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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봄이 온다는 거짓말
겨울 한복판에 있다 보면 문득 겨울 다음에 봄이 온다는 건 거짓말이 아닐까, 싶어질 때가 있다. 이 겨울이 끝나지 않고 계속 깊어지는 건 아닐까. 온통 하얗고 깨끗해 보이는 세상의 한복판에서 집요하게 살을 파고드는 추위를 견디면서 입김을 천천히 토해내다가 나 자신이 겨울보다 먼저 끝나버리진 않을까, 하고.
영화 <브레이킹 아이스>에 등장하는 세 인물도 그런 생각을 하는 듯하다. 세 인물 나나(주동우 배우), 샤오(굴초소 배우), 하오펑(류호연 배우)이 영화에 처음 등장하는 장면을 보면 그들이 마치 시작하기도 전에 지친 사람처럼 보인다.
지쳐 보이는 표정은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지만, 구체적인 맥락(실패랄지, 도망이랄지)이 주어지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시작하기도 전’이라고 느껴지는 건 왜일까.
그들이 젊기 때문이다.
젊음이 불러일으키는 중독
젊음은 불가능과 가능을 모두 ‘풍부하게’ 그러나 구분할 수 없이 함유하고 있는데(그 구분은 사후에 이뤄진다), 확실한 거 하나는 젊음을 품고 있는 사람들은 예리하다.
가능성을 포착하는 데 예리한 만큼 불가능성을 예감하는 데에도 예리하다. 예리한 감각을 가진 그들은 가능이든 불가능이든 환상으로 보지 않으려고 한다. 철저하게 검토하려고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젊음이 가진 주삿바늘 같은 예리함을 내면에 찔러 넣어 스스로를 가능 혹은 불가능에 중독시킨다. 환상에 허무해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중독된다. 0이 되고 싶지 않아 양(+)이 되거나 음(-)이 된다.
현실에 투항한 청춘 영화
영화 속 세 인물은 불가능에 중독된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텅 빈 시선에는 겨울 연길의 풍경이 자리한다. 시선과 풍경이 모두 '불가능'으로 흘러들고 있다.
청춘 영화라기엔 이질적인 시작이다. 이 영화의 목적이 영화라는 ‘장르’와 청춘이라는 ‘틀’을 통해 보는 이에게 낭만과 가능성을 심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청년들이 겪는 어려움, 난관, 봉착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게 이 영화의 목적이다. 그 불길하면서도 현실적인 불가능성들을. 이 영화는 영화와 청춘이라는 낭만의 무기를 가졌지만 현실에 기꺼이 투항하듯 그것들을 모두 버린 채, 불안에 중독된 상태를 겨울의 차갑고도 깨끗한 배경 위에 이미지로 보여준다.
클럽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갑자기 울고, 서점에서 가장 두꺼운 책을 훔치고, 셋이 오토바이를 타고, 거리에서 밤을 새고, 미약한 사랑이 갑자기 불타오르고, 꾸준한 사랑을 거부하고… 누군가에겐 낭만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겐 한심해 보이기도 한 그런 행동들은 불안에 중독된 그들이 현실에서 살아가는 모습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불안은 음악에, 놀이에, 절도에, 사랑에 달라붙어 스스로를 달래면서 동시에 갈급하게 만든다. 그런데 그 갈급함은 거리를 두고 보면 아름다운 것처럼 보인다. 청춘이 그 속내는 불행해도 보는 자에겐 아름답게 보이듯이. 그건 대상화된 청춘이 실제의 청춘에게 가하는 기만일 것이다.
세 배우는 지친 표정과 공허한 눈빛, 흩어지는 말들로 그런 기만을 물리친다.
그들이 묶인 이유
겨울의 한복판에 있는 그들에게, 갈 곳 없이 연길을 떠도는 그들에게 꿈, 목적을 전해주는 건 그들 중 유일하게 외지인인 하오펑이다.
연길에서 살고 있던 나나(여행 가이드 일을 한다)와 샤오(식당 일을 한다)와 달리 상하이에서 금융업에 종사하다가 친구 결혼식 때문에 이곳에 온 하오펑, 알 수 없는 우울감에 결혼식장을 박차고 나가 연길 일일 투어에 참여했다가 핸드폰을 잃어버리고 비행기까지 놓쳐 나나, 샤오와 일주일 간 함께하게 된 하오펑은 그들에겐 젊은 성공의 상징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 중 지금 현실을 가장 괴로워하는 인물이 그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들 모두 ‘같은’ 시기를 보내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고뇌하는 장소는 달랐을지언정 고뇌의 질은 같아 보인다. 그런 동질감이 그들을 이 겨울의 연길에 묶는다. 고뇌가 그들을 감싼다.
백두산 천지에 가보고 싶다는 하오펑의 바람은 얼핏 듣기엔 얼토당토않게 보인다. 서점에서 본 천지 그림, 호랑이와 같이 인간 되기에 도전했다가 승리한 곰의 이야기(단군설화)도 그러하다. 그러나 불가능에 중독된 그들에겐 불가능의 극한(북한과의 경계이자 겨울의 극한)도 무리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무작정 백두산으로 향한다.
얼어붙어야 가능한
누가 보아도 무리인 그들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이게 가능성이 아닐까 싶어지는 순간이 온다. 불가능을 향해 가는 그들이 마치 가능을 향해 가는 것만 같은 착각, 신기루라고 생각했던 게 정말 있는 게 아닐까 싶어지는 느낌.
한겨울이라 매우 위험할 텐데도 불구하고 그 이유로 천지 등반이 가능할 것 같이 보이는 것은 마치 강이 얼어붙는 겨울만이 도구 없이 그 강을 건너갈 수 있는 위태롭지만 유일한 때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겨울의 한복판에 이르러서야 이곳과 저곳을 사이에 놓인 거리, 그 불가능을 건너갈 수 있는 다리가 놓이는 것이다.
하오펑은 얼어붙는 것 자체를 부정하고 싶어 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수시로 얼음을 씹어먹는 그의 습관은, 이 추위는 녹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부숴버리는 게 빠를지도 모른다는 자기파괴적인 내면이 자리하고 있는 듯하다.
나는 하오펑뿐만 아니라 나나, 샤오까지 모두 빙판을 부수기보다, 그 빙판이 깨지진 않을까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내딛다가 뒤로 빠졌다가 하는 것보다, 스케이팅처럼 그 빙판 위를 부드럽게 달려가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면서 (과거 피겨스케이팅 유망주였던 나나에겐 특히나 이 바람이 강했다) 영화를 보았다.
천지로 가는 여정 후, 그들은 제대로 된 안녕도 없이 제각기 흩어진다. 나는 그 섣부른 흩어짐이, 각자 건너야 하는 강을 건넜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그들이 같이 보낸 일주일은 겨울의 한복판에도 다음은 있다는 걸 확인하는 시간이었던 게 아닐까. 그 셋 모두가 겨울 다음으로 갔다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