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시립미술관 전경 (2025.01.14 직접 촬영)
지난 12월과 1월, 관심사가 비슷한 고등학교 동창과 함께 비수도권 도시의 미술관 투어를 다녔다. 기존에 자주 접했던 서울 중심의 문화 인프라에서 벗어나 다양한 도시의 미술관들을 방문해보자는 취지였다. 그중 지난 1월에 방문했던 대전시립미술관의 대전과학예술비엔날레는 2012년 <프로젝트 대전>이라는 전 명칭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운영해 온 격년제 예술 프로젝트다. 가장 최근 개최되었던 2024년 행사¹의 주제는 “스핀오프- 너희가 곧 신임을 모르느냐”로 동시대 기술의 발전을 연금술에 빗대어 과학 기술과 인간 사회의 발전과 양립 가능성을 논의했다. 이번 기고문에서는 비엔날레의 배리어 프리(Barrier-free) 실천을 통해 나와 다른 공동체를 이해했던 이야기를 다뤄보려 한다.
대전과학예술비엔날레의 배리어 프리 (Barrier-free)
2024년의 비엔날레는 과학기술이라는 주제와 함께 ‘배리어 프리’를 전면으로 내세워 지속가능성과 포용의 가치가 반영된 큐레이션을 선보였다. 작품을 설명하는 월 라벨을 재활용 골판지로 제작하여 2023년 아르코에서 공표한 ‘지속 가능한 미술관 운영 매뉴얼’이 제시한 친환경 실천을 이행하고, 대전교육과학연구원 교육연구지원부와의 협업으로 작성한 ‘쉬운 전시말 프로젝트’를 통해 미술관의 작품 설명은 난해하다는 기존의 인식을 개선하려는 시도가 돋보였다. 쉬운 말 서문과 함께 큐레이터들의 어휘로 작성된 원문을 볼 수 있는 QR 코드가 벽면에 설치된 점도 인상적이었다.
'쉬운 전시말 프로젝트 설명' (2025.1.14 직접 촬영)
그러나 앞서 소개한 친환경 골판지와 쉬운 전시말 프로젝트와 달리, 나의 머릿속에 오래 맴돌며 이해되지 않았던 큐레이션도 있었다. 그것은 전시 서문 옆에 설치된 수어 해설 영상이었다. 말 그대로 문자로 적혀 있는 전시 서문을 수어 통역사가 수어로 설명하는 영상이 벽면에 설치된 것이다. 당시 나의 인식에서, 수어라는 것은 장애로 인해 음성 언어 구사에 어려움을 겪는 농인들이 사용하는 언어였다. 따라서 시각 기능에 문제가 없는 농인들은 전시 서문을 읽는 것에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별도의 수어 통역 영상을 ‘배리어 프리’로 제시하는 미술관의 의도를 쉽사리 파악할 수 없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이는 지극히 음성언어를 사용하는 청인의 관점에서 떠올린 의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농문화: 내가 인지하지 못했던 언어 공동체
한국농아인협회에 따르면, 수어는 단순히 음성 언어 구사가 어려운 이들의 대체 소통 수단이 아닌 청인들의 한국어와 엄연히 구별되는 별개의 제 1언어다. 시청각 기관을 동시에 사용하는 청인들과 제한된 청각 기관으로 비음성 언어를 먼저 익히는 농인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습득하는 과정은 다르다. 특히, 선천적 장애 여부와 언어 교육 경험에 따라 글로 적힌 '한국어'를 이해하고 구사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는 농인들이 있다고 한다.² 따라서 농인들은 '수어'라는 언어 공동체를 기반으로 문자로 된 주민등록상의 이름과 다른 별도의 수어 이름을 보유하고 있으며, 청인들이 사용하는 손동작과 구별되는 그들만의 의사소통 방식을 지니는 등 그들만의 '농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결국, 비엔날레의 수어 영상은 미술관의 포용을 보여주는 상징적 실천일 뿐만 아니라, 비엔날레를 방문하는 농인들의 접근성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전시 기획의 일부인 것이다.
대전과학예술비엔날레의 전시 서문 수어 통역 영상 (2025.01.14 직접 촬영)
예술로 ‘다름’을 이해한다는 것
대전과학예술비엔날레의 배리어 프리 프로그램은 미술관을 방문하는 다양한 청중들의 접근성을 개선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존재를 가시적으로 내세워 ‘다름’을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비엔날레의 수어 통역 영상을 보기 전까지, 감각 기관의 기능 여부가 언어를 습득하고 인식하는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지 못했으며, ’농문화’라는 단어조차 접해보지 않았다. 막연히 농인들이 겪는 문제는 청각과 관련된 부분이니 문장을 읽고 쓰는 것에는 애로사항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그들은 ‘수어’라는 언어 정체성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해왔으며,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 또한 나와 달랐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며 제법 타인의 입장을 잘 이해해 온 편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내가 해왔던 어떠한 이해는 나의 무지를 배제하고, 나의 시야 안에서만 이뤄왔던 합리화는 아니었는지 돌이켜 본다.
작품과 함께 전시장의 구석구석을 감상하며 호기심이 피어나는 순간들이 있다. 이번에는 이를 계기로 내 옆에서 작품을 보고 있는 익명의 방문객이 농인이거나, 혹은 그 외의 나와는 다른 정체성을 지닌 누군가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앞으로도 호기심을 바탕으로 잠재적 무지를 알아가며 새롭게 마주할 ‘다름’을 하나씩 받아들이고자 한다. 예술이 만들어 내는 나와 타인의 대화 속에서.
예술의 끝에는 미식이 있다
대전과학예술비엔날레는 지난 2월 2일까지 진행된 전시로 현재는 운영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대전시립미술관의 수장고에는 약 20년 만에 복원된 미디어 아트의 거장 백남준의 <프랙탈거북선> (1993)이 있으며, 오는 3월 25일 네덜란드 크륄러 밀러 미술관의 소장품으로 구성된 반 고흐 특별전을 앞두고 있어 방문 시 유의미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약 30분가량 버스를 타고 대전역으로 이동하면 다양한 칼국수 맛집과 성심당을 방문할 수 있다. 평소 대전에 방문할 기회가 적다면 반 고흐 특별전을 감상한 후 칼국수와 빵을 즐기는 근사한 당일치기 계획을 세워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¹ 대전과학예술비엔날레의 개최 기간은 2024년 10월 25일~2025년 2월 2일이다.
² 반대로 후천적 장애를 얻은 경우 혹은 개인의 언어 학습 경험에 따라 구화(청인들이 사용하는 한국어)에 능숙한 농인도 있다. 각자의 소통방식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