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그림책 작가 앤서니 브라운이 다시 한국을 찾았다. '돼지책', '고릴라' 등으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고릴라 할아버지'는 지난 2019년 서울숲 갤러리에서의 '행복한 미술관' 전시 이후, 이번에는 '마스터 오브 스토리텔링'이라는 특별한 이야기를 안고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 돌아왔다. 50여 년간 독창적인 상상력과 따뜻한 시선으로 260여 점의 원화를 통해 일상 속 마법 같은 순간들을 포착해온 작가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는 귀중한 기회다. 케이트 그린어웨이상, 커트 메실러상 등 세계 유수의 상을 수상한 그의 작품들은 어린이는 물론 모든 세대에게 잊지 못할 감동과 상상의 나래를 선사한다. 이제 그의 마법 같은 전시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자.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2층에 펼쳐진 '앤서니 브라운: 마스터 오브 스토리텔링' 전시는 첫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기존 미술 전시의 고정관념을 완전히 뒤흔든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철저히 어린이 관람객을 중심으로 설계된 전시 공간이다. 큐레이터가 얼마나 세심하게 디테일을 고려했는지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어른이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낮은 벽면을 터널처럼 뚫어 아이들만 볼 수 있는 그림을 배치했고, 아이들의 키에 딱 맞는 높이에 캡션을 설치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어린이만 드나들 수 있는 작은 통로들이다. 이런 공간들은 단순한 전시 동선을 넘어 아이들에게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마치 앤서니 브라운의 동화책 '터널'이 현실에서 구현된 듯한 느낌이다.
전시장에서는 어른들이 쭈그려 앉아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전시를 감상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런 체험은 단순히 불편함을 감수하는 수준을 넘어, 어른들에게 아이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그림책 속 상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 우리가 직접 동화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마법 같은 느낌이 든다.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이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이유는 그의 탁월한 스토리텔링 능력에 있다. 그는 일상의 소소한 경험과 관찰에서 환상적인 이야기를 끌어내는 마법사와 같다. 전시에서는 그의 대표작인 '고릴라'부터 최신작 '자그맣고 커다란 고릴라', '우리 할아버지'까지 총 260여 점의 원화를 통해 이런 이야기의 마법을 직접 경험할 수 있다.
"아이디어는 어디에서든 떠오릅니다. 제 이야기 중 일부는 어린 시절 겪은 일에서 비롯되지만, 그 경험들을 그대로 옮기지는 않습니다. 저는 셰이프게임을 하듯, 이야기를 변형시킵니다." 라는 앤서니 브라운의 말처럼, 그의 작품에는 일상의 관찰과 상상력의 변주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나와 스크러피, 그리고 바다'는 작가가 반려견 알버트와 함께 바닷가를 산책하며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한다. 평범한 해변 산책이 그의 손을 거쳐 마법 같은 모험 이야기로 탈바꿈했다. 이 작품은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형 마이클에게 바치는 헌정 작이기도 하다. 이처럼 그의 작품에는 개인적 경험과 감정이 깊이 스며들어 있다.
고릴라와 가족: 앤서니 브라운의 시그니처
앤서니 브라운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고릴라'다. 작가에게 고릴라는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강인하면서도 다정했던 아버지를 상징하는 특별한 존재다. 그의 작품에서 고릴라는 때로는 이야기의 중심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배경에 슬쩍 등장하기도 한다.
1983년작 '고릴라'는 케이트 그린어웨이상과 커트 메실러상을 동시에 수상하며 그를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 작품에서 한나의 아빠와 고릴라가 함께 있는 장면의 대비가 인상적이다. 아빠와의 식사 장면에서는 신문이 두 사람 사이의 단절을 상징하는 벽처럼 표현되고, 배경도 차갑고 딱딱하다. 반면 고릴라와의 식사 장면은 같은 구도지만 따뜻한 노란빛과 풍성한 음식으로 전혀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가족은 브라운 작품의 또 다른 중요한 주제다. '우리 아빠', '우리 엄마', '우리 형', '나의 우주야', 그리고 최근작 '우리 할아버지'까지 이어지는 가족 시리즈는 각 인물을 간결한 문장과 유머 넘치는 그림으로 표현한다. 특히 '우리 할아버지'에서는 전 세계 다양한 인종의 어린이들이 자신의 할아버지를 소개하는 새로운 형태의 스토리텔링을 시도했다.
모든 그림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은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새로운 발견이 있다. 그의 작품에는 배경 속에 숨겨진 이스터에그와 같은 작은 디테일들이 가득하다. "그림 속 배경에 담긴 디테일을 통해, 글이 들려주지 않는 이야기를 전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라는 작가의 말처럼, 이런 숨은 이야기를 찾아내는 재미는 그의 작품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미술관에 간 윌리'에서는 명화를 브라운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했다. 모나리자는 틀니를 빼놓은 고릴라 할머니로, 비너스는 윌리를 괴롭히는 악당 벌렁코의 모습으로 변모한다. 이런 유쾌한 패러디는 작가가 어린 시절 형과 함께 즐겼던 '셰이프게임'의 연장선이다.
전시는 이런 숨은 디테일을 찾아보는 재미를 극대화한다. 관람객들은 마치 보물찾기를 하듯 그림 속에 숨겨진 작은 단서들과 상징을 발견하며 적극적으로 이야기에 참여하게 된다.
앤서니 브라운은 전래동화에도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 그는 친숙한 고전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하거나, 여러 동화의 모티프를 결합해 독창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헨젤과 그레텔'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은 고전에 자신만의 시각적 상상력을 더하고, '엄청나게 커다란 소원'에서는 유럽의 구전 동화 '세 가지 소원'을 유쾌하게 각색했다. '숲 속으로'는 어린 시절 무서운 숲길을 걸었던 기억을 바탕으로, '빨간 모자' 등 여러 전래동화의 요소를 결합한 작품이다.
이처럼 브라운은 옛이야기에 새로운 생명과 해석을 불어넣어,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인 감동을 전한다.
참여하는 전시, 상상력을 깨우는 공간
이번 전시는 단순히 원화를 감상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림책 페이지를 실제로 넘기는 듯한 동선 구성, 작품 속 상징적 요소를 공간 곳곳에 배치한 설계는 관람객이 마치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 속을 직접 걷는 듯한 체험을 선사한다.
전시 마지막 공간에서는 앤서니 브라운처럼 셰이프 게임을 해볼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어서 무작위의 그림을 상상력으로 나만의 그림으로 그려볼 수 있었다. 또한 전시와 연계한 창의예술 체험 프로그램도 준비되어 있다. 앤서니 브라운의 스토리텔링을 바탕으로 한 놀이형 예술체험은 어린이들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자극한다.
"그림책은 나이가 먹었다고 접어야 할 책이 아니라, 나이를 불문한,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앤서니 브라운展 - 마스터 오브 스토리텔링>은 어린이는 물론 한때 어린이였던 어른들에게도 잊고 있던 상상력을 일깨워주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이다. 앤서니 브라운과 특별한 인연을 이어온 한국 독자들에게, 이번 전시는 작가의 창작 세계를 한층 깊이 이해하고 그의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특별한 기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