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정당화될 수 있는 폭력은 없지만, 폭력을 정당화하여 행사하는 상황은 있다.
가정의 형태가 그렇다. 이를테면 아이를 교육하기 위함이라고 하지만 그 안에 아무렇지 않게 폭력이 포함되곤 한다. 모든 가정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종교의 형태도 그렇다. 종교는 가정 폭력보다 체계화, 집단화되어 있다. 신의 가르침과 전통이라 명명되어 폭력이 폭력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채 세속화되고 만다. 종교 역시 모든 종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연극 <맆소녀>는 두 가지 폭력을 모두 도마 위에 올렸다. 신이 만든 운명이라는 거대한 배경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아이 ‘까이’를 외부인 ‘연영’의 시선으로 바라봤다. 연영은 까이를 보며 자신이 겪은 학대와 방임을 떠올린다. 그렇게 까이의 이야기는 연영의 이야기로, 사회의 이야기로 확대된다.
맆소녀(The Silent One)
극은 그림자 아이들이 “킁킁, 킁킁, 쑤우우” 소리를 내며 무대 위로 등장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아이들의 모습은 두 가지로 나누어 표현된다. 일반적인 아이들의 모습이 있고, 그림자 아이들이 있다. 아이들의 모습을 할 때는 말을 하지 않고 오로지 몸으로 움직이고 표현한다. 마을에서 뛰노는 순수한 아이들의 모습이다. 이들은 베이지색의 상·하의를 입었다. 반면 그림자 아이들은 말을 하고 수상해 보인다. “소녀가 죽은 자리에 새 생명이 자라기 시작했어. 담뱃잎 말이야.“, “백까지 세면 끝날 거야.”, “언니 이름은 뭐지? 그럼 동생 이름은?” 등 알 수 없는 말을 내뱉고 반복한다. 이들은 초록색과 갈색, 베이지색이 섞인 얇은 소재의 상·하의를 입었다. 아이들은 NGO 세이프코리아의 활동에 참여해 놀고 즐기는 반면, 그림자 아이들은 음산한 분위기를 일으키고 연영의 내적 갈등을 고조시키며, 극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인도에 담뱃잎을 재배하는 어느 마을이 있다. 불법으로 마을 아이들을 데려다 담뱃잎을 따게 하며 딸 까이를 키우던 ‘시마’는 단속을 피해 사업을 운영해 왔지만 노동위원회 감사원 ‘디네쉬’에게 걸려 감옥에 가게 된다. 엄마를 잃은 까이는 NGO의 보호 아래 생활하게 된다.
어느 날 이 마을에 의사 연영이 의료진 자원 활동을 온다. 연영은 아이들을 진찰하던 중 까이가 난청이 있는 것 외에도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점이 있음을 발견한다. 거인증을 앓아 8살임에도 키가 165에 이르렀다. 앞으로 얼마나 더 자랄지 모르며, 특정 부분만 자랄 수도 있는 처지에 있었다. 니코틴에 중독되어 있기도 했다.
연영은 NGO 단체 일원인 ‘명무’를 통해 시마에게 까이 수술에 대한 허락을 받고자 하지만 시마는 “그 또한 그애의 운명”이라며 거부한다. 연영은 까이의 상황을 안타까워하면서, 맡은 일을 계속하며 까이와 가까워진다. 연영은 까이에게서 기찻길 근처에서 발생한 아동 성폭행 현장을 목격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연영은 그 사실을 어디 가서 말하지 말라며 까이와 달, 자신만이 아는 것이라고 함께 입을 닫는다.
그러던 중 마을에 누군가 소를 수간하고 죽인 사건이 발생한다. 소를 신성시하는 마을 사람들은 폭동을 일으킨다. 그 혼란 사이에서 까이가 실종되고, 연영은 까이를 걱정하며 찾으려 했다. 하루는 비를 피하려다 까이가 명무와 함께 있는 것을 발견한다. 연영은 이런 현장을 목격했음에도 명무를 신고하지 않고 넘긴다.
얼마 후 시마가 출소를 하고, 까이는 아무렇지 않게 돌아온다.
<맆소녀>는 후반부로 갈수록 폭력의 구조와 인물의 세계가 함께 강화된다. 시마가 기도를 하는 장면이나 운명이라는 단어로 잔잔하게 흐르던 종교의 폭력은 후반부에서 확장된다. 돌아온 까이는 ‘브라만의 결혼식’이라는 혼인 의례를 준비하고 있었다. 8살이라는 나이에, 원하지 않는 사람과 하는 혼인이다. 그녀는 연영을 발견하고 도와달라고 하지만 엄마에게 붙잡혀 다시 끌려간다. 까이가 처한 상황은 가혹하고 암담하다.
이는 인도의 ‘카스트’라는 계급(신분제)과 윤회를 그린다. 카스트 제도의 가장 낮은 계급은 ‘수드라’지만, 그 아래 계급에조차 포함되지 못하는 ‘찬달라’가 있다. 그들이 놓인 신분제는 과거의 업이기 때문에, 담담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힌두교 교리는 요구한다. 까이가 혼인을 원치 않는다고 해도 자기 뜻대로 거역할 수 없다. 그렇기에 연영을 제외한 누구도 이 상황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 외부인 연영도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작품은 그 폭력에 참여하고 있는 인물의 개인적 서사를 병치시켰다.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 감시원의 역할을 하면서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줄도 아는 듯 보였던 디네쉬는 악을 품고 있는 인물이었다. “걔가 특별하다면 그 또한 그애의 운명이에요.”라며 까이가 수술 받기를 거부했던 시마는 수술에 동의하고 홀리 축제가 있던 날 디네쉬가 들어간 감옥에 불을 지른다. 친절하고 다정해 보이지만 까이를 적극적으로 돕지는 않으며 모든 것이 신의 뜻이니 견디는 수밖에 없다던 명무, 그는 모두 각자의 역할이 있다며 과거 집창촌에서 자라며 엄마가 일을 할 때 커튼 뒤에 숨어 있어야 했던 날의 상처를 고백한다. 연영은 까이가 명무와 있는 모습을 목격하고도 침묵을 택했고, 그 침묵의 이유를 내적·외적으로 갈등하며 과거 상처를 마주한다. 까이도 침묵하는 인물이었다. 자신의 일을 엄마에게조차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 까이가 연영에게는 자신의 이야기를, 도와달라는 말을 한다. <맆소녀>의 인물은 입체적이고 복잡하다. 자세히 보아야 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다. 관객이 인물을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게 만든다.
이야기는 시작부터 끝까지 탄탄하게 설계된 배경과 등장인물의 사연이 만나 긴장과 몰입을 가진 채 진행된다.
우리에게는 서로의 관심이 필요하다
<맆소녀>는 ‘운명’이라는 이유로 일어나는 폭력과 은폐의 현장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까이에게 일어나는 폭력과 은폐는 운명이라는 신적인 세계관에서 시작하여 종교적 특성, 폐쇄적인 마을, 책임의 한계 앞에서 견고해진다. 까이 주변 인물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 견고함에 참여한다.
연영은 까이의 상황을 지적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각자 정해진 운명이 있다면 거부하는 게 죄가 될까요?”라며 문제를 제기하고, 계속해서 시마를 설득하려 애쓴다. 연영은 까이의 주변 어른 중 유일하게 그녀의 상황을 직면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연극은 연영의 시선으로 까이가 겪는 문제를 조명한다. 한 아이를 둘러싼 다양한 형태의 폭력을 드러낸다. 연영과 같은 인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운다. 사회적 안전망의 구축은 자연스레 이루어지지 않는다. 폭력은 물론 방관과 방임에서 벗어난 관심은 확대되어야 한다.
몸이 기억하는, 그래서 그려지는 상처
이 연극은 각 인물이 겪은 상처가 몸의 움직임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우선 농인인 까이는 수어로 자신의 상황을 말하기도 하고, 혼인 전 연영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는 처절하게 매달린다.
연영의 상처는 방관으로 표현된다. 까이에게 가장 큰 관심을 가지는 연영도 까이의 일에 침묵하는 순간이 있었다. 어릴 적 가정 폭력을 당한 인물이다. 그때의 기억은 폭력의 현장에서 나아가지 못하고 주저하게 만든다.
명무의 상처는 방관과 두려움으로 나타난다. 명무는 엄마와 약속한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않았다가 가족이 해체되는 경험을 했다. 명무의 방관에는 종교적인 세계관만이 아니라 내면에 담긴 상처와 두려움까지 담겨 있다.
외에도 눈을 두게 되는 것이 아이들의 움직임이다. 아이들은 움직임은 여러 인물들 중 가장 자유롭고 방향성이 없다. 특히 그림자 아이들의 움직임은 무용을 하듯 허리를 휘기도 하고 무대 이곳저곳을 뛰기도 한다. 폭력에 참여하는 어른들과 다르지만, 같은 아이인 까이의 움직임과도 간극이 있다. 그토록 자유로워야 하지만 그들보다 억압과 한계를 가지는 까이와 차이를 주고자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른과 아이, 아이와 아이의 대비에 발생하는 차이가 인상적이었다.
<맆소녀>가 제시하는 세상
<맆소녀>는 아동 학대, 아동 성폭력, 수간 등 사회적 문제만이 아니라 쉽게 치유되지 못하는 상처까지 뼈 아프게 꼬집었다. 연영은 가정 폭력의 피해자였던 과거를 지우고자 폭력 현장을 방관한 가해자의 모습으로 과거를 기억한다. 그의 상처는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한 후까지 지속되어 아이를 지우고 남편을 미워하는 일로 이어진다. 그가 외면하고 왜곡한 기억은 까이를 통해 되살아난다. 뼈 속에 사무친 상처 때문에 까이의 상황에서 도망치기도 하지만, 연영은 다시 돌아와 까이를 보호하려 한다. 도망과 돌아오는 일 사이에는 ‘과거에 대한 대면’과 ‘용기’가 있다.
극의 마지막에서 연영은 공항으로 가기 전 차경과 전화를 한다. 지금까지 가해자로 외면했던 ‘피해자인 나’의 모습을 비로소 마주했음을 차경에게도 전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기찻길에서 까이와 연영이 재회하는 장면’은 아직도 마음 깊이 남는다. 팔을 크게 펼쳐 흔드는 두 사람의 인사는 고마움과 응원, 다시 만날지 만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뜨겁게 나누는 당찬 안녕이리라 생각한다. 서로가 도모할 미래 또한 안녕하기를 바라는.
<맆소녀>의 영어 제목은 'The silent one'
‘극단 생존자프로젝트’는 <박테리아 이분법>, <공기 없는 세계> 등을 통해 ‘생존’과 ‘존재하는 것들의 이야기’ 에 대해 고민하며 극으로 표현해 왔다. <맆소녀>는 올바른 돌봄 아래서 자라지 못하는 까이와 그녀를 통해 무뎌진 감각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상처를 마주하는 연영의 이야기를 120분의 작품에 담았다. 까이와 연영의 연대는 환경적, 상황적, 개인적 한계에 끊임없이 부딪히지만 그들은 끝내 상황을 타개한다. 그 타개는 결코 혼자 해낼 수 없으며, 포기하지 않고 손잡아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함을 되새긴다. 이렇듯 생존자프로젝트는 가정 폭력, 위계 폭력, 젠더 폭력 등을 무대에 올려 ‘우리 안의 폭력과 기억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를 고민’ 하며,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태도’를 찾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아동학대는 2021년 2월 ‘정인이법(아동학대범죄처벌 특례법 개정안)’이 통과하면서 처벌 수위가 강화되었다. 아동학대를 본격적으로 문제 삼기 시작한 것이 불과 5년이 되지 않는다. 걸리는 게 있다면 이러한 법 강화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아동 학대를 검색하면 아동 학대 피해자와 가해자 부모의 이야기를 너무도 쉽게 접하게 된다는 점이다. 얼마 전 인천에서 9개월 된 아이가 운다는 이유로 아이를 살해한 아버지가 구속되었다는 보도처럼 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침묵하고 있는 폭력이 우리 주변에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정당화되어 침묵하고 있는 폭력의 구조에 어떻게 맞설 수 있을까.
연극은 우리에게 그 질문을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