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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인사이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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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A가 떠났다. 봄바람만 남기고 훨훨, 더 넓은 곳으로.

 

지금까지 나는 친한 동료의 퇴사를 겪어본 적이 없었다. 현재 나는 3년 차 직장인, A는 나의 사수였다. 현직장이 첫 직장은 아니지만, 이전까지 나는 스타트업에만 있어봤던 터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수는 거의 없었다. 그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A는 나에게 처음으로 일을 하나부터 열까지 친절하게 알려준 첫 번째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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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뭘 해야 할지 막막해하는 내게 지금까지 내가 들은 가장 중요한 조언을 주기도 했다. 바로, 누구를 도와주고 싶은지 생각하라는 것. 나는 그의 조언을 매일 생각하며 일을 했다. 그리고 어느덧 회사를 넘어 처음으로 ‘나의 일’을 시작해보기도 했다. 아트인사이트에 어느덧 10편 정도의 글을 쓴 것도 그 덕분일 수 있겠다. A 덕분에 나는 이제야 막 일이 무엇인지 깨달아가는 주니어가 되었다.


여러모로 그는 내게 기억에 많이 남을 사람이다. 무엇보다, 그는 여초사회에서 자란 내게 유일하게 남사친에 근접한 사람이었다. 최소한 국내에서는 그랬다. 영어공부를 좋아해 외국인 남자 사람 친구는 몇 명 사귀었지만, 그들과는 한 번도 실제로 함께 밥을 먹거나 식곤증을 깨기 위해 산책을 20분 남짓 해본 적은 없다.


참으로 순수한 생각일 수 있겠으나, 나는 여자 남자 사이의 우정은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아니, 오히려 다른 성별인 친구가 주는 우정의 특별함이 있다. 남자와 여자는 친구로 남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아마 이 우정의 형태가 남다름에 이질감을 느껴서 그런 것일 테다.


내가 생각하는 이 우정의 바람직한 대표 ‘남사친’ ‘여사친’을 소개해본다. 바로 <코난쇼>로 유명한 코난 오브라이언과, <프렌즈>의 ‘피비’로 유명한 리사 쿠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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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코난쇼를 보며 늘 코난이 어딘가 자기희생적인 코미디를 구사한다고 생각했다. 코난도 자신의 유머 감각을 'self-depracating humor(자기 비하 유머)'라 종종 표현한다. 자신을 다 내려놓으면서라도 사람들을 웃기려는 코난은 정말 프로다. 다만 가끔은 그 프로의식이, 그를 조급하게 만든다는 인상 또한 받았다.


하지만 그의 토크쇼에 리사 쿠드로가 게스트로 나올 때면 코난은 어딘가 한결 편안해 보였다. 그가 진행할 때 마음대로 되지 않는 순간이 더 많을 텐데, 리사 쿠드로는 알아서 ‘놀 판’을 만들었다. 특유의 빵 터지는 웃음으로 대체 불가능한 매력을 발산하는 리사 쿠드로. 그녀는 내가 보기엔 코난을 거의 유일하게 ‘찐 웃음’ 짓게 하는 게스트였다. 환상의 티키타카를 보여주는 토크여서 그들의 케미스트리가 돋보였다기보다는, 서로가 편안해 보여서 보는 사람 또한 편안했다. 비단 연애에 있어서만 결이 비슷하고 그림체가 비슷한 게 중요하지는 않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들이 그들 사이에 은은하게 존재하는 게 보였다. 그러다가 우연히 리사 쿠드로가 2010년에 Vassar 대학에서 한 졸업 연사를 듣게 되었다.

 

“I learned you have to surrender to the fact that you are one of too many in a highly competitive field where it is difficult to stand out… for now. Over time, through your work, you will demonstrate who you are and what you bring to the field. Just stay with it and keep working. I was collecting tools to cope with this uncertain path in case it got rocky later on, just in case. … I became friends with and stuck close to the most talented person I met at my very first improv class. Conan O’Brien was a nimble improviser and fully committed in every scene, which always made it great. His writing was unparalleled and everyone understood he occupied a whole other level of talent. I hoped I would be influenced by his high standard of writing and performing. Also, I knew he belonged in this profession and I made him laugh, so I belonged too.”

 

"나는 경쟁이 치열한 분야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배웠어요. 지금 당장은 돋보이기 어렵다는 것도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여러분의 작업을 통해 여러분이 누구인지, 무엇을 이 분야에 가져다줄 수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그저 계속 해나 가세요. 버티고, 계속해서 작업을 이어가세요. 저는 이 불확실한 길이 나중에 더 험난해질 경우를 대비해서, 그걸 견딜 수 있는 도구들을 모으고 있었어요. 만약을 위해서요. 그리고 제가 처음으로 참석한 즉흥 연기 수업에서 만난, 가장 재능 있는 사람과 친구가 되어 가까이 지냈어요. 코난 오브라이언은 아주 유연한 즉흥 연기자였고, 언제나 장면에 온전히 몰입했기 때문에 매번 멋진 장면이 나왔죠. 그의 글쓰기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모두가 그의 재능이 완전히 다른 차원이라는 걸 알았어요. 저는 그가 보여준 높은 수준의 글쓰기와 연기에 영향을 받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는 이 직업에 딱 어울리는 사람이었고, 그런 그를 제가 웃게 만들 수 있었으니까—저도 이 일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죠."

 

첫 수업에서 가장 실력 있었다는 사람과 친구가 되었다니, 나는 그게 누구였을지 궁금해하면서 연설을 듣고 있었다. 아, 그게 코난이었다고? 그래, 코난이었다면 그 누구라도 알아볼 정도의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을 것 같다. 그런 그에게 배웠고, 그 또한 나에게 자극받는 것을 보며 자신감을 얻었다는 리사 쿠드로의 말에 슬며시 웃음이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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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 욕구가 꼭 나쁜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오히려 남사친과 여사친이 갖는 특별한 우정은 여기에서 온다고 믿는다. 리사와 코난은 서로를 너무나 존중한다. 일찍이 서로의 재능을 알아보았고 빛나게 도와주었다. 그리고 각자 자리 잡아가는 것을 옆에서 당연하게 지켜보며, 서로를 자랑스러워할 수 있었다.


일적인 훌륭함을 알아보는 것, 내 생각에 이건 동성보다 이성 사이에서 좀 더 본능적으로 빠른 파악이 가능한 것 같다. 동성끼리의 우정은 오히려 일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우정에 더 가깝다. 같은 성별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공감대가 많기에 좀처럼 일적인 것을 공유할 필요성을 못 느끼기도 한다. 내가 나온 여대는 너무나 안전하고 편안했다. 그러나 리사와 코난처럼 도전의식을 자극하는 이성 간의 우정이 피어날 기회를 많이 놓친 것은 사실이다. 쩝.


리사처럼, 나도 나중에 A를 묘사만으로도 궁금하게 할 기회가 온다면 좋겠다. 그러고 나서 내가 그의 이름을 말했을 때 사람들이 아! 탄성을 내뱉으며 이내 고개를 주억거릴 만큼, A가 품은 뜻들을 모두 이루길 바란다. 그의 말처럼 그도 나도, 사람들에게 나눌 게 많아지는 순간이겠지.


우리는 좋은 사람에 대해 밥을 먹으며 종종 토론했었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의 정의는 ‘나눌 게 많은 사람’이다. A는 좋은 사람이었다. 내게 많은 것을 나눠줬다. 다음에 만날 땐 내가 더 많은 것을 나눠주고 싶다.


아, 그가 나눠준 것 중 하나. 그는 내게 일을 사랑하는 사람의 상징(?)인 맥북을 물려주었는데, 오늘 이 맥북으로 일을 한 첫 번째 날이다. 언제 적응이 되려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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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리사 쿠드로의 연설 영상이다. 꿈은 가끔 신기루 같아 보이지만, 리사 쿠드로가 배우라는 꿈을 꾼 후 걸어온 길을 듣고 있으면… 어쩌면 꿈이 이뤄지는 건 매우 어렵지만 그럼에도 자연스러운, 일종의 ‘섭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룬 다음에야 어이없을 만큼 쉬워 보이는 게 아이러니할 뿐. 그리고 당연히, 꿈을 이루기 위해 제일 중요한 것은 ‘때에 맞는 사람’이다. 모두가 때에 맞는 사수, 때에 맞는 친구, 때에 맞는 인연을 찾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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