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4일의 굳이데이
ⓒ 유진
"이대로 밤을 지새워도 좋겠다."
그 생각을 했던 게 아마 인터미션이 끝나고,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소나타 D장조 2악장 중반부였던 것 같다. 이때는 1부에서 꼬박꼬박 잘 챙겨 보던 이정표도 아차차— 잃어버린 참이었다. 몇 악장인지는 머릿속 추측에 맡기고, 어떤 특징이 있는지도 모른 채 멍— 하니 사방의 고요함 사이에서 쨍— 한 바이올린 한 대의 생동감을 마주하고 있자니, 자연스레 그 말을 남몰래 중얼거렸던 것 같다.
어떤 클래식 공연을 가도 모든 게 이미 아는 곡이면 좋겠지만, 이 세상과 친해진 지도 아직 한두 살이 되지 못해 매번 손을 배꼽 위로 모으고 "안녕하세요—" "잘 부탁합니다—" 해야 하는 겸손한 어린이인 나날이다. 그러니 아-무 생각 없이 멍— 하니 바라보는 것이다.
무얼 봤더라. 현 위에 있던 연주자의 손가락, 적갈색의 바이올린, 곡에 빠져든 눈빛, 옷자락에 떨어진 빛 몇 가지, 시렵고도 온화했던 객석 분위기, 넓은 무대를 채운 바이올린 소리. 아— 그날은 참 좋아하는 게 많이도 있었다.
어쩌다 이 공연을 보기로 했더라? 이유는 간단하다. 나에게 ‘굳이’ 선물을 주고 싶었다. 스스로 선사한 굳이데이겠다. 그게 무슨 DAY인가? ‘번거롭더라도 낭만적인 일을 찾아서 하는 날’이다.
공연도 자주 보는데 무슨 굳이 사족을 붙여 추가 관람을 자처하나 싶겠지만, ‘무반주 바이올린’과 ‘이자이’는 내게 매력적인 키워드였다. 외젠 이자이란 작곡가는 2024년에 있었던 임동민 바이올리니스트의 이자이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 연주를 통해 처음 알게 된 작곡가였다.
마냥— 어떤 곡인지도 모르고 음원 사이트에 들어가 “어, 곡 수가 여러 개네? 각 곡별로 시간도 짧다!” 하고 첫 곡을 재생했는데, ‘띠용’ 했다. 이게 뭐지? 내가 뭘 들어야 하는 거지—? 한참을 헤맸다.
클래식 전공자나 애호가는 이런 특이한 단막극을 이해할 수 있겠지만, 직관적으로 귀로 곧장 달려드는 걸 좋아하는 청취자에게는 정말 난해하기 짝이 없는 난곡이었다. 얼마나 오래 당황했던가. 아직도 길을 걸으며 혼란스러워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렇다고 예습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조금이라도 이 곡과 내가 ‘친구’가 되어 있으면, 공연 당일 실제 연주로 마주쳤을 때 그 ‘공명 지수’가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네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이런 이야기를 가지고 있구나.’ ‘이런 모습이구나.’를 곧바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게 친해졌고, 이렇게 인사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된 게 그때였다. 지금도 이 전곡이 6개인 건 알지만, 몇 번의 악장이 몇 개인지, 제목은 무슨 뜻인지까지는 모르지만 딱— 들으면 안다. “아— 이거 이자이 무반주 소나타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막 반가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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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박규민 바이올리니스트가 이자이 무반주 소나타 2번을 연주한다는 소식을 우연히 접하자마자 내 손가락은 이미— 예매 버튼을 향했다. 정말 궁금했다.
게다가 요 근래 더 친해져야겠다고 생각한 바흐가 있었고, 7월 내내 즐겁게 인사한 프로코피예프, 이자이 다음으로 내게 시련을 줬던 바르톡도 있었다. 어찌 발 들이지 않을 수 있을까.
더구나 금호아트홀에서의 공연이었다. 이곳에서 아레테 콰르텟의 현악 4중주를 주로 감상했는데, 같은 공간에서 바이올린 한 대가 어디까지 울려 퍼질지 궁금했다.
예매 버튼을 누르고 좌석 선택란에 들어가 보니, 중간 블록 1열에 한 좌석이 딱— 비어 있었다. 늘 중간이나 뒤쪽에 앉아 관람했는데, 이번에는 조금 더 가까이 소리와 맞부딪치고 싶었다. 그냥— 키도 작은데 단차 걱정 없이 마음 편히 연주를 감상하고 싶기도 했다.
2. 무반주 그리고 바이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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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금호아트홀을 방문해 본 적 있으신가? 금호아트홀 연세는 연세대학교 안에 있는 300석 규모의 실내악 전용 공연장이다. 현악 사중주나 피아노 독주 같은 작은 편성에 맞춰 설계되어 있으며, 무대와 객석의 거리가 가까워 연주자의 표정과 움직임까지 세밀하게 느낄 수 있다.
이곳에서는 목요일 저녁 7시 30분에 열리는 클래식 음악 시리즈 〈아름다운 목요일〉이 있다. 실내악, 리사이틀, 피아노 독주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며 수준 높은 무대를 꾸준히 선보인다.
8월 14일에는 바이올리니스트 박규민이 무반주 바이올린 레퍼토리로 무대를 채웠다. 공연 전 유튜브에 올라온 인터뷰 영상에서 그날의 4곡을 선정한 이유를 간단히 살펴볼 수 있었다.
박규민 연주자는 무반주 곡들은 자극적이지 않고 오히려 순수하고 솔직하게 끌어내야 하는 부분이 많다며, 스스로를 더 들여다보고 가꾸는 시간이 된다고 전했다.
1부 프로그램은 무반주 레퍼토리의 출발점인 바흐 파르티타 3번으로 시작해, 이를 오마주한 이자이 소나타 2번으로 이어졌다. 2부에서는 프로코피예프 소나타 D장조가 무겁게 흐르던 분위기를 환기하는 곡으로 배치되었고, 마지막에는 바르톡 소나타가 놓였다. 이 곡은 독일 유학 시절 처음 배워 고통스럽고 외로웠던 기억이 깃든 작품이라고 그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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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톡을 두고 박규민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덧붙였다.
“이 곡은 저한테 외로운 곡이다.
무반주 연주라는 게 결국 외로운 싸움이다.”
바르톡은 이중주든 무반주든, 연주자와 관객을 외롭게 만드는 ‘귀찮은’ 작곡가임이 분명하다. 어쩜— 이런 음표를 오선지에 이렇게 배치할 수 있었을까. 그럼에도 연주자들이 그의 곡을 택하는 것을 보면 분명 끌릴 수밖에 없는 매력 포인트가 있는 것 같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잡념을 지우고 싶을 때, 혹은 문득 나도 모르게 그의 곡을 찾곤 하지 않던가. 원래— 너무 친절해도 재미없는 법이다.
외로움이란 게 참 신기하다. 나를 그렇게— 괴롭히는 우울한 감정이지만, 그게 과거가 되면 이상하게 현재의 나를 아련하게 만들고 곱씹게 한다. 마냥 신나던 일은 어제만 있었던 것 같은데, 우중충한 그 마음이 뒤편에 서면 유독 눈에 걸린다.
아무도 밟지 않은 흰 눈밭에 자국난 내 발자국을 되돌아보는 일 같다. 그러니 궁금했다. 박규민 바이올리니스트는 어떻게 뽀득— 뽀득— 지나온 길을 되짚어 갈까.
3. 7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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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된 시간보다 5분 이르게 자리에 앉아 황급히 복사해 온 키워드를 무릎 위에 얹었다. 옆자리 분이 ‘이게 뭘까?’ 하는 시선으로 슬쩍 훑어보는 게 느껴졌지만, 다행히 곧 시간이 되어 객석이 어두워지자 내 컨닝 페이퍼를 숨길 수 있었다. (호호)
이날은 무대 바로 앞, 연주자를 코앞에서 마주하는 자리에 앉았다. 시야가 확 트여 좋았지만, 이토록 가까워도 되나 싶은 마음도 들었다. 클래식 공연이야말로 관객에게 가장 좋은 자리를 기꺼이 내어주는 장르다.
무대에 조명이 부드럽게 들이치고, 연주자가 등장할 문 위의 비상구 표시등이 반짝— 눈에 띌 때쯤 박수 소리와 함께 흰 운동화를 신은 솔리스트가 무대 위로 가뿐히 나타났다. 세미 정장에 운동화는 익숙한 조합이지만, 이런 무대에서 보니 신선했다.
걸음이나 표정도 ‘오늘의 공연을 내가 장악하겠다’라기보다 “와주셔서 감사하고, 제 연주를 이제 보여드리겠습니다” 하는 담담한 미소였다. 어떤 소리를 내시려나. 마음이 편안해진 그 틈에 박규민 바이올리니스트가 활을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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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보건대, 청자의 입장에서는 바흐부터 바르톡까지 곡마다 준 느낌이 조금씩 달랐을 뿐— 정확히 무엇을 들었는지, 이렇게 기억이 안 날 수가 있을까 싶다.
구체적 키워드들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판단이 끼어들 틈이 없을 만큼 ‘소리’의 압도적 질감과 파장력 속에서, 바흐도 이자이도 프로코피예프도 바르톡도 결국 박규민의 ‘소리’라는 영역 안에서 산책된 느낌이었다.
바이올린이 얇고 길게만 파동치는 악기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넓은 면적으로 중간 지대에서 둥둥— 유영하며 귓전에 박혀 오는 소리를 낼 수 있는 악기였구나. 그걸 긴 시간 판단하느라 분주했다.
바흐의 첫 음을 듣자마자 깜짝 놀랐다. 소리가 진득하고 진하고 짙은데, 산뜻하게 공기와 공명한다. 뭐지? 선명도가 높은 두꺼운 나무 기둥이 눈앞에 턱— 하고 놓인 듯했다.
그동안 어떤 소리들을 마주해 왔던가. 누구는 솜털처럼 흩날리고, 누구는 그대로 밀고 나가는 유성 매직 같다. 또 다른 이는 칼날을 갈고 바늘을 세우며,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러운 흐름을 가져오기도 한다. 그렇다면 박규민의 소리는 무엇인가.
부드럽게 그어내는, 뭉툭하고 짙은 유성 매직 열 개였다. (정말 열 개) 수성펜으로는 이 두께감이 묘사되지 않는다.
귀에 닿는 소리의 면적이 이만큼 넓은 이가 있었던가. 얇고 세밀한 예민함보다 넓고 길게, 쭉— 자유롭게 능수능란하게 나무 악기를 다뤄낸다.
자세는 어떠했는가. 거의 미동도 없이 기둥처럼 서서 그냥 툭— 툭— 소리를 내디딘다. 그 소리 안에 놓이자마자 서울시향 바이올린 아우구스틴 하델리히 마스터 클래스에서 떠올렸던 문장들이 번뜩였다.
“바이올린은 몸의 힘을
빼야 하는 악기인가?”
사람의 목소리보다 악기의 소음을 담아내는 공간의 공기는 유난히 날이 서 있고, 환하며, 예민하다. 특히 클래식 전문 공연장에는 특유의 톤다운이 있다. 소리를 최우선으로 하겠다는 목적성이 온몸으로 체감된다. 그러니 옷깃 하나, 가방의 뒤척임까지 사방으로 퍼진다.
그런 예민한 공간에서, 협연자라면 맨 앞에, 무반주라면 가장 중앙에 서서 두터운 침묵 아래에서 소리를 탄생시켜야 한다. 생각만 해도 벅차다. 그 앞에 선다는 것 자체가 이미 머리가 삐죽 솟는 일인데, 내 안의 것을 전부 내보여야 한다.
승모근은 치솟고, 어깨는 굽고, 표정은 굳고, 몸짓은 어색해진다. 그런 상태에서 바이올린을 어깨 위에 올리면 어떻게 될까. 20에 있어야 할 마음이 150까지 치솟아 소리마저 조급해지고 치닫을 것이다. 표현하려는 마음이 어깨 위에 가득 얹혀, 힘이 잔뜩 들어간 게 보이고, 긴장감이 번진다.
그런데 그는 힘이 없다. 소리는 두터운 매직펜처럼 강한 톤인데도, 힘은 툭— 내려앉아 있다. 숨도 고르다. 가벼운 몸짓의 소리선이 왼쪽 아래에서 시작해 쉭— 곡선을 그린다. 양팔도, 다리도, 어깨도, 표정도 툭툭— 풀려 있다. 거기서부터가 ‘시작’이다.
2025년 6월 20일
그때 혼자 품었던 생각의 원형이, 여기 이 사람에게 툭— 놓여 있었다. 두 어깨가 툭— 내려앉아 있고, 현을 짚는 손가락은 그냥 톡—톡— 현 위를 도닥인다. 그런데 소리가 금호아트홀의 네 벽을 다 맞받아친다.
홀로 서 있는 게 맞나 싶을 정도의 성량인데도 편안하다. 이렇게 강한 톤을 가졌는데 무심해 보이는 사람은 처음 봤다.
표정은 또 어땠는가. 눈을 감고 몰입할 때도 있었지만, 때로는 어딘가를 응시하는 눈빛이 스쳤다. 정확히 자신이 내뱉는 소리를 ‘응시’하는 얼굴이었다. 그는 내내 그렇게 듣고 있었다.
이 곡이 원래 이렇게 쉽게 연주될 수 있나 싶을 만큼 담담하게 그어내니, 나도 모르게 ‘뭐지—’ 하며 프렐류드의 물줄기를 그대로 쏟아 맞았다. 이게 폭포지 뭐람. 이 두껍고 입체적이며 넓은 소리의 심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한동안 당황했다.
잠깐의 정적으로 다음 악장이 다가옴을 알았고, 고개를 내려 ‘우아하게 걷는 춤’이라는 제목을 확인했지만— 여전히 귀로 담느라 바빴다. 판단할 게 없었다. 바쁘게 음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람들이 클래식에서 무엇을 즐기느냐 묻는다면, 이럴 땐 소리가 어떤 미형으로 눈앞에 드리우는지를 지켜보는 순간의 즐거움이 있다고 답하고 싶다. 한 활이 그어지고 손가락의 운지에 따라, 순간마다 다른 모양새로 햇빛을 등진 구름들처럼 펼쳐진다.
우아한 춤, 익숙한 멜로디의 반복, 미뉴에트… 여러 장면이 있었던 것 같은데—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개운하고 짱짱한 바이올린이 내 앞에서 긴 숨으로 노래했다는 기억만 선명하다.
아니, 땀방울이 그렇게 떨어지는 연주자는 처음 봤다. 연주장은 사람도 많고, 연주자는 조명을 정면으로 받으니 더워지기 쉽다. 그래서 땀이 이마를 타고 눈물길처럼 눈 아래로 툭— 떨어지는 장면을 자주 보곤 했다.
그런데 박규민 연주자는 덥지 않으신가 싶을 만큼 담담했는데, 알고 보니 얼굴 옆선에서 떨어진 땀이 정장 앞자락에 닿아 스며들지 않고 오히려 빛을 받아 반짝였다. 뭐지? 저 옷 뭐지? 여성 연주자의 액세서리에서 빛을 본 적은 있어도 이런 장면은 처음이라 신기했다.
이자이도 이렇게 가뿐할 수가 있을까. 소리가 쨍쨍— 한데, 바흐보다 훨씬 넓고 깊은 영역에서 놀기 시작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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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각 곡에 들어가기 전, 잠시 그 ‘순간’에 머물며 곡을 어깨 위에 태워 올릴 준비를 하던 장면이 선명하다. 마치 연기자가 극에 들어가기 직전의 예열을 목격한 기분이었다.
사실 연주도 각 악장마다 표현을 달리해야 하지 않은가. 순식간에 타올랐다가도 부드럽게 느슨해지라는 작곡가의 지시 안에서 자유롭게 노닐어야 한다. 그 준비의 모습을 마주할 수 있어 좋았다.
연주할 때 소리를 응집시키는 모습도 또렷하다. 서두르지 않되 속도감은 갖고, 진득하게 음표의 길을 지나 관객에게 프로코피예프의 길목을 거닐게 한다.
세 번째 곡의 2악장에 이르렀을 때, 아— 정말 좋았다. 객석은 고요했다. 들리지도 않던 에어컨 바람 소리가 괜히 솨아— 하고 느껴질 만큼,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나무 하나가 조금 느린 춤을 춘다.
문득 공연장 밖의 하늘이 떠올랐다. 2부가 끝났으니 까만 밤이 차지한 시점 아닐까. 짙고 넓은 은하수를 보고 있자니 자꾸만 그 너머의 풍경이 아른거렸다. 그즈음엔 한없이 행복했다.
바르톡은 어땠더라. 낯선 작곡가라 했던가. 여기선 바르톡이고 뭐고, 그가 얼마나 외로운 싸움을 했는지조차 헤아릴 겨를이 없었다. 다만— 아, 이 사람, 저 바이올린과 정말 ‘친구’구나. 이만큼 사이가 좋구나. 지켜보느라 바빴다.
연주자와 악기가 그렇게 합이 좋을 수가 없다. 혼연일체라 할 만큼 톤이 잘 맞는다. 하관이 닮은 연인이 부부가 되듯, 강아지가 주인을 닮듯, 박규민과 몬타냐나는 그냥 가족 같았다.
아— 아직 더 듣고 있었는데, 바이올리니스트가 바르톡 4악장 끝자락에서 활을 들어 올렸다. 이 곡을 이미 아는 청중들의 높은 호응과 박수 소리에 오늘의 공연이 끝났음을 눈치챘다. 벌써 끝이라고? 짝짝— 박수하며 오늘의 연주자를 카메라에 담았다. 이렇게 멋진 연주자를 또 한 번 ‘소개’받았는데(셀프로) 어찌 기록하지 않을 수 있을까.
ⓒ 유진
하지만 마냥 아쉬워할 필요는 없었다. 몇 차례 박수 후 물을 홀짝 마시고, 연주자가 다시 앙코르를 위해 무대 중앙에 섰기 때문이다.
“조금 길 수도 있어요.”라며 흥을 돋우자 객석은 환해졌다. 14일의 앙코르는 바흐 파르티타 2번의 샤콘느였다. 사실 바흐의 샤콘느고 뭐고, 그때도 박규민의 바이올린 ‘음색’을 듣느라 바빴다.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바이올린의 단 하나의 목소리였다.
올여름 이중주, 현악 4중주, 피아노 트리오 등 다양한 앙상블을 즐겼지만, 이렇게 한숨으로 흐르는 공연은 정말 오랜만 아니던가. 내 세계에 또 하나의 음색이 등장했다. 이렇게 연주자들은 서로 다르다. 각기 다른 해석과 표현이 세상에 가득하다.
얇고 길게 파동치는 사람, 소리선 하나에도 파동을 달리하는 사람, 쭉— 넓은 영역으로 길게 그어 버리는 사람, 중간 지대에서 부드러움을 만드는 사람.
너그러우면서도 단단한 심지를 지닌 사람, 패스츄리의 결처럼 세세하고 진중한 소리를 내는 사람, 물방울을 짓이겨 버리는 사람, 띄워 보내는 사람… 그 서로 다른 소리를 한 사람씩 마주할 때마다 눈이 반짝였다.
ⓒ 유진
공연이 끝나고 북적이는 로비 밖으로 빠져나왔다. 오늘의 곡을 듣자마자 ‘바흐의 샤콘느인가?’ 하고 지레짐작했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스스로 믿음 지수 -10%) 그래서 공연장 밖 앙코르 안내 화면을 찰칵 찍어 왔다. 다행히 틀리지 않았다!
맞췄다는 생각에 약소하게 기뻐하던 찰나, 누군가 내 팔을 톡… 톡… 두드렸다. 헉! 줄라이 페스티벌에서 인사드렸던 선생님(친구 제외 남녀노소를 모두 선생님이라 칭하는 버릇이 있다)께서 인사를 건네셨다. 아는 얼굴을 뵈니 반가워 한참을 놀랐다.
짧게나마 그 공간에서 오늘의 공연이 어땠는지 서로 나눌 수 있어 좋았다. 또 로비 밖으로 오늘의 연주자가 나타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팬 서비스를 하는 장면을 함께 지켜보며, 다음 공연은 무엇을 보실지 재미난 탐색전도 벌였다. (크크)
내 주변에 클래식을 좋아하는 이가 나뿐인 지금으로선 이런 대화가 아주 귀중했다. 짐을 두고 온 터라 함께 밤길을 거닐 수는 없었지만, 즐겁게 다음을 기약하는 재미가 있었다. 어디서 마주칠지 모르는, 만나면 반가운 전우 아니던가.
ⓒ 유진
높은 회색 계단을 함께 오르며 장난스레 노닐었다.
“아, 오늘 정말 아름다운 목요일이네요?”
꺄르르 오가던 말간 웃음소리가 선연하다.
4. 긴 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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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가로등 아래, 다수가 정문으로 향하는 긴 길을 홀로 역행하며 오늘을 지나오며 스쳤던 생각들이 떠올랐다.
‘아, 오늘— 재밌었다.’ ‘바이올린을 좋아하는구나.’
‘미련하게 기대했구나.’ ‘아쉽네(공연 말고).’
‘당분간 마지막 방학이네.’ ‘적적하네.’
터덜—터덜. 터덜—터덜. 터덜—터덜.
좋은 공연을 봤으니 오늘은 오랜만에 길게 산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밤이 10시가 넘었지만, 왠지 걷고 싶은 밤이었다.
재밌는 공연 뒤에도 마냥 기분이 좋은 날이 있는가 하면, 이상하게 꿉꿉해지는 날도 있다. 아마 그날은 후자였다.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기보다 축 가라앉는 기분이 들어 애써 길가에서 재미를 찾기 시작했다. 아까 비상출입구 안내등의 초록빛처럼 온 세상의 ‘초록초록’을 눈과 사진에 담았다.
생각보다 형광빛 녹색이 꽤 많았다. 신호등의 초록불, 간판의 연두빛, 나무잎 사이 가로등 불빛, 자동차 전조등…. 그 나열이 마냥 나를 들뜨게 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더 가라앉히지도 않았다.
늦여름이 오고 있다. 입추도 지났다. 아직 더위의 기세가 강하지만, 못 견딜 수준까지는 아주 조금씩 물러나고 있다.
입고 싶은 여름옷을 부지런히 입어야겠다고, 유달리 늦는 귀가에 혹여 성이 났을지도 모를 가족들도 달래야겠다고 생각했다. 굳이 늦은 시간의 산책을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않았던가.
지하철역이 눈앞에 다다르자 오늘 밤이 길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이미 스스로 예고하지 않았던가. 오늘은 이대로 지새워도 괜찮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