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말, 엄마의 한마디에 기분이 상했었다. 별것 아닌 한마디였는데도.
엄마가 했던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이었다. 물론 나는 엄마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그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잘 안다. 하지만 그날의 기분 때문이었을까. 무슨 뜻인지 알면서도, 나는 일부러 엄마의 말을 나쁜 쪽으로 받아들였다. 엄마는 자신이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나는 "그래도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은 하지 말아야지"라고 말해버렸다.
시간이 지나고,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인 엄마의 뜻을 알면서도 모른척하고 다르게 받아들여 다툰 그날을 떠올리며 한 가지를 깨달았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이 사람이 내 숨겨진 의도를 알아주겠지'라는 기대를 품고 말을 하면 안 되겠구나.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은 애초에 하지 말아야겠구나.
'말 한마디에 천 냥 빚 갚는다'는 속담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의 말도 오해할 수 있다. 다만, 가까운 사이라면 오해를 털어놓고 풀 기회라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이에서의 한마디는 오해를 쌓고, 그 오해는 결국 벽을 만든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온 배경이 다르기에, 같은 말을 들어도 각자의 방식으로 타인의 말을 번역해버린다. 아무리 한평생 함께 살아온 가족도 마찬가지다.
책 <오역하는 말들>은 재치 있는 번역으로 잘 알려진 황석희 번역가의 에세이다. 번역가의 시선으로 바라본 일과 일상 속의 오역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의 일화와 생각들이 담긴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문득 내가 타인의 말을 어떻게 번역하며 살아왔는지를 돌아보게 되었다.
번역가에게 오역은 이렇게 애증의 대상이다. 도망칠 수 없는 필연적인 저주인 동시에 결국 나를 키우고 자성하게 하는 존재다.
결국 날 붙들어 주는 건 그 볼품없이 왜소한 정역이다.
지금은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번역가지만, 그에게도 힘든 시절은 있었다. 경력 없던 시절, 그는 가장 낮은 단가에 모두가 기피하는 일인 다큐멘터리 번역 일을 맡았다. 대부분의 번역가가 기피하는 일이었기에, 일은 끊이지 않았지만, 그의 진짜 바람은 드라마 번역을 하는 것이었다. 자괴감에 몰려올 때면, 그는 스스로를 모질게 괴롭혔다.
아마도 모든 죄를 자진해서 뒤집어쓰는 자기혐오가 내 일이 안 풀리는 까닭을 찾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 때문일 거다. 단순히 내가 못났기 때문이라고 해 두면 고민할 것도 괴로워할 것도 없다. 그대로 놓아버리면 그만이니까. 그런 목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지금까지의 여정을 심하게 오역해 버린다. 내가 쌓아 온 것들을 까맣게 잊고 그저 나를 탓한다. 그게 쉬우니까. 나를 때리는 게 가장 만만하니까.
스스로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다가도, 어느 날 불쑥 불안이 찾아온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게 맞는 걸까. 나는 왜 여기까지밖에 못하는 걸까. 그럴 때마다, 나도 나 자신을 심하게 오역했던 것 같다. 지금까지의 해냈던 일들은 모조리 잊은 채, 현재의 초라한 모습만 붙잡고 '나는 안 될 거야'라는 불안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
예전에는 그 불안 속에서 허우적대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나만의 방법을 찾았다. 속으로 내가 인생에서 해냈던 일들을 하나씩 떠올려본다. 설령 그게 정말 사소한 일일지라도 일단 그렇게 몇 가지를 떠올리다 보면 불안은 조금씩 잠잠해진다. 황석희 번역가도 힘든 시절마다 경력 페이지를 읽으며 불안을 가라앉혔다고 했다. 그 모습이 나와 닮아 있어, 깊이 공감이 갔다.
과거는 잊고 현재에 집중하라는 말들이 많다. 물론 이는 잊고 싶은 상처의 과거를 대상으로 한 말일 것이다. 그런데 책을 읽으며 깨달았다. 힘든 과거는 미래의 나를 괴롭히기도 하지만, 잘 쌓아온 과거는 미래의 나를 붙들어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기도 하는구나.
남의 말을 오역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스스로를 오역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마음이 힘들다고 해서, 나 자신을 너무 몰아붙인 것은 아니었는지 한 번쯤은 돌아보기를 바란다.
내 사전으로만 번역하지 말아야 할 것
창가에 서 있는 뿌연 엄마 모습도, 소파에 올려 둔 인형의 모습도,
TV의 한 장면도 아이에겐 담고 싶은 순간이다.
라디오 고정 출연을 그만두며, 황석희 번역가는 김이나 작사가에게 디지털 폴라로이드를 선물받았다. 늦게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어느 날, 그의 책상 위에는 폴라로이드 사진 몇 장이 놓여 있었다. 필름값이 비싸니 아무거나 함부로 찍지 말라고 말해 두었지만, 딸은 분간도 잘 안되는 엄마의 모습, TV 화면의 한 장면, 소파 위의 인형 사진을 찍어두었다.
그는 아이에게 TV 사진을 왜 찍었냐고 물었다. 아이는 엄마랑 만화를 보았던 그 순간이 좋아서, 마음에 담고 싶어서 찍었다고 대답했다. 그때, 아이가 아무거나 함부로 찍었다고 생각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고 한다. 책에서는 어른과 아이의 시선이 다르다고 이야기하지만, 나는 이것이 어른과 어른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때로 누군가의 삶을 부러워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쉽게 폄하하기도 한다. 사람마다 저마다의 삶의 기준이 다 다른 법인데도, 우리는 자꾸만 자신만의 사전을 펼쳐 남을 번역하곤 한다. 나에게는 특별하지 않은 인생처럼 보여도, 누군가에게는 최고의 인생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누군가는 무심히 남의 삶을 평가하고 단정 짓는다.
문득 돌아보게 되었다. 나 역시 누군가의 선택과 삶을 내 기준으로 쉽게 해석하고 단정 짓진 않았는지. 속으로 무심하게 판단해버렸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그 사람에게도 분명, 나에게는 보이지 않는 이유와 간직하고 싶은 순간들이 있을 텐데.
남의 삶을 쉽게 번역해서 일어나는 오역을 방지하기로 다짐해 본다. 어쩌면 그것이 살아가며 우리가 서로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작은 예의이자 존중일지도 모르겠다.
다정한 번역가가 될 수 있기를
책을 통해 잘 알지 못했던 번역의 세계도 들여다볼 수 있었다. 특히 '캔슬 문화'에 대해 다뤘던 <당신을 무효화하다>라는 파트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캔슬 문화는 개인의 영향력은 물론이고 그 사람 자체를 무효화하고 폐기한다. 캔슬 문화의 표적이 된 개인은 사실상 재기가 불가능하고 마치 이 세상에 없던 사람인 양 세상에서 '캔슬'당한다. 그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거의 없다.
최근 몇 년간 유명인들이 소위 말하는 '나락'가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물론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킨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사소한 말 한마디와 행동으로 그 사람이 지금까지 보여 온 모습이 한순간에 무효화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을 볼 때면, 대중들이 마치 그 사람이 '나락'가는 것을 은근히 바라고 있었던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황석희 번역가가 말한 것처럼, 시혜적인 태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누군가에게 '여지'는 남겨 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한 번쯤은 실수하거나 잘못을 저지를 때가 있다. 이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한다면, 그 진심을 헤아리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단순히 유명하다는 이유만으로 그 용서를 '진심이 아닐 것'이라며 단정 짓고, 진심마저도 곡해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 인간에게 해서는 안 될 일 아닐까.
<오역하는 말들>을 읽으며, 우리 모두 누군가에게 여지를 남겨 줄 수 있는, 다정한 번역가가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