인을 찾을 때 시작할 수 있다. 언젠간 내 시도 딴사람의 시같이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