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올라가며
ⓒ 유진
골목, 볼레로와 악기거리
오른손 검지로 핸드폰 화면 위 옆으로 누운 작은 세모를 눌렀다. 라벨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볼레로〉가 흘러나온다. 한적한 오르막 골목길 위 코랄빛 하늘에 뽀얀 구름이 가득한 7일 오후였다.
골목길을 오르며 문득 지금이 ‘호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예쁜 하늘을 위에 띄워 놓고 피아노 곡을 들으니 그런 마음이 자연스럽게 피어올랐다.
그날의 더위 정도는 어땠던가. 손에 든 양산 밖으로 조금만 노출돼도 ‘으악’ 할 정도로 기세가 강했고, 잠시 들리는 가게 하나하나가 매우 감사해지는 온도였다. 휴—. 어쩔 수 없이, 적어도 오후 5시까지는 천장 지붕 아래에 몸을 숨겨 놓는 편이 여러모로 신상에 이롭지 않은가. 그래서 쌀국수집에 들러 비빔 쌀국수도 먹고, 지하 카페에 들러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마셨다.
원래 가고 싶었던 하얀 간판의 카페가 있었지만, 이미 사람들이 가득해 그 앞에서 발을 돌렸다. 왜? 나는 예습을 해야 했다. 두 대의 피아노, 네 손의 연주를, 〈볼레로〉를 감상하기 1시간 전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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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반 위 네 손
두 대의 피아노, 혹은 건반 위 네 손의 연주는 ‘피아노 듀오(Duo)’ 공연에서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듀오라니, 내게는 현악 4중주나 바이올린과 피아노, 혹은 바이올린과 첼로의 2중주보다 훨씬 낯선 조합이었다.
두 명의 연주가가 한 악기를 마주한다. 서로 다른 역할을 맡은 두 사람은 피아노 앞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거나, 두 대의 피아노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는다. 건반 위에 네 손이 얹혀 있는 장면은 그 자체로 낯설고도 신기하다. 오케스트라 공연이 아닌 이상, 나는 늘 악기 한 대를 든 한 사람의 소리에 집중해 왔던 터였다.
앙상블 안에 있다고 해도, 나는 개별 연주가들의 표현을 듣고자 했다. 현악 4중주 공연은 어떻게 감상했더라. 바이올린이면 바이올린, 첼로면 첼로, 비올라면 비올라. 딱— 화음을 만들어내는 합일의 순간도 있지만, 작곡가가 지정한 영역 안에서 각자의 악기를 드러내며, 자신만의 색감을 순간마다 표현하는 장면을 자주 지켜봤다. 고수들의 팀플인 것이다.
그런데 그 고수들이 악기 하나를 나눠 든다? 바이올린으로 표현하자면 한 명이 현을 짚고, 한 명이 활을 긋는 것이다. 피아노 앞에 사이좋게 나란히 앉은 연주가들의 옆모습을 보면 반가운데 어색한 사촌동생과 독방에서 둘만 남은 기분이랄까..
사실 피아노 듀오 연주가 이날이 처음은 아니었다. 지난 7월 27일, 줄라이 페스티벌에서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피아노 듀오 버전을 감상한 적이 있다. 그날을 떠올리면 저절로 부르르 어깨가 떨린다.
〈봄의 제전〉은 봄이 온 것을 기념하려고 모여 춤추고 의식을 치르다가 마지막에 한 사람이 제물로 바쳐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대지 아래 봄을 그리고, 다 함께 화합하다가, 제물이 택해지고, 산 채로 죽임을 당하는 한 여자의 비극이 건반 위에서 떨어져 마룻바닥을 쿵쿵— 울려대는데, 내가 잡아먹히는 줄 알았다.
그때 실감했다. 저 네 손이 오케스트라를 맞먹을 수 있는 힘을 낼 수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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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스터 듀오(Geister Duo)
그러니, 8월 7일에 열린 2025 예술의전당 국제음악제의 피아노 듀오 무대는 내게 큰 기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예술의전당의 여름 클래식 축제가 아니던가. ‘2025 예술의전당 국제음악제’는 올해로 다섯 번째를 맞았다. 2021년, 국내 신진 음악가들을 위한 공모 형식으로 문을 열었고, 이후 점차 세계적인 연주가들을 초청하며 본격적인 국제 음악제로 자리 잡았다.
내가 감상한 이 날은 IBK챔버홀에서 가이스터 듀오가 무대에 올랐다. 마뉘엘 비에야르(Manuel Vieillard)와 다비드 살몽(David Salmon)로 구성된 이 피아노 듀오는 이번이 첫 내한 무대며 파리 음악원에서 만나 10여 년간 호흡을 맞춰왔다고 한다.
10년? 10년?! 10살이 20살이 되고, 20대가 30대가 되는 그 시간 동안 합을 맞춘 것이다. 그러니 기대가 되지 않을 수가 있는가?
두 사람은 1부에서 한 대의 피아노를 나란히 나눠 치며 슈베르트를 연주했다. 독일 춤, 변주곡, 환상곡이 차례로 이어졌고, 2부에서는 두 대의 피아노를 마주하고 앉아 라흐마니노프의 네 장면 모음곡, 드뷔시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흑과 백으로〉, 라벨의 〈볼레로〉로 마무리했다.
‘Geister’를 찾아보니 독일어로 ‘유령’이라는 뜻이었다. 내 클래식 세계 속 유령은 ‘우아한 유령’뿐이었는데, 또 다른 가이스터가 나타난 셈이다. 그들은 내게 어떤 ‘OO한 유령’이었을까. 이제는 기억을 되짚어 볼 때다.
2. 오후 7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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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앉은 자리는 1층 A블록의 맨 오른쪽 끝자리였다. 모든 자리가 좋은 좌석이겠지만, 피아노 공연이라면 연주가의 옆모습과 손가락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는 왼편 자리가 특히 좋다.
끝자리에 편하게— 가방을 옆구리에 끼워 놓고 앉아 7시 30분이 도래하길 기다렸다. 이제 보니 오른쪽 무대 벽면에 조명으로 NO MOBILE PHONES가 크게 띄워져 있었다. 공연 시작 전 무대 위에 있는 피아노를 핸드폰으로 살짝 담았는데, ‘노 모바일 폰’이라 떠 있어서 웃겼다.
약속된 시간이 되고, 연주가가 무대 위로 올라섰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비장함이 스민 무표정이 걸려 있었다. 처음엔 그 표정이 끝까지 이어질 줄 알았는데, 라흐마니노프와 라벨에 이르러서야 잠깐 스치는 미소를 보았다. 긴장하신 거였구나!
어쨌든 한국에서의 첫 무대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들의 딱딱했던 기색은 연주 장면 속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낯선 나라일지라도, 그들 앞에는 친구 같은 ‘피아노’가 있었다. 일반 악보보다 가로선이 긴 흰 종이 악보를 마주한 두 사람은 어느 때보다 편안해 보였다.
프란츠 슈베르트
나에게 슈베르트는 어떤 사람인가? 그의 곡으로 들어본 건 바이올린 곡 〈화려한 론도 b단조, D.895〉뿐이었다. 한들한들 서정적이다가도 생기가 가득하고, 기교적인 화려함을 놓치지 않는 재미난 곡이라 숲길 산책을 하며 자주 듣곤 했다. 그렇다면, 바이올린이 아니라 피아노 위에서라면 어떨까. 차근차근 회상해 보자.
〈네 손을 위한 독일 춤, D.618〉
첫 음만으로도 사람의 기색을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을 아시는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좋은 곡은 시작 몇 초 만에 ‘아, 이거다’ 하는 느낌을 주지 않는가. 그들의 정제된 여섯 걸음 도입부는 지난 4월 30일의 기억을 불러왔다.
압도적인 음색 속에서도 본인을 적절히 드러내면서, 하나의 ‘호흡’으로 모아졌다. 개별 연주가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정말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였다. (…)
특유의 절제감이었다. 나는 조금 더 여유 있고 재지한 해석이 나올 줄 알았다.
그냥 내가 프랑스 연주가들의 특성을 몰랐던 것 같다. 일단 더 리드미컬하고 아주 큰 리본을 넓게, 우아하게 그려낼 줄 알았는데, 오히려 정반대였다. 정해진 톤 안에서 세련되게 풀어가는 ‘정도감’이 마음에 들었다.
그들이 소리에 색채감을 덧입히기보다는, 이 공연을 보고 있는 관객석과 공간이 스스로 색을 피워나가도록 도와주는 방식이었다.
2025년 4월 30일
나도 모르게 지난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 공연이 떠올랐다. 동일한 키워드들이 쭉— 나열됐기 때문이다. ‘절제’, ‘정돈’, ‘우아함’, ‘세련됨’, ‘합일’. 그 단어들의 나열이 저 손끝에 가득했다.
사실, 두 사람이 아니었다. ‘가이스터 듀오’라는 이름의 피아니스트였다. 손이 네 개일 뿐이었다. 두 손과 두 손이 만나 합을 맞추기에 특유의 예민한 기색이 없다. 충분히 예리하게 끌어낼 수 있는 사람들이지만, 서로가 서로가 되었기에 굳이 ‘내가 어디까지 보여줄 수 있습니다!’가 아니라, ‘우리의 슈베르트는 이런 소리를 냅니다.’ 하는 마음이 첫 음부터 들려왔다.
한 명이 무대 벽 쪽에 앉아 낮은 음을, 한 명은 관객 쪽에 앉아 높은 음을 두드렸다. 윤이 나는 피아노 앞면은 거울과 같았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건반 위를 조근거리는 모습이 피아노에 고스란히 그려졌다. 지금 공연을 보고 있지만, 영상 하나가 동시에 띄워져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들의 슈베르트는 반짝이고 따뜻하며 입체적이었다.
이 곡은 작은 소모임에서 서로 소근거리며 춤을 나누는 순간의 정취를 그린다. 장기를 뽐내기보다, 너와 나의 발맞춤을 기억하고 웃음을 나누는 시간이다. 연주는 그 기분을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었다.
아— 저 네 손을 마주하기 위해 여기 내가 왔음을 깨달았다. 예쁜 것들이 피어난다. ‘톡’과 ‘툭’ 사이, 그 언저리에서 두드려지며, 가볍지만 튀어오르지 않는 그 선상 안에서 슈베르트가 조근조근 춤을 추었다.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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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손을 위한 서주, 오리지널 주제에 의한 4개의 변주곡과 피날레, B♭장조 D.603〉
이 곡을 예습하며 머릿속에 한 문장을 꼭 외웠다.
“이 곡은 서주가 있고, 그 신나는 파트가 지나면 하나의 주제가 나타난다. 그 주제가 네 번 변주될 테니, 그 변화를 꼭 느껴보자.”
작곡가들은 꼭 도입부를 내어주는 것 같다. 그 습관이 오케스트라 공연의 짧은 도입곡이나 골드베르크의 아리아와 퍽 닮았다. 다정한 사람들. 늘 준비 시간을 준다. 1분 남짓의 생긋한 웃음이 지나길 기다리니 ‘똥-땅’ 거리는 담백한 소리가 시작된다.
나도 모르게 고개가 양옆으로 그 움직임을 따라간다. 커다란 원을 그리는 시간인 것이다. 동그란 원형에 새로운 시선을 추가하는 길목이다. 눈을 감고 귀로만 마주하면 20개의 손가락이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주제가 나타났다. 한 걸음, 두 걸음. 오늘 이야기의 가장 밑걸음이 두어 번 반복되며 가볍게 노닌다.
첫 번째 변주. 걸음 아래에 기쁜 재잘거림이 늘어났다. 그 세 번의 그림자가 너무 사랑스럽다.
두 번째 변주. 조금 전 볼륨을 높였다 줄이던 주제에 깊이가 더해지고, 속도감까지 붙는다. 반짝임은 늘어나고, 재잘재잘거림은 한층 귀여워진다. 여기에 힘까지 얹히며 화려하게 터져 나온다. 마지막엔 ‘쾅—!’ 하고 도장을 찍듯 마무리한다.
세 번째 변주. 오— 이번엔 예측하기 어려운 재미난 스캣 같은 것이 끼어든다. 박자감도 쉽게 잡히지 않는다. 도장을 찍고 돌아온 뒤 높게 파도를 타오른다. 이 지점에서 네 손의 매력이 확 드러난다. 한 명이 새근거리면, 한 명이 동굴을 막 지나온다.
마지막 변주. 어, 벌써 가라앉았다. 골드베르크에서 후반부에나 만날 수 있는 따뜻한 기운이 벌써 찾아온다. 잠들기 3분 전의 숨소리 같은 기운. 차근차근 내딛는 길이다. ‘톡—톡—’ 두드리며 예민한 기색을 사그라뜨린다. 이 부분을 들을 땐 ‘반짝반짝 작은 별’이 떠올랐다. “아름답게 빛나네…”
쿵쿵거림 속에 새로운 기색이 드러나는 듯하다가, 생기 어린 소리들이 앞으로 나아간다. 누구 하나 튀어오르지 않는 것이 신기하다. 상체도 건반으로 쏟아지지 않고, 소리도 강하게 주장하지 않는데 자꾸 귀에 담긴다. 이 담백한 매력, 어떡하지?
〈네 손을 위한 환상곡 f단조, D.940〉
이 곡은 가이스터 듀오가 발매한 음반에 수록된 버전으로 예습을 해서 기대가 컸다. 네 손이기에 보여줄 수 있는 서정성과 표현을 가장 넓게 담은 곡이었다.
사실 ‘환상곡’이라는 이름부터 신기하다. 정말 내가 아는 그 ‘환상’을 그리고 있나 싶어 찾아보니, 정해진 형식보다 작곡가의 상상과 즉흥성을 따라 자유롭게 전개되는 곡이라는 뜻이었다. 상상을 따라 자유롭게 나아가는 길인 것이다.
슈베르트는 망가지지 않으면서도 감정을 능숙하고 고상하게 다루는 사람 같다. 그런 사람의 서정성이 이 듀오 안에 담기니까 담담하면서도 세련됨이 더해진다. 빛이 나는 사랑에는 늘 그 이면의 고독과 쓸쓸함이 있지 않은가. 그 복잡한 낙엽빛 마음을 잘 담아내고 있었다.
파도를 타오르다, ‘쿵—’ 하고 내려앉는 비탄의 순간. 어쩌면 저렇게 듣기 좋게 절묘한 중간선에서 착지할 수 있을까? 사람과 사람이 이렇게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호흡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필요한 순간에 스르르 몸을 맡기고 꿈결 속에서 논다.
가이스터 듀오가 아니라 가이스터 솔로(solo), 아니면 가이스터 트윈(twin)이 분명하다. 나이 차 나는 형제는 아닐 것이다. 형제는 이렇게 성격이 딱 맞을 수가 없다. (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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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 제1번 g단조 “환상곡–정경” Op.5〉
인터미션이 끝나고, 두 대의 피아노가 무대에 놓였다. 마뉘엘 비에야르는 무대 기준 왼편에, 다비드 살몽은 오른편에 앉았다. 2부의 시작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라흐마니노프의 모든 길목에는 ‘종’이 울리고, 내려 앉는 연보랏빛 ‘라일락’이 있다. 이 이미지를 마음에 두고, 네 곡의 환상곡을 맞이해 보자.
Barcarolle (곤돌라 노래 풍의 곡)
시작은 ‘경종’을 울리는 강한 타건이 아니었다. 호숫가를 미끄러지는 곤돌라에서 그런 소리를 낼 수야 있겠는가. 해가 기울어지는 길목이니 시선이 자연스레 아래로 향할 수 밖에 없겠다. 슈베르트에서 시선을 높이 들던 마뉘엘 비에야르의 고개가 이번에는 천천히 내려온 것이 기억난다.
아무래도 아래에서 피워낼 것들이 많겠다. 붙잡을 수 없이 자잘한 물결에도 시선을 줘야 한다. 얇고 여리지만 과하지 않게 그려내는 손길이 기억에 남는다. 이렇게 내기 어려운 소리를 튀지 않고 친근하게 관객에게 선사하는 것도 정말 어려운 일일 텐데, 그걸 해내는 사람들이었다.
La nuit… L’amour… (밤… 사랑…)
뱃노래가 지나 사랑을 논하는 시점에 나는 때때로 소리 없이 웃음 지었다. 맞은편 블럭에 앉은 꼬마아이가 가련했기 때문이다. 클래식 공연장에서 누구나 다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건 아니다. 모두가 다 함께 약속한 듯이 고요하게 앉아, 장장 2시간을 같은 자리에서 숨소리까지 조절해야 한다면 누가 가장 괴로울까?
나는 일단 꼬마, 특히 뛰어놀기 좋아하는 남자아이라면 더 힘겨울 것 같다. 내 옆의 아이도 그랬다. 당장 어른이 옆에 있으니 얌전히는 있겠지만 변주곡과 환상곡까지 잘 버티다가, 2부가 시작되니 조용히 몸부림치며 힘들어했다.
때때로 시선을 멍하니 벽에 던지다가, 한 번씩 이쪽을 쳐다보면 살짝 웃어줄 수밖에 없어서 미안했다. 아이의 마음을 마냥 공감하고 이해하기엔 앞에 놓인 것들이 너무 예뻤다.
이 곡은 서사적으로 치닫기보다, 마음과 마음을 나열하는 소리였다. 중간에 한 번씩 몰아치는 화음이 있는데, 아이가 타이밍 좋게 화려한 소리 안에서 몸부림쳤다가, 사위가 고요해지면 얌전히 앉아 있으니 착하기도 하고 가여웠다. 언젠가 오늘을 기억할까? 아이의 맘도 모르는지 두 사람은 고요히 윤을 내기 바빴다.
Les larmes (눈물)
이젠 조금 울어볼 시간이겠다. 눈물 방울이 하나, 둘, 셋, 넷… 하고 떨어지길래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가며 횟수를 세었다. 네 번의 울음 방울. 대략 여덟 번 이상 떨어지고 나서야 그것이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라흐마니노프는 눈물도 이렇게 흘리는구나. 위에서 아래로, 하늘에서 대지 아래로 간다.
신기한 건, 연주가들이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할 땐 하나같이 ‘라흐마니노프’처럼 친다는 것이다. 개성이 강한 이들도 타건을 내려놓을 땐 일직선 아래로 ‘쿵—!’ 하고 떨어뜨린다. 내려놓는 게 아니라, 아래로 꾹— 파동을 만든다.
Pâques (부활절)
마지막, 부활의 곡이다. 방금 전 아래로 꾹— 파동을 만든다고 했는데, 그 아래의 것들이 음악이 되면 이 곡이겠다. 어떻게 이렇게 스타일이 확실할 수 있을까? 예습했던 음원에선 꽤 개성이 강했던 것 같은데, 여기서도 가이스터 듀오는 여전히 중간 지대를 확실히 지켰다.
누가 하나 튀려 하지 않고, 애써 더 앞서나가지도 않는다. 후반부를 달려가는 시점 앞에서 이렇게 담백할 수 있을까. 딱 눌러야 하는 그 지점만큼만 앞세워 나가는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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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드뷔시 –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흑과 백으로, L.134, CD.142〉
흑과 백이다. 기쁜 듯 슬픈 듯 아이러니한 1악장, 전사한 친구를 그리는 장송의 2악장, 찬송가의 3악장까지. 이때쯤에는 생각할 틈도 없이 무대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천장에도 시선을 한참 두었다. 희망차면서도 불안한 소리가 양옆으로 오가는데, 뭘 판단할 수 있겠는가.
두 대의 피아노가 무대 중앙에서 오른쪽과 왼쪽을 차지해 관객석에 소리를 쏜다. 약간 무선 이어폰을 양 귀에 꽂은 기분이었다. 그것도 돌비 음향으로. 소리가 튀어오르고 입체감을 형성하는데, 드뷔시의 흑과 백 안에서 무엇을 판단할 수 있겠는가. 그냥 앰비언트 음악을 듣듯 멍하니 듣게 된다.
두 사람은 경쟁하듯 호흡을 맞추지 않았다. 굳이 시선을 많이 나누지 않아도, 서로의 소리는 자연스레 하나로 포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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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라벨 –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볼레로〉 (라벨 편곡)
‘동—도도도동동동—동.동.’ 누가 들어도 “어, 나 이 곡 들어봤어” 할 만큼 유명한 도입부다. 이걸 들을 적엔 헛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큰 호사다. 가만히 앉아서, 그 유명한 〈볼레로〉를 듣다니.
그렇게 웃는 와중에, 아이는 끝이 다가왔는지 모른 채 답답함을 꾹 참고 엉덩이를 들썩였다. 속으로 ‘흐흐, 힘내, 이제 마지막 곡이야.’ 하고 응원했다.
반복적인 패턴일수록 리듬이 일정해야 하고, 소리의 딕션이 정확해야 한다. 프로들이야 당연하겠지만, 그 당연한 걸 해내는 걸 보면 나는 늘 신기하다.
‘동—도도도동동동—동.동.’이 몇 번이고 쌓여가는데, 이상하게 지루하지 않다. 분명 반복인데도 그 안에서 미세하게 무언가가 더해진다. 흐름을 조금씩 끌어올리는 걸까. 포인트를 미묘하게 조절하는 것이 분명하다. 약간 담백해서 계속 손이 가는 삼삼한 빵 같달까…라고 생각하던 순간, 아이가 몸부림치는 바람에 웃음이 터질 뻔했다.
돌고, 돌고, 또 돌며 동그라미를 계속 그려나가는 과정이니, 얼마나 갑갑할까. 예전에 김창완 씨가 라디오에서 청취자의 고민에 답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회사생활이란 것도 47일 근무 중에 이틀이 동그라면 동그란 것입니다. 너무 매일매일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위에 그린 동그라미를 네모라고 하겠습니까, 세모라고 하겠습니까? 그저 다 찌그러진 동그라미들입니다. 우리의 일상도~” (2014년 12월 4일)
골드베르크를 듣는 것도, 같은 주제로 변주곡을 만든 것도, 〈볼레로〉로 원을 그리는 것도, 어쩌면 내가 내 동그라미를 함께 그려나갈 친구 하나를 얻기 위함이 아닐까?
나도 몇 개쯤 그려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0ㅇodㅁ0ㅇ0ㅁDㅇㅁ0ㅁ0ㅇodㅁ0ㅇ0ㅁDㅇㅁ0ㅁ0ㅇodㅁ0ㅇ0ㅁDㅇㅁ0ㅁ0ㅇodㅁ0ㅇ…
〈볼레로〉의 음들과 닮아 있는, 모양이 제각각인 O들. 어떤 형태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찌그러진 것까지도 다 우리의 일상이라 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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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 – 하나의 슈베르트, 두 개의 라벨
오늘의 프랑스 내한 연주자들이 일을 냈다. 앙코르에서 무려 세 곡을 연주했다. 나는 신이 났지만, ‘이제 끝났겠지’ 하고 벌떡 일어나 우레 같은 박수를 치던 옆자리 꼬마가 두 번이나 좌절하는 걸 보고 속으로 깔깔댔다.
한 곡이 시작될 때마다 다비드 살몽이 차근차근 제목을 외쳤다. 박수와 박수 사이로 라벨 〈어미 거위〉의 ‘마법의 정원’과 ‘미녀와 야수의 대화’, 그리고 슈베르트 〈안단테 a단조, D.968〉가 들뜬 관객 사이를 나긋나긋 지나갔다.
피아노 하나의 네 손 연주를 위해 마뉘엘 비에야르가 신이 난 얼굴로 의자를 옮기며 지었던 미소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얼마나 천진하게 웃던지. 아까의 무표정은 모두 긴장과 진지함 때문이었다. 라벨을 연주할 때, 그의 손등이 천천히 하얀 건반을 유유히 타고 흐르던 순간이 있었다. 일전에 봤던 발레리나의 손끝처럼 부드럽고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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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내려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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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의 앙코르와 문 밖 사인회 인파를 지나 예술의전당을 빠져나오니, 어느새 9시 45분이 훌쩍 넘었다. 쉬는 시간이 있었다 해도 꽤 넉넉한 분량의 공연이었다. 맞은편 보도를 걷다 공연장 건물 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그 위로 아주 동그랗고 영롱한 은빛 달이 창공 한가운데 높게 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어, 보름달이다.” 하고 중얼거렸다. 갑작스럽게 느껴질 만큼 선명한 달이었다. 휴대폰으로 살짝 사진을 남기고, 은빛을 뒤로한 채 골목길을 내려가며 생각했다.
아마 저 달은 오늘의 가이스터들이 불러온 것이리라. 불순물 하나 없이, 군더더기 없이, 순수하게 웃는 모습이 꼭 그들을 닮아 있었다.
악기 앞에선 모두가 어린아이가 된다. 소리에 마냥 실없이 웃던 나도, 이해하기 어려운 음악에 몸부림치던 꼬마도, 이국의 무대에서 익숙한 건반을 마주하던 두 사람도. 그 건반 앞에서는 모두가 동그랗게 웃는 어린아이가 된다고, 저 달이 일러주었다.
나한테만 살짝! (소근소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