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안부인사


 

안녕하세요. 다들 잘 지내고 계신가요? 산불 피해가 심각해 안부를 묻는 말조차 조심스러운 요즘입니다. 하루 빨리 사람들이 각자의 일상을 살아가는 시간이 오면 좋겠습니다. 이번 주는 기고문 대신 저를 소개해보려 합니다. 자기 소개인 만큼 글 뒤에서 사람이 느껴지는 인간미를 녹여내고 싶었는데, 평소처럼 글을 쓰려니 그게 어렵네요. 그래서 오늘은 편지를 쓰듯 글을 써보려 합니다.


제목에 ‘세계관’이라는 단어를 썼는데요, 제법 표현이 거창하죠? 우리는 모두 용도, 초능력자도, 입체기동 장치를 타고 다니는 병사도 없는 같은 지구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마다의 가치관으로 사회를 바라보고, 무언가에 몰두하고, 각자의 소속에서 관계를 형성합니다. 마치 저의 세계에만 존재하는 귀여운 애착 곰돌이가 있는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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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형 에디터의 애착 곰돌이 매돌. 템즈강 강변에서 직접 촬영

 

 

이 친구도 지금의 저를 만든 데에 제법 지분을 차지하고 있어요. 제가 만들어준 나름의 설정도 있답니다. 그렇지만 한 문장만 더 곰돌이에 관해 이야기하면 자기 소개가 아니라 곰돌이 소개가 될 것 같아서 다시 저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제목에 사용된 ‘세계관’은 '나'라는 사람이 어떤 렌즈를 끼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 이야기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지금부터 제가 가진 렌즈는 무엇인지, 그 렌즈는 어떻게 끼게 되었는지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아이스브레이킹: 좋아하는 것들부터 시작할까요?


 

나름 있어보이게 운을 띄웠는데, 막상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최근에 했던 자기소개는 대부분 취업을 위한 것들이었는데, 능력있어 보일 필요가 없는 자기소개를 하려니 어색합니다. 나 자신과 낯을 가리는 기분이에요. 저를 소개하려면 제 자신과 아이스 브레이킹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볍게 좋아하는 것들부터 이야기 해볼게요.


안부인사에서 눈치 챈 분들이 있으려나요. 저는 초등학생 때부터 애니와 만화를 좋아하는 오타쿠였습니다. 특히 부모님 덕분에 공부만 신경 쓰면 되는 학창 시절을 보냈기에 남는 시간에 서울 코믹월드를 방앗간처럼 드나들었습니다. ‘진격의 거인’, ‘은혼’, ‘하이큐를 정말 좋아했던 기억이 아직도 있어요. 특히 ‘진격의 거인’의 ‘리바이’ 병장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요즘은 현생으로 인해 오타쿠 활동은 뜸해졌지만 ‘사카모토 데이즈’라는 만화를 종종 즐겨봅니다. 은퇴하고 가정을 꾸린 킬러 ‘사카모토 타로’가 일상을 지키기 위해 ‘불살생’의 원칙으로 닥쳐오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내용인데, 영화의 한 장면같은 역동적인 액션 컷과 개성있는 캐릭터들이 제법 흥미롭습니다. 킬러들의 이야기지만 그들을 미화하지 않는 등장인물들의 대사도 다른 킬러 만화와 차별화되는 요소인 것 같아요.


성인이 되고 나서 새롭게 좋아하게 된 것은 프로야구입니다. 응원하는 팀은 kt위즈에요. 한 번 쯤은 가족 나들이로 야구를 보러 가자는 아버지를 따라 우연히 수원 kt위즈파크에 갔습니다. 처음 들어보는 응원가도 어색하게 따라 부르고, 맛있는 음식도 먹었어요. 마침 경기도 이겼습니다. 그런데 야구라는 것이 월요일을 제외하고 거의 매일 하잖아요? 자꾸 네이버를 켜서 오늘은 kt가 이겼는지 확인하다보니 어느 새인가 팬이 되어버렸습니다.


어디 가서 이 팀을 좋아한다고 하면 다들 의아해 할 정도로 비인기 팀이지만, 저는 kt의 야구를 정말 좋아합니다. 이 팀은 곱게 이기는 적이 없어요. 항상 초반에 2~3점차로 뒤쳐지다 역전과 끝내기로 승리를 거머쥡니다. 야구는 9회에만 앞서면 된다는 말을 증명하는 팀이죠. 저는 kt가 우승한 다음 해인 2022년부터 팬이 되었는데, 가을 야구도 곱게 가는 법이 없었습니다. 항상 봄에는 중하위권에 머물러 올해는 무리겠거니 마음을 놓으면 여름에 치고 올라와 어떻게든 포스트 시즌에 진출합니다. 2023년에는 꼴찌에서 코리안시리즈까지 올라왔고(이 때에도 플레이오프에서 nc한테 업셋당해서 탈락할 뻔 했는데 마지막 3경기를 리버스 스윕해서 사람 심장을 들었다 놓더군요), 2024년에는 전례없는 5위 타이브레이크와 와일드카드 업셋으로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했습니다.


팬들은 우스갯소리로 마음 편한 날이 없는 야구를 한다고 이야기하는데, 초반에는 부진해도 결국 매 시즌 나름의 성과를 만들어내는 모습이 마치 우리 인생에도 언젠가는 빛나는 순간이 찾아온다고 위로하는 것 같아 종종 힘을 얻고는 합니다. 물론 선수들이 일부러 그렇게 경기를 하지는 않겠죠.


가장 좋아하는 선수는 사이드암 선발투수 고영표입니다. 사이드암 투수 특성 상 공을 던지기 위해 양팔을 넓게 벌려야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학이 날개를 펼치는 것 같아서 이 선수가 경기에 등판하는 날을 유난히 좋아하는 편입니다. kt의 창단 멤버이기도 하고 성실하게 경기력을 개선하는 선수라서 더 응원해요. 등번호가 1번이라는 점도 멋지고요.


핸드드립 커피를 직접 내리는 취미도 있습니다. 하루 일과 중 원두를 갈고 물을 끓여서 커피를 내리는 시간을 가장 좋아합니다. 머리를 비우고 온전히 커피 향을 즐기는 짧은 순간이 저의 하루를 환기해주거든요. 가장 좋아하는 원두 브랜드는 영국의 ‘몬머스(Monmouth)’ 커피인데, 공정무역으로 커피를 수입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원두 가공 방식으로 과일, 꽃 등 블렌드 고유의 향이 살아있어 자주 찾습니다. 한국에서는 구하기 힘들어서 영국에 있을 때 많이 마셔두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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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머스 커피의 라떼. 직접 촬영

 

 

아트인사이트에 올리는 자기소개니까 좋아하는 문화예술도 한 번 이야기해볼까요? 저는 시각예술을 좋아합니다. 학부로 미대를 다니며 창작을 해봤던 경험이 시각 예술에 대한 애정으로 남아있는 것 같아요. 특히 현대 미술을 가장 좋아하는데요, 추가 학기를 다니던 시절 현대미술 수업을 들으며 다양한 작가들을 배웠던 것이 큰 이유인 것 같습니다. 그 분들 한 명 한 명이 너무나도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표현하고 있어서 매 주 수업에 어떤 작가들을 새로 배우게 될지 기대하며 강의실에 들어갔었습니다. 특히 ‘오를랑’이라는 작가는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고 여성의 신체 주권을 논의하기 위해 일종의 퍼포먼스로 성형 수술을 했다는 일화가 충격적이어서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미술관과 갤러리는 그런 작가들을 만날 수 있는 좋은 장소라, 전시를 보러 다니는 취미도 자연스럽게 생겼네요. 그리고 이런 사람들과 함께 일하면 지루할 틈이 없을 것 같다는 이유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문화예술계의 입직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나의 렌즈들은 무엇으로 구성되어있나?


 

저의 렌즈는 문화예술을 포착합니다. 특히 미술관에 가면 줌인과 줌아웃을 반복하며 많은 것들을 하나하나 살펴봅니다. 이유 제 학업과 관련이 깊어요. 20대 초반 도예유리공예를 전공할 적에는 작품을 가장 유심히 봤습니다. 저에게 영감을 주는 것들이니 말이죠. 2학년 때부터 시각디자인 부전공을 시작한 후로는 전시회 포스터와 리플렛 디자인도 유심히 보게 됐습니다. 전시 타이틀의 폰트, 리플렛 종이의 재질과 조판 방식 등 은근히 뜯어볼 것들이 많아요. 졸업을 앞둘 무렵 미학과 현대미술 이론 수업을 듣고부터는 전시 서문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찬찬히 읽다 보면 작품 소개 뿐만 아니라 큐레이터가 이 전시에서 무엇을 강조하고 싶은지, 사람들이 전시를 어떻게 감상하기를 바라는 지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술 경영 석사를 하며 더욱 다양한 렌즈들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전시장에 가면 리플렛에 작은 협업 기관 소개가 있죠? 요즘은 그것마저 흥미롭습니다. 어떤 기관들이 전시에 후원하고, 어떤 지원 사업으로 전시가 운영되는지 살펴보면 시장과 기관이 돌아가는 방식을 파악할 수 있거든요. 평소에 인스타그램과 문화예술 플랫폼으로 산업의 소식들을 자주 찾아보는 편인데, 이렇게 현장에서 산업의 네트워크를 파악하는 것도 나름의 공부가 됩니다. 이 외에도 아트샵, 마케팅, 프로그램, 이니셔티브 등 예술 작품 그 자체 뿐만 아니라 시장과 제도가 관객들과 소통하기 위해 하고 있는 다양한 것들에도 관심을 지니고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저에게 미술관이라는 공간은 작품 말고도 볼 것들이 상당히 많은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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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환경 경영의 일부로 티켓 대신 재활용 가능한 토큰을 사용하는 헤이워드 갤러리. 직접 촬영

 

 

최근에는 아트인사이트 활동 덕분에 사소한 것들도 문화예술과 연결짓는 렌즈를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 매일 저녁 메뉴를 고민하는 주부가 된 것처럼 글감을 사냥하다보니 공원의 사람들, 길거리에서 드로잉을 파는 예술가, 어제 봤던 공연까지도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세상을 좀 더 유심히 관찰하고 있으며, 모두에게는 저마다의 문화가 있다는 것을 체감하는 요즘입니다.


 

 

나에게 문화예술이란?


 

아직 모르는 것들 투성이지만 나름 문화예술을 오목조목 뜯어볼 수 있는 렌즈들이 있네요. 그래서 저는 이 렌즈를 통해 문화예술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을까요? 아트인사이트 지원서에도 있었던 질문인데요, 살짝 소재를 재활용한다는 죄책감이 밀려오지만, 제가 써 온, 앞으로 쓸 기고문들을 통괄하는 내용이라 지원서 밖으로 꺼내보려 합니다.


우선 제가 생각하기에 문화와 예술은 구별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문화는 언어, 의복, 음식, 생활 양식 등 개인 혹은 공동체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모든 것입니다. 가령 kt의 팬과 키움의 팬이 서로 다른 유니폼을 입고 응원가를 부르며 그들만의 팬 문화를 형성하는 것처럼요. 예술도 서로 다른 지역과 공동체에서 생산되고 발전하는 것이기에 문화에 속하는 하나의 카테고리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예술은 서로 다른 배경의 사람들을 이어주기도 합니다. 해외 길거리에서 케이팝 랜덤댄스 챌린지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있듯이요. 국적도, 종교도, 생김새도 다른 사람들이 예술을 매개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저에게 문화예술이란 제 고유의 특수한 개성을 형성하면서도 이것을 매개로 ‘다름’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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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트 모던의 아트샵 구관인형. 지구 반대편에서도 손가락 관절 인형에 장난을 치는 사람들이 있나봅니다. 이것도 문화적 보편성일까요...?. 직접 촬영

 

 

 

정진형 에디터는 어떤 글을 쓰는가?


 

아트인사이트 웹사이트나 소셜 미디어에 접속하면 ‘문화예술은 소통이다’라는 문구를 한 번쯤 보셨을 겁니다. 동감하는 문구입니다. 저는  서로 다른 개성을 지닌 문화예술계의 구성원들이 어떻게 소통을 이루는지 다양한 방식으로 탐색해보고자 합니다. 그것이 지금의 제가 세계를 보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저의 지난 글들은 어떻게 제 세계관과 연결되고 있었을까요? 대전과학예술 비엔날레의 농인 전시 해설에 관한 기고문은 문화예술 이니셔티브에 집중하여 게이트키퍼의 역할을 하는 기관들이 미술관이라는 장소를 매개로 다양한 사람들과 연대하는 양상을 다루고자 했습니다. 런던 중심부 거리의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며 ‘홍대 R&B’를 떠올린 글은 지구 반대편에도 각자의 사정으로 방황하면서도 각자의 목표를 사랑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아스날 구장을 방문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문화예술 산업이 청중 경험을 확장해야하는 이유는 논했던 글은… 사실 고백하자면 프로야구 개막을 앞두고 어떻게든 kt위즈를 언급하겠다는 일념으로 연결고리를 만든 글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이 담겼으니 나름 세계관이 반영된 글이긴 하네요. 하핫


앞으로도 저는 다양한 문화예술을 탐색하며 공감과 이해의 연결고리를 찾는 글을 쓰고자 합니다. 또한, 지난 해 영국에서 석사를 마치고 잠시 런던에서 머물고 있습니다. 언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지는 모르겠지만, 에디터 활동 기간 동안은 이 도시를 산책하며 이방인이 보는 영국과 영국 속 한국 문화를 다뤄볼 예정입니다.


평소 쓰던 기고문보다 글이 훨씬 길어졌네요. 저는 생각보다 자기애가 넘쳐나는 사람인가 봅니다.

 

지금까지 저의 이야기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도, 각자의 세계관을 확장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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