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세상에 실패한 사랑은 없다. 만약 당신이 사랑에 실패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애초에 사랑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랑은 그 자체로 성공적인 것이기에 본질적으로 실패와 어울릴 수 없다. 다만 세상에 실패한 꿈은 있다. 꿈은 목표를 이상적으로 표현한 수단에 불과하므로, 성공과 실패가 극명히 나타난다. 그렇기에 세상엔 성공한 꿈도 있는 것이다.


<라라랜드>는 미아(엠마 스톤)와 세바스찬(줄여 셉, 라이언 고슬링)의 꿈과 사랑을 이야기한 영화이다. 단순한 관람에 빗대자면, 두 사람의 성공한 꿈과 실패한 사랑 혹은 꿈을 실현하기 위해 포기한 사랑으로 받아들여진다. 과연 그럴까? 물론 아니다. 영화를 그렇게 느끼는 이유는 실제로 그렇게 비치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일용직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틈틈이 꿈을 좇던 두 사람이, 서로를 만나 기적처럼 꿈에 도약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이별을 맞이하기에 꿈을 위한 대가로 사랑이 희생되었다고 의식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세상에 실패한 사랑은 없다. 사랑과 꿈이 상호작용을 하는 것은 자명하지만, 둘을 이분법적인 인과관계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렇기에 <라라랜드>는 미아와 셉이 어떻게 사랑하였는가보다 그들의 꿈이 어떻게 실현되었는지가 중요하다.


미아는 그렉(핀 위트록)과 한 달가량 교제 중이었다. 그녀가 그를 떠난 이유는 당연히 셉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렉과 셉은 무엇이 다른가? 무엇이 그녀의 선택을 변하게 하였는가? 이는 자존감과 관련된다. 그렉과의 연애에서 미아는 주체지만 객체인 그로 인해 자존감이 한없이 낮아진다. 반면, 셉과의 연애에서는 주체인 그가 객체인 자신의 자존감을 높여준다. 셉은 그렉과 달리, 자신을 비롯한 자신의 꿈마저 응원해 주기 때문이다. 다만 주목할 점은, 그녀에게 있어서 셉과의 연애는 행복하지만 동시에 그녀가 그에게 필연적으로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내포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셉에게 있어서 미아는 주체이고 자신은 객체가 된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식당에서 셉에게 말을 건넨 사람도 미아이고, 이후 봄의 한 파티에서 그에게 음악을 신청한 사람도 그녀이다. 그에게 그녀는 자신의 음악을 들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없으면 그는 다시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다시 말해, 두 사람은 상대방으로서는 주체이지만 정작 자신의 삶에서는 객체의 역할을 맡는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통해 각자 변곡점을 맞게 되는데,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의 접점이다.

 

 

common2.jpg


 

이 사랑의 테마곡은 재즈이다. 셉과 미아가 처음 재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때, 셉은 온갖 장황설 끝에 재즈를 치열한 대결이라고 요약한다. 그는 재즈를 언어가 다른 사람끼리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이라고 말한다. 사랑 또한 마찬가지 아닌가. 저마다 정의하는 감정의 언어는 다르지만, 서로 소통하여 사랑에 도약하는 것이.


셉은 재즈를 사랑한다. 그리고 미아를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감정이 혼합되면서 그 방향은 한 곳으로 흐르게 되고, 자연스레 그는 재즈를 미아로 치환하게 된다(혹은 착각하게 된다). 재즈클럽을 열어 재즈를 지키겠다는 다짐은 미아와의 사랑을 지키겠다는 새로운 다짐으로 변하게 된다. 이로써 그는 사랑을 책임지기 위해, 미아와 그녀의 어머니에게 잘 보이기 위해, 키이스(존 레전드)의 밴드 ‘메신저스’의 키보드 연주자로서 활동하기 시작한다. 사랑을 위해 기꺼이 재즈(순수예술)를 포기하고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과 다른, 대중이 좋아하는 음악(상업예술)을 하는 것이다.


반면 미아는 재즈가 단순히 배경음악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녀에게 연극(순수예술)은 이모와의 추억이자 꿈의 발현지로만 부여해 놓을 뿐, 정작 그와 관련된 활동은 하지 않았다. 그녀에겐 TV드라마 오디션(대중예술)만이 등용문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셉을 만나면서 그동안 잊고 살았던 이모와 이모의 꿈, 그리고 자신의 과거를 반추하게 된다. 배경음악이었던 재즈(순수예술)는 자신의 삶 중심부에 자리 잡게 된 그녀는, 일인극을 준비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할리우드 스타로 사는 삶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정리하자면, 과거를 좇던 셉은 사랑을 위해 미래로 가고, 미래를 좇던 미아는 사랑에 의해 과거로 간다.


연극 준비로 힘든 미아와 밴드 투어 공연으로 바쁜 셉의 관계는 점진적으로 소원해진다. 셉은 미아를 위해 서프라이즈를 준비하지만, 그날마저도 갈등을 빚고 만다. 미아는 셉이 못마땅하다. 그가 꿈을 저버리고 돈벌이 수단으로 장기적인 투어를 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가 불만스럽다. 자기 행동은 온전히 그녀를 위한 행동인데 그것을 몰라주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갈등은 곧 셉의 내적 갈등으로 변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과 대중이 좋아하는 음악. 자신의 꿈과 사랑의 꿈. 저울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기 마련이고, 셉은 서서히 객체에서 주체로 변한다.


미아에게도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 기폭제는 일인극이 끝나면서부터이다. 관객은 적고 그마저도 그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을뿐더러, 설상가상으로 셉은 극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회의를 느낀 그녀는 꿈과 사랑 모두 등져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암묵적인 이별을 맞이하던 중, 셉은 미아의 오디션 소식을 대신 전해 들어 그녀를 찾아 나선다. 그는 갈피를 잡지 못하는 그녀를 북돋우며 재기를 돕는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은 꿈을 위한 존재로서 상호작용을 한 것이다. 그리고 사랑한 것이다. 혹자는 미아가 셉을 이용하고 떠났다며 비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자본주의적인 속된 판단에 불과하다. 후반부에 이르러 그들은 말한다. “우리 어디쯤 있는 거지?” 돌고 돌아 답한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가보자.” 생각해 보자. 그 흐름은 누가 바꾸었을까.

 

 

common.jpg


 

결국 두 사람의 사랑은 다른 교훈을 갖는다. 과거를 지향하던 셉은 사랑으로 미래에 갔으나 그 사랑이 끝남으로써 과거로 돌아온다. 미래로 나아가던 미아는 사랑을 통해 과거로 갔지만, 그 사랑이 끝남과 동시에 과거는 미래를 위한 발판이 된다. 셉에게 사랑은 나침반이었고, 미아에게 사랑은 받침판이었다.


<라라랜드>의 피날레는 아름다운 마법의 향연이다. 5년이 지나 미아는 무비스타가 되었고, 셉은 재즈클럽을 운영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재회한다. 미아와 셉이 함께 만든 셉스(Seb's)에서. 그들은 그들의 사랑을 가정한 후, 서로를 멀찍이서 응시한다. 셉의 눈빛과 미아의 눈동자가 만든 눈망울의 조화는 가히 탁월하다.


이별은 사랑의 연장선이 아니다. 그 자체로 사랑이다. 그렇기에 지나간 사랑을 가정한다는 것 또한 그 역사의 일부이다.

 

[부기]

스물의 마지막 날, 세 번이나 보았던 <라라랜드>를 다시금 꺼냈고, 이듬해 초 그에 관한 글을 한 편 썼다. 그 이후로 찾은 적이 없었다. 그러다 며칠 전, 영화가 슬며시 떠올랐고, 감상을 이 글로 갈음했다. 물론 당시 분출했던 비루한 시각에 지금의 나는 대부분 동의를 얹을 수 없겠다. 그럼에도 혹자는 이 글에 공감하리라는 허황한 믿음과 어느 시절의 아카이브에 새기겠다는 심보로 이번 지면을 할애했다. 원문이 원체 형편없는 걸 알면서도, 맞춤법을 제외한 어느 구석도 고치지 않은 건 그런 마음의 일부가 아닐까.

 

 

김동연이 에디터의 다른 글 보기
일상의 음악, 이상의 책, 세상의 영화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