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부터 고백을 하자면 나는 이 책을 온전히 품지 못했다. 꼭꼭 씹어 읽어 보려 했으나 겨우 더듬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독서를 하며 이렇게 에너지를 많이 쏟았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다. 흡사 존재도 몰랐던 미지의 땅에 발을 디디게 된 기분이랄까. 낯설어서 잠시 멍했을 뿐, 과정은 유의미했다.
나의 평소 독서 패턴은 산산조각이 났다. 읽으면 읽을수록 예상을 뛰어넘었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책의 방향성에 일단 내가 가진 안테나를 전부 세워서 읽기 바빴으니까. 어떤 이미지를 정확하게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다양한 장르가 복합적으로 엮여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영혼 없는 작가>로 다와다 요코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한 나는 책장을 넘기며 직감했다. 이번 독서는 어쩌면 탐험에 더 가깝겠구나 싶은. 그 탐험에서 제일 좋았던 두 가지는 1.자신의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언어라는 세계를 자유롭게 유영하고 있는 작가를 통해 고정된 것으로부터 해방됐을 때 느낄 수 있는 확장감을 맛봤다는 것 2.시작 부분에서부터 느껴졌던 여행을 바라보는 작가의 당당한 사유가 아찔할 만큼 솔직하고 당당해 보였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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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행을 떠나기 전에 늘 여행기를 썼다. 여행하는 동안 거기에서 인용을 하려고 말이다. 여행자로서 할 말이 없는 경우가 자주 있었기 때문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여행기를 써두는 게 이번에는 특별히 유용했다. 그러지 않으면 시베리아에 대해 아무것도 할 이야기가 없을 테니까. 물론 일기를 인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나는 이 일기를 여행이 끝난 뒤에 지어냈다. 여행 중에 아무것도 쓰지 않았던 것이다.
“여행자로서 할 말이 없는 편이다”, “여행 중에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로 시작된 말은 책 제목의 본질인 ‘영혼이 없다’라는 상태에 대한 정의를 향해 나아간다. 물론 그걸 지켜보는 여정은 쉽지 않았다. 여전히 벽처럼 느껴지는 부분도 있지만 ‘영혼 없는 작가’에 대해 들었던 직선적인 궁금증을 보다 입체적인 해석으로 마무리할 수 있음에 뿌듯함을 느끼고 있다.
다시 돌아온 2025 <영혼 없는 작가>
‘다와다 요코’라는 작가의 이름을 문학사에 알린 대표작 <영혼 없는 작가>가 2025년 다시 한번 우리 곁에 돌아왔다. 이번 <영혼 없는 작가>는 2011년 독문학자 최윤영 교수의 기획 및 번역으로 우리나라에서 처음 출간되어 그후로 절판 상태로 있던 초판본의 개역 증보판이다. 2025년 개역 증보판은 초판본(14편)에 실리지 않았던 9편이 추가됐다. 책은 ‘유럽이 시작하는 곳’, ‘부적’, ‘해외의 혀들 그리고 번역’ 이렇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독자들이 재출간을 열렬히 요청했다고 한다. 독일어와 일본어 두 언어의 경계를 넘나들며 몸으로 체득한 작가 고유의 언어적 사유가 책에 짙게 담겨 있는데 이는 독자에게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제공하고 있다.
다와다 요코의 언어적 사유
다와다 요코는 모국어인 일본어와 외국어인 독일어로 글을 쓰는 이중 언어 작가이다. 그의 글이 힘을 갖는 이유는 단순히 양쪽을 아우를 수 있다는 언어적 능숙함에서 오는 것은 아닐 거다. 모어, 그러니까 자라나면서 배운 말에 이미 편하게 익숙해져 있는 상태에서 새로운 관점으로 자꾸만 주변을 바라보다 끝내 모국어라는 울타리를 넘는 그만의 문학적 실험이 독자들에게 좋은 영감을 안겨 준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시선은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계속해서 이동하는 느낌이다. 일기인 듯 여행기인 듯 상상인 듯 자유분방한 그의 사유를 따라 함께 움직이는 것만 같다. 어딘가 오묘하고 자유롭고 투명한 구석이 있다. 그 여정에서 다시 태어난 언어들을 기록한 것이 바로 이번 책이 아닐지 짐작해 본다.
장르의 경계를 벗어난 문학적 실험
작가가 언어를 감각하는 방식 그중에서도 사물에 대한 사유 방식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특히 [연필/Es/스테이플러 심 제거기]에 관한 시선이 흥미로웠다. 모국어로 부르던 사물을 독일어로 불렀을 때 마치 새로운 사물을 마주한 기분이었다는 작가의 경험은 언어가 이렇게도 쓰여질 수 있다는 점에서 신선한 충격이었다. 또 영어의 It에 해당하는 Es(그것)를 놓고 평소 없다고 여겼던 존재가 되려 성실하게 언어 세계에서 빈틈을 채워주고 있었다며 생명을 부여한 그 작업도 감탄스러웠다.
부적-엄마말에서 말엄마 中
[연필]
“엔피쓰”에서 “블라이슈피프트”로 부를 때 완전히 새로운 물건을 다룬다는 느낌이 들었다.
[Es]
아무런 의미 없는 “es”는 모든 영역에서 언제나 도움을 주며
문법상의 빈 공간에서 겸손하게 살고 있다.
[스테이플러 심 제거기]
외국어를 쓸 때는 스테이플러 심 제거기 같은 것을 갖게 된다.
이 제거기는 서로 바짝 붙어 있는 것을 모두 떼어 놓는다.
언어와 사물이 관계에 대해 깊이 골몰하는 그는 마치 이 작업을 하나의 유희처럼 자연스럽게 즐기는 듯했다. 언어적 장르의 경계가 끊임없이 허물어지는 동시에 새로운 모양의 언어를 만들어 내는 그 과정이 흡사 하나의 문학적 실험처럼 보였다.
작가의 언어와 사물의 관계에 대한 깊은 통찰이 내겐 상상의 영역과도 같았다. 나와 사물의 관계에 대해 단 한 번도 의심한 적 없던 터라 방에 널려 있는 물건들이 새 이름과 새 생명을 갖게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지도 못했다. 그저 소통을 위한 존재로만 여긴 것이 언어였는데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여는 ‘Key’로도 작용한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나마 이렇게 경험해본다. 아마 이것은 익숙한 것으로부터 처음으로 떨어졌을 때 느낄 수 있는 일종의 해방감과도 같을 것이다.
‘영혼 없음’의 재정의
<영혼 없는 작가>에서는 ‘그곳에 있지 아니함’을 뜻하는 ‘부재(不在)’라는 키워드가 계속해서 등장한다. 이는 영혼의 유무(有無)가 아닌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어디로든 ‘흐를 수 있는(流)’ 자유로운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긴 여정에 대한 이야기는 비로소 영혼이 없는 상태에서 만들어진다”는 책 속의 말처럼 작가는 영혼의 부재함이 최종적으로 어떻게 우리 인간과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지를 설명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아이의 영혼이 사라진 자리를 나무 인형으로 대신하는 인형 이야기도, 말보다 듣는 게 더 우선이라는 귀에 대한 중요성도 다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다. 오히려 영혼이 없는 동안에 새로운 이야기가 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더욱 커져 간다.
비워진 상태에서 귀 기울이고 온 감각을 동원하여 ‘인간-우리 인간과 언어와의 관계- 그 경계를 넘어선 더 큰 문화와 세상’에 대해 흘러가듯 사유하다보면 뜻하지 않게 영감을 얻게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 자신에 대한 새로운 정의마저 가능할지 모르겠다.
아직 만나지 못한 이야기를 어느 날 발견하게 될 수도 있고, 그것이 또 창작의 원동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유유히 흐르다 어디까지 갈지는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