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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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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이야기


 

줄곧 켜두었던 캔들 워머가 꺼진 걸 뒤늦게 알았다. 노트북과 캔들 워머의 빛이 고작이던 때. 새벽 다섯 시가 지나 조금씩 방이 밝아지고 있었고, 나는 물을 마시려고 일어나서야 워머가 꺼졌다는 걸 알았다. 최대 여덟 시간 동안 켜두는 게 고작이라 금방 꺼질 수밖에 없는데 왜 등 뒤의 빛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을까. 저 빛도 정수기 물처럼 원할 때 콸콸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당장 알아차리지 못하더라도 느껴지는 든든함.

 

같은 의미로서 나는 늘 이야기가 무서운 사람이었다. 누군가 이야기를 꺼내면 반드시 끝이 있어야 했고, 그 결말이 행복이라면 벅찬 표정과 박수를, 슬픔이라면 위로를 전해야 했다. 사람은 외딴 섬과 같다는 말처럼, 사람 사이에 얽히려면 부지런히 행동해야 했다. 그 이야기와 박수 소리에 따라 나오는 나중의 이야기는 모르더라도. 그렇게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아무도 없는 집에 오고 나면, 시선 끝에 닿는 거실의 줄무늬 벽과 불투명한 창문이 내게 억압을 주는 것 같았다. 마치 ‘너 정말 이야기 잘 하고 온 것 맞아?’하고 타이르듯.

 

다 씻고 누워 그들의 질문에 반문해보았다. 이야기를 잘 한다는 것은 무엇이며 정작 이야기는 무엇일까. 나는 잘 모르는 사람에게 내 이야기를 하기 두려운 것처럼 그들의 이야기를 편안히 들을 수 없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나는 나를 평가하려는 사람들에게 자주 이야기를 꺼내야 했다. 이러한 계기로 어떠한 뜻이 생겼고 그로 인해 진로를 이렇게 설정하였다는 이야기. 나는 그 이야기가 너무 무거워서 함부로 꺼내기 싫어했고 사람들은 계속 그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다. 꾹 누른 샌드위치 메이커처럼 힘껏 압축된 이야기들. 대학 입시 면접이나 삶을 케어해주는 상담이나, 이야기를 꺼낼수록 점점 눌리고 얇아진 이야기 때문에 그 속에 들어 있던 감정이란 양배추나 케첩 소스는 밖으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정작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깊이 공감하려 애쓰거나 본질적인 나를 알아채려 하지 않았음에도.

 

사람 간의 감정과 마음을 엮는 게 이야기엔 감정이 들어간다. 그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이든지 조금씩 커지거나 작아지고, 또 기분을 좋게 하거나 상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런 것이 걱정되지 않는 세상이 온다면. 더 크거나 작은 뒤틀림 없이 이야기를 이야기로서 주고받을 수 있다면 더는 겁을 먹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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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에 빌릴 수 있는 감정이 있다면


 

최근 연이 닿은 작가님과 합정에서 데이트를 했다. 일 년 정도 알음알음 뵈었던 분인데 작년 겨울에 연락이 왔었다. 죄송하게도 그 이메일 주소는 내가 잘 사용하지 않는 탓에 올해 개강을 하고서야 답장을 보낼 수 있었다. 약속 날엔 함께 손을 잡고 다니며 초밥을 먹었다. 근처 카페에 가 그 분은 다 지난 연애 이야기를, 나는 현재의 연애 이야기를 했다. 한창 수다로 ‘물고기는 어떻게 이런 맛이 나는 걸까요’, ‘좋은 사람은 뭘까요’ 같은 이야기를 이어 가고 있었는데 낭만은 어떤 걸까요, 라는 질문이 들어왔다.

 

우리는 창밖의 돌담을 보고 있었다. 서울 한복판에서 제주의 돌담을 보며 낭만적이라 말한 참이었다. 아름다운 것. 사이드 미러에 적힌 보이는 것보다 더 멀리 있음. 그런 비슷한 대답을 했던 것 같다. 그러자 그 분은 ‘아름다운 것’에 의문을 가지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낭만은 가질 수 없어서 슬프지 않나요?

 

그러고 보니 사 년 전, 한 시인에게 시인은 세상을 빌려 적는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시인이 세상을 빌린 것이라면 내가 쓴 시도 내가 가질 수 없는 게 아닐까.

 

팔 년 전에 알게 된 시인은 ‘내 안에 내가 부족해’ 마네킹을 세워 옷을 입힌다고 했다. 낯익은 눈빛과 행동을 해도 여전히 낯설다는 것. 나는 그것이 무의식적인 야생의 감각이 아닐까 생각했다. 내가 글자를 연결하고자 세상을 빌리는 것처럼 세상도 간혹 나를 빌리고 빼앗을까봐 두려운 것일 수도 있다고.

 

그렇지만 나는 얼마든지 세상에 빼앗겨도 괜찮다는 입장이다. 이를테면 시에 나의 가장 작은 씨앗을 숨기고 그것을 종이 속 섬유나 레이저 잉크로 덮는다. 꾹 꾹 눌러쓴 것들을 목소리에 담아 발화한다. 독자들이 내 목소리를 듣고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여기까지가 시라고 생각한다. 정확하게 이것이 시입니다, 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게, 정확한 시가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아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테두리가 완벽하게 존재하는 건 아니지만, 세상을 빌린 사람과, 글자를 통해 그 세상을 자신만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독자가 합쳐져서 시가 되는 것. 서로가 서로의 세상을 제대로 알아볼 수는 없더라도, 그로 인해 새롭게 느낀 감정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압축하여 꾹 눌러 담기


 

앞서 나는 샌드위치를 언급하며 시간과 시선에 꾹 눌린 이야기를 말했다. 모닥불 앞에서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관심 있는 주제가 아니라면 주의 깊게 듣지 않는 사람들에게 딱 한 장의 편지를 쓰는 것처럼. 두꺼운 사전을 활짝 펴기 위해서는 양측에 고르게 나누어진 두꺼운 종이가 필요하다. 세 갈래로 나눈 글을 압축해서 누르기. 무언가를 펴기 위해서는 하나하나 잘 펴야 하니까. 난 여전히 세상을 빌리기 위해 세상의 중심에 속하지 않고, 이야기가 이야기로 파생되어 삶의 속담이 된다는 점이 무섭게 느껴지지만, 여러 내용을 한데 모은 바인더처럼 차곡차곡 이야기를 쌓아가고 싶다. 당시 쓰던 시를 고민하며 다이어리에 적은 메모들이 있다.

 

나는 사람이 사람을 온전히 사랑할 수 없다고 믿는다. 그리고 믿음은 언제든 뒤집힐 수 있다는 것도. 내가 공전을 감정처럼 느꼈더라면.

일상도 하나의 전시회가 될 수 있다. 중요한 것만 보면 삶의 비주류는 잊어버린 시간에 남아 버린다.

날이 춥다고 느껴서 그런 건지 정말 추웠다. 싫어하는 날씨나 계절을 온몸으로 좋아할 방법은 없을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더라도.

 

이런 이야기들을 꽉 묶어 내고 싶었다. 일상에서 마주치고자 노력하지 않으면 마주친 것조차 모르는 이야기. 삶이 외딴 섬이어도 남몰래 나룻배를 만드는 법. 나는 삶의 가치를 너무 크게 두려던 사람이었고, 삶이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닌 여러 사람이 조금씩 조각을 나눠 준 조각보였다는 걸 적당한 사춘기 시기에 알았다. 별것 아닌 이야기가 있기에 별이 되는 이야기도 있음을 알아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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