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동물 가로지르기 – 시드니 동물원
찜찜한 시작을 뒤로하고 시드니 동물원으로 향했다. 자연으로 드글드글한 호주를 돌아다니면서 캥거루 하나 못 본 게 말이 되나 싶은 타이밍에 동물원이라, 이제 좀 호주 동물을 보나 싶었다. 그러나 남반구의 제일 큰 동물원을 관람하는 우리에게 주어진 건 단 30분. 동물원 지도를 받아 든 우리는 호주 동물이 있는 사육장만 빠르게 돌기로 하고 서둘렀다.
처음 만난 동물은 화식조였다. 타조의 친척인 화식조는 이름만 들어도 한 성깔(?)할 것 같은데 생김새를 보면 왜 그런지 알 수 있다. 화식조는 울타리 너머의 빽빽한 나무들 사이를 조용히 거닐고 있었다. 처음엔 있는 줄도 몰랐다. 화식조가 있다는 표지판을 본 뒤 숲을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알아보았다. 몸뚱이는 검정 털로 수북하게 덮인 데 반해 목 부분부터는 털이 전혀 없는 피부가 그대로 드러난다. 목에 늘어진 돌기는 닭의 볏처럼 새빨갛다. 그러나 얼굴로 가면서 붉은색은 돌연 푸른색으로 반전되고, 머리 위에 투구처럼 생긴 단단한 갈색 볏이 데코처럼 놓여 화식조의 인상이 마무리된다. 자연이 부여한 숨 막히는 아름다움과 위협적인 권위가 동시에 느껴지는 동물이었다. 목 부분의 붉은 돌기를 보고 불을 삼킨 게 아닐까 하여 동양에서 화식조(火食鳥)라는 이름이 붙은 것인데(실제로 불을 먹는 건 아니다), 호주에서도 ‘킬러 새’라고 불리고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새라고도 불리는 만큼 생김새만으로도 위협적이었다. 잠시 스쳐 갔을 뿐이지만 실제 숲에서 만났다면 몸이 굳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다음에 본 동물이 그 유명한 코알라다. ‘코알라’는 생전 물을 마시지 않는다는 뜻이다. 코알라들은 겁이 많아 땅에 사람이 있으면 내려오지 않고 나무 위에 매달려 나뭇잎만 뜯어 먹는다고 한다. 그러니 물을 마실 일도 잘 없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간혹 땅으로 내려와 물을 마실 때도 있긴 한데, 물 먹다가 원래 집을 잊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코알라는 유칼립투스가 주식이며 잠이 많은 걸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유칼립투스에 든 독을 해독하느라 하루 대부분 헤롱헤롱 하다고 한다. 호주의 나무 80%가 유칼립투스 종이라고 하니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거다. 새끼는 유칼립투스 해독 능력이 없어서 생후 6개월까지 어미 젖을 먹으며 크다가 8개월부터 유칼립투스를 먹는다고 한다. 그 두 달 동안 어미의 똥을 먹으며 해독 능력을 자연히 익힌다고.
보드라운 회색 털로 덮인 코알라들은 다들 깨어있었는데, 그렇다고 자는 것과 딱히 달라 보이지 않았다. 한가로운 휴일, 달콤한 낮잠을 즐기다 누군가의 적극적인 방해로 급작스럽게 깨어난 것 같은 부스스한 얼굴로, 저마다 딴생각에 빠진 것처럼 다른 곳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 처연하면서도 귀여웠다.
동물원의 캥거루는 미디어에서 수두룩하게 보았던 모습처럼 근육과 풍채를 자랑하듯 꼿꼿이 서 있지 않고, 상체를 온전히 숙여 거의 사족보행 자세로 풀을 뜯어 먹고 있었다. 캥거루 중에서도 꽤 작은 종류였다. 캥거루 사육장과 관광객들이 걸어 다니는 길 사이에는 크고 낮은 바위들만 깔려 있어서 캥거루가 마음만 먹으면 넘어갈 수 있을 듯이 보였다. 그런데 넘어가면 위험한 상황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느낌보다는 자기를 보며 열광하는 유치원 아이들과 같이 껑충껑충 뛰어다닐 것만 같이 느껴지는 온화한 인상의 캥거루였다.
캥거루라는 이름은 발음 자체도, 영어 알파벳이나 한글의 자모 조합을 보아도 뭔가 명랑하고 엉뚱한 느낌을 주는데, 유래도 재미있다. 호주에 처음 상륙한 영국인들이 낙타 같은 얼굴에 긴 꼬리가 몸을 지탱하고 있는 동물(캥거루)을 보고 원주민을 향해 저 동물의 이름이 뭐냐고 물었을 때 들은 답 ‘캥거루’를 이름으로 채택한 것인데, 사실 ‘캥거루’는 원주민 말로 ‘무슨 말인지 모른다’는 뜻이다. 영국인들이 영어로 묻는 바람에 원주민들이 알아듣지 못하고 그렇게 대답한 거라고. 그런데 호주를 지배한 영국인들은 그게 그 동물의 이름이라고 생각했으니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호주를 대표하는 동물 캥거루의 명랑한 이름 안엔, 호주에 무자비하게 세력을 뻗친 영국인들의 어리석음이 앙증맞게 끼어들어 있다.
캥거루와 비슷한 누명을 쓴 동물이 ‘태즈메이니아 데빌’이다. 직역하자면 태즈메이니아 악마. 태즈메이니아는 호주 남부의 거대한 섬으로, 나는 호주에 와서 그 섬의 존재를 처음 알고 놀랐다. 태즈메이니아 데빌은 태즈메이니아에만 서식하는 희귀 동물인데 호주로 이주한 영국인들이 생김새만 보고 악마 같다 하여 그런 이름을 붙인 거라고 한다. 이름과는 다르게 성격은 온순하다고. 동물원에서 본 태즈메이니아 데빌은 사육장 안을 뛰어다니고 있었는데, 강아지와 쥐가 섞인 것 같은 생김새며, 몸에 그려진 희고 검은 무늬가 반달가슴곰 같이 보여 독특했다. 다리가 몸통에 비해 가늘었고 마구 뛰어다니는 모습이 천진난만해 보였다.
그리고 드디어 내가 보고 싶었던 동물 에뮤를 보았다. 에뮤는 화식조처럼 타조의 친척으로, 화식조만큼 공격적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온순한 동물도 아니다. 달리기가 빠르고 발차기도 매서우며, 내가 우연히 알게 되어 빠져들었던 ‘에뮤 전쟁’의 역사처럼 인간과 대적할 정도로 머리도 비상하다. 에뮤는 잔디로 덮인 자신의 사육장을 늠름하게 거닐고 있었다. 나에겐 에뮤가 사육장의 어두운 숲을 거니는 화식조보다 더 위엄있어 보였다. 자신을 통제할 줄 아는 듯한 호박색 눈빛과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의 도도함은 1930년대 밀 농장을 헤집고 다녔던 역사와 호주의 국조(國鳥)라는 상징을 고이 간직하고 있는 듯 보였다. 나는 에뮤 앞에서 가장 오래 서 있었다. 내가 쓰고 있던 소설이 닿아야 할 실체가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덧 약속 시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동물원 출입구로 급히 뛰어가면서 보았던 ‘딩고’는 여기서 보았던 동물 중 가장 평범해 보였다. 왜냐하면 딩고는 호주의 야생 들개이기 때문이다. 생김새가 한국에서 흔히 보던 개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딩고는 호주의 몇 안 되는 포식자라고 한다. 총기 소지가 불법인 호주에서 경찰 다음으로 총기 소지가 가능한 직업이 호주의 농장주들인데, 바로 딩고들을 쫓아내기 위해서다. 호주 중앙의 농장주들은 자신이 키우는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 아예 ‘딩고 펜스’를 만들었다고 한다. 길이는 무려 5,600km. 지난번에 언급한 토끼 펜스가 3,200km이니 정말이지 호주다운 규모다.
딩고의 존재와 위험성이 알려진 건 ‘딩고 사건’ 때문이다. 호주에 캠핑을 온 한 부부가 딩고가 자신들의 아이를 물고 숲으로 갔다고 경찰에 신고한다. 그러나 경찰들은 그들 부부가 차분해 보였다는 이유로 그들을 의심하기 시작하고, 살인 혐의로 체포한다. 후에 딩고가 물어갔다는 증거가 발견되었는데도 경찰들은 무시했고, 언론의 왜곡 보도까지 이어졌다. 부부는 아이를 잃은 슬픔을 위로받지도 못하고 그보다 더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아이를 잃고서 32년이 지난 2012년에 모든 혐의를 벗었다고 한다. 그런 안타까운 역사로 알려진 게 딩고다.
뛰어가는 짧은 순간 본 게 다지만, 터덜터덜 걸어가는 딩고에겐 끝이 없는 굶주림과 지울 수 없는 야생성이 뒤섞여 있는 것만 같았다.
자연 그대로의 자연 - 블루마운틴
한국인이 운영하는 멋들어진 별장 같은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다음, 자연 그대로의 자연, 블루마운틴으로 향했다. 블루마운틴은 그 이름처럼 파란 산인데, 산이 파란 게 아니라 산의 대기가 파랗다. 유칼립투스 때문이다. 유칼립투스에서 나오는 오일 성분은 공기 중으로 떠다니는데, 그것이 햇빛에 반사되면 파랗게 보인다고. 버스로 이동하는 중에 가이드가 설명하면서 버스가 가는 방향을 가리켰는데, 정말 대기가 파랗게 보였다. 마치 끈끈하고 습하고 아득한 과거로 가는 것 같았다.
트래킹 코스라 해서 산을 타나 했지만, 애초에 호주의 산들은 납작하고 완만한 편이기도 하고 블루마운틴 정상 부근까지 도로와 마을이 있어, 버스로 편안하게 정상까지 가서 시작하는 코스라는 가이드의 얘길 듣고 마음이 놓였다. 정상 부근으로 가는 동안 맑은 하늘 아래 시골 기차역과 마을이 길게 이어졌다. 빌딩으로 가득한 시드니 시내와 달리 현지인들만 사는 시골 마을의 낮은 집들은 나무들로 둘러싸인 채 태평하게 자연을 만끽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시골 마을이 블루마운틴과 이어지는 길목이라는 점이 당연하면서도 묘하게 느껴졌다. 문명의 사소한 시작과 자연의 창대한 작품이 고리처럼 맞물려 있는 것 같은 이 느낌은, 뒤에 가서 이 여정이 아주 머나먼 과거로의 귀향임을 알리는 신호로 풀이되었다.
숲에 들어서자마자 습기를 머금은 숲의 냄새를 맡았다. 상쾌하면서도 안온한 듯 느껴지는 숲의 냄새는 어떤 설명 없이 나 또한 자연의 일부임을 깨우치게 했다. 우리는 단처럼 생긴 바위와 전봇대처럼 꼿꼿하게 서 있는 유칼립투스를 구경하며 걸었다. 그러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주변이 확 트이더니 블루마운틴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나왔다.
눈앞에 태곳적 자연이 있었다. 미래로 쏟아지는 시간의 흐름이 모조리 차단되고, 그 틈을 타 머나먼 과거에서 출발한 시간이 변하지 않은 채 그곳에 도착해 있었다. 빛의 주인인 태양이 드디어 제대로 된 도화지를 만나 실력을 발휘하려는 듯, 빛을 휘두르는 기세가 당당했다. 그러나 공중에 떠 있는 하얗고 부드러운 거대한 섬들이, 지상에 스며들어 있던 자신들을 공중으로 끌어낸 태양에 심술을 품고 방해하면서 녹색으로 뒤덮인 블루마운틴에 거대한 음영을 더했다.
구름과 지상은 서로를 침략하지 않기로 합의한 두 국가처럼 투명한 국경선을 놓고 평행하고 있었는데, 그 국경선의 폭이 어떻게 결정됐는지, 그 국경선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해석하기도 전에 내 눈에 지평선을 던져 나를 조용히 힐책했다. 저 멀리서 그들은 한 번도 싸운 적 없는 것처럼 친밀하게 섞여 들고 있었다. 시선을 지평선으로 옮길수록 선명해지는 푸르고 온화한 대기는 우주에서 지구를 내려다볼 때 바다 부근에 둘리는 푸른 띠 같았다. 나는 그 국경선의 신비를 눈으로 음미했다. 서로를 배척하는 것 같은 대비가 어느새 하나처럼 섞여 드는 자연의 신비를. 인간이 해석하지 않고 온몸으로 본받아야 하는 그 신비를.
어떤 인공도, 미래도 침입할 수 없는 머나먼 시공간에 외따로이 놓여 있는 이 거대한 자연은 언제까지고 그대로일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도 눈앞의 풍경은 나에게 ‘그럴 수 있게 해야만 할 거야.’라는 알 수 없는 당위성을 안겨주어 불안을 느끼게 했다. 문명이란 얼마나 지루하며 또 위협적인지를 느끼게 한 것이다. 나의 환호성은 그곳에 심긴 유칼립투스가 내뿜는 푸른 숨결에 비하면 정말이지 형편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멍하니 전경을 바라보고 바라볼 뿐이었다.
가이드는 지금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블루마운틴의 아주 일부일 뿐이라며 경험자로서의 여유를 선글라스 아래 두 눈으로 형형하게 내비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 풍경을 수십 번 보았을 그로서도 이 풍경의 창대함은 익숙해지지 않는 건지, 고된 여행 끝에 드디어 휴식을 취하는 자가 지을 법한 미소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있었다.
물론 절벽 같은 위태로운 곳에 놓인 철제 울타리와 산과 산 사이를 공중으로 오가는 케이블카의 검은 선, 저 아래로 보이는 지상의 빨간 궤도열차는 이곳이 온전히 자연만의 것은 아니라는 인상을 주긴 했다. 이런 곳에도 인간의 욕망, ‘편의’라는 욕망이 바다의 기름때처럼 은밀하게 침투해 있다는 인상. 그런 인상을 느껴버린 나를 왼편의 작은 폭포가 위로하는 것 같았다. 그 끊임없는 하얀 붓칠을 집중해서 바라보다가, 놀랍게도 폭포의 어깨 위에 인간이 볼 수 있는 모든 빛의 고리, 무지개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 몰래 온 손님의 존재는 폭포를 봐야만 알 수 있었다. 모든 걸 지운 백지 위에서만 인식되는 모든 색의 현현은.
가이드가 아직 더 둘러볼 때가 많다며 이동하자고 말했기 때문에 나는 비로소 그 꿈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그래도 그 풍경은 이동하는 내내 내 눈에서 떠나지 않고 보였다. 그만큼 블루마운틴은 드넓었다. 하늘 향해 거침없이 뻗어나가는 가지들, 껍질은 벗겨져도 부러지지는 않는 견고한 나무줄기, 양치식물 이파리의 갈라짐과 늘어짐, 새들의 울음소리, 어디선가 물이 흘러가는 소리, 저 어디선가 이제는 볼 수 없는 동물이 불쑥 나타날 것만 같은 산의 세부에 나는 점점 침착해졌다. 그 하나하나를, 별것 아닌 듯 늘어서 있는 자연을 눈에 담았다.
가던 중에 그 유명한 세 자매 봉을 보았지만, 나는 그 유래가 지극히 인간적인 해석이라고 느껴져서 그다지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세 바위는 나에게 마법에 의해 바위로 변해버린 세 자매가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으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이 느린 지면의 움직임, 뒤틀림과 융기, 어긋남과 부서짐의 현상으로 보였다. 그 자체로도 신비롭고 매혹적인데, 인간의 시선으로 비유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게, 재미를 주긴 하지만 그 순간엔 자연을 대하는 적절한 태도처럼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앵무새가 발톱에 숨기고 있던 것
중간에서 코카투 무리를 만났을 때는 야생을 느꼈다. 코카투는 앵무새의 일종으로, 굉장히 영특한 것 같으면서도 엉뚱한 생김새가 특징이다. 나에게는 <넌 동물이야! 비스코비츠>라는 소설책의 표지로 알게 된, 엉뚱하고 친근감 있는 새라 꼭 만나고 싶었다. 우리나라의 비둘기처럼 호주에서 흔하디흔한 새라고 들었는데 시드니 시내에는 전혀 보이지 않더니, 블루마운틴의 딱 그 부근에서 무리 지어 쉬고 있었다. 전날 가이드가 코카투 이야기를 하며 내일 객실의 스틱 설탕을 챙겨가면 재미를 볼 수 있다는 말을 기억하고 있던 엄마가 옆에서 나에게 스틱 설탕을 건넸다. 나는 홀린 것처럼 봉지를 뜯어 양손에 황색 설탕을 붓고 쪼그린 채 그들을 향해 오리걸음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처음엔 이게 뭐지? 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코카투들이 호기심을 보이며 하나둘 다가와 손 위로 올라왔다. 손 위의 설탕을 본 몇몇이 흥분하며 날갯짓했고, 그러는 사이 다른 사람들의 손에 있던 설탕을 먹던 몇몇이 또 다가왔다. 그런 식으로 다가왔다 멀어졌다 하다가 한 마리가 내 왼팔에 앉아 왼손의 설탕을 먹기 시작했다. 드디어.
그러나 기쁨도 잠시 고통이 시작되었다. 야생 동물이기도 하고 애초에 앵무새다 보니 발톱이 날카로워서 내 맨살을 파고든 것이다. 게다가 앵무새치고 무게도 제법 나가다 보니 그렇게 아플 수가 없었다. 먹기 시작한 뒤부터는 내가 아무리 움직여도 날아갈 생각을 안 했다. 먹는 건 좋은데 좀 살살 앉아 있으라고 할 새도 없이 다른 코카투가 날아와 내 어깨에 앉았고 나는 그렇게 만나고 싶던 코카투를 거느리고는 기뻐하지 못하고 아파하며 양손에 놓인 설탕을 허겁지겁 바치는 기묘한 꼴을 하게 되었다. 그 두 코카투는 그렇게 설탕을 포식하고는 냉큼 돌아서서 땅바닥을 뒤뚱뒤뚱 걸어 다녔다. 그들한테서 벗어나서야 지금 내가 야생을 느낀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팔은 코카투 발톱에 긁힌 상처로 온통 벌게져 있었지만.
자연이 내게 하는 말
다시 숲을 걷던 중, 팔에 물방울이 뚝 하고 떨어졌다. 근처에 폭포가 있나, 하고 고개를 드니 폭포 대신에 좀 전과 달리 어둑어둑해진 하늘이 보였다. 심상치 않은 구름의 모양새에 우리는 걸음을 서둘렀다. 가이드가 곧 엄청난 비가 쏟아질 거라고 말했다. 나는 마치 자연이 가이드의 입을 빌려 이제는 돌아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황급하게 버스에 올라타자마자 아주 세찬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빛나고 아름답던 풍경이 먹물을 풀어놓은 듯한 하늘과 비가 공중에 그리는 무수한 빗금으로 어지러워졌다. 버스는 속도를 내어 시드니 시내로 향했다. 우리의 숙소가 있는 곳. 관광객이 돌아가야 할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