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은 기대한 대로 눈과 귀를 즐겁게 했다. 도대체 사람 손으로 그릴 수 있는 건가 싶은 액션신과 분위기에 안성맞춤인 음악의 조합은 신 들린 수준이었다.
내게 이것만큼 와닿는 부분은 스토리였다. 영화 속에서 상현 2 도우마는 이런 말을 한다.
“죽으면 무(無)가 될 뿐이다.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는 이 말을 정면에서 반박하고 있다는 것이다.
도우마는 인간이던 시절, 사이비 교주인 부모 밑에서 태어나 신의 대리인 행세를 했다. 사람들은 어린이에 불과한 도우마에게 찾아와 자신의 사연을 통곡했다. 그는 죽음 뒤에 아무것도 없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들에게 측은지심까지 느꼈고, 그들을 구원하고자 혈기가 돼 잡아 먹는다. 도우마에게는 그들의 피를 먹는 것이 진심으로 그들을 위한 행위다.
도우마를 몇 개의 단어로 말하자면 ‘허무주의’, ‘구원자적 가치관’, ‘우월주의’라 할 수 있다. ‘허무’, ‘구원’, ‘우월’. 어딘가 죽음과도 닮은 구석이 있다. 보통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허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신’과 같은 초월적 존재가 천국으로 자신을 인도하는 ‘구원’을 바란다.
하지만 ‘귀멸의 칼날’은 이러한 개념의 총합을 상현 혈귀라는 잔혹하고도 끔찍한 악역으로 묘사한다. 이는 죽음 뒤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죽음 뒤에는 무엇이든 존재할 것이며 그것을 두려워 하지 말고 현재를 살아라는 말이다. 즉 작가는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중요하게 여긴다.
고토게 코요하루 작가의 이러한 가치관은 이번 영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코쵸우 시노부는 먼저 죽은 언니의 말에 용기를 얻고 아가츠마 젠이츠는 죽은 스승의 말을 통해 죄책감에서 벗어나 구원 받는다. 그뿐 아니라 이들의 살아가고자(상황을 타개하고자) 하는 의지는 다른 이들에게 이어져 새로운 가능성을 만든다.
아카자의 스토리도 마찬가지다.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잃은 아카자는 혈귀가 되도 상관없다는 말과 함께 키부츠지 무잔에 의해 혈귀로 살아간다. 이후 아카자는 카마도 탄지로와 토미오카 기유에게 패하며 자신의 의지대로 죽음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무잔의 방해와 더불어 혈귀로서의 정체성이 아직 사그라들지 않은 탓에 소멸은 자꾸 중단된다. 그러던 중 자신의 약혼녀 코유키가 나타나 "어서와요, 여보"라는 말로 아카자를 구원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점은 작가는 구원을 바라는 것 자체를 나쁘게 바라보지 않는다. 코유키 같은 사랑했던 존재가 구원자 행세를 할 수도 있다. 대신 그는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과 우월한 이를 바라는 것은 달갑개 보지 않는 듯 하다.
무잔이 어떻게 혈귀들의 두목이 됐는지를 생각해 보면 그렇다. 그는 죽을 위기에 처한 자신을 치유해준 의사를 무참히 살해한다. 태양 앞에 설 수 없다는 사실은 물론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고한 이를 죽인 사실은 용납될 수 없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이겨내려 하지 않고 끝까지 남을 탓하는 모습은 주어진 현실을 부정하고 죽음 이후에도 남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모습과 닮았다. 이처럼 혈귀의 시초인 무잔과 다른 인간들의 차이는 인간성의 ‘기본’에서 시작한다.
영화는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적어도 악에 지배 당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무한한 힘을 탐한 혈귀들은 조만간 지옥이라는 무한함의 굴레에 빠져나오지 못하게 될 것이다. 유한한 삶을 겸허히 받아들인 채 무한한 공간을 빠져나오려는 그들이 멋져 보이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