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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연극의 제목


 

나는 우스갯소리로 우리집을 경상북도 콜렉터(Collecter)라고 부를 정도로, 대구와 포항을 이동해가면서 지냈다. 20살 이후로 서울에서 살 때도 우리 집은 또다시 구미, 김천을 거쳐 다시 대구로 돌아왔고, 그렇게 긴 시간동안 거주지 이동을 많이 겪었다. 부모님의 직장 때문에 생긴 우연의 결과이긴 했지만, 하필 많고 많은 도시 중에서 내가 살았던 도시 전부가 TK 쪽의 열렬한 지지를 받은 대통령들의 고향이었다는 점이 놀랍긴 했다. 이 연극의 제목을 마주했을 땐, 경상도에서 지낸 직접적인 경험이 없어도 이 연극의 제목을 듣는 모든 관객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도시를 떠올릴 것이다. 더군다나 나는 구미에서 오랜 시간을 산 것도 아니다. 즉, 본가에 가서 머무른 물리적 거주 시간으로 따지면 나는 '애매한' 구미 사람이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장이나 교회 등의 큰 사회집단을 방문하게 될 때 느껴지는 특정 정치색과 관련된 그 특유의 바이브는 비단 구미만이 아닌 경상도, 그중에서도 경상북도 내륙 땅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분위기일 것이다. 또한 시장처럼 규모가 큰 곳에 가지 않아도 명절에 여러 친척이 모여 얘기를 할 때면, 박정희에 대한 논쟁이 집안에서 벌어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릴 때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정치적 경향을 제외하고 보더라도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하는 생각이 정치적 경향을 제외한 채 주장될 수 있는 것인가 의구심이 들긴 하지만) 그들은 박정희에 대해 일종의 숭배에 가까운 신앙심을 가지고 있더라는 것이다.

 

여기서 초점을 맞추고 집중해보려고 하는 것은, 독재자로 평가되는 박정희에 대한 숭배심을 가진 그들이 '나의' 혹은 '나와 관련된' 사람들이 될 때의 변화되는 상황이다. TV 뉴스나 매체 속 극우파의 모습만 두고 보았을 땐 나와는 관련이 없는 저쪽 사람이라고 편히 치워둘 수 있을지 몰라도, 나와 연고가 있는 혹은 내 가족 중 한 사람이 그렇다고 한다면 그때 나에게는 혼란이라는 감정이 일어날 것이다. 그 사람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연극의 후반부에서도 한 배우는 매일 박정희 사진을 앞에 두고 문전 인사를 하는 작은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2025년 한국은 (그렇다고 해서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나) 두 개의 진영을 기반으로 하여 '별도의' 두 국가라고 할 정도로 이념의 분열이 극렬화된 상황에 놓여 있다. 이때 연극 구미식은 단절되고 갑작스러운 장면 전환과 연출을 통해 마치 현 상황을 반영하는 듯한 방식을 취한다.

 

 

[극단 돌파구] 구미식_포스터(캐스팅변경).jpg

 

 

 

행복한 동상이 비추는 행복한 왕자의 일그러진 모습


 

연극은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동물원]과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를 이중으로 비틀어, 극의 화자는 '톰 윌리엄스'로, 행복한 왕자는 새마을운동기념관에 있는 가상의 국가 지도자에 빗대어 표현되는 '행복한 동상'으로 변형되어 연극은 전개된다. 행복한 동상은 톰에게 자기 몸에 붙어 있는 여러 보석을 뜯어서 그것이 필요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라고 말한다. 톰은 그렇게 그들에게 보석을 나눠주는 [행복한 왕자] 속 제비가 된다. 톰이 제비의 역할을 할 때마다 행복한 동상은 톰에게 마약이 있는 장소를 은연중에 알려준다.

 

극을 관람할 당시에는, [행복한 왕자]의 서사와 이 극에서 직설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박정희에 대한 단상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기 어려웠다. 그러나 극에 대해서 차차 고민해볼수록, 연극 속 행복한 동상에서 드러나지는 독재자의 표상은 일그러진 형태로나마 [행복한 왕자] 동화 속 행복한 왕자의 상이 역설적으로 강조되도록 비춰주는 장치의 역할이 된다는 생각이 떠오르게 되었다. 즉, 가상의 도시에 세워진 행복한 동상의 모습에서 드러나는 지도자의 모습은, 이상적인 형태의 국가 지도자에 대한 상에 대해 긍정적(positive)으로 기술하진 못해도 되어서는 안 되는 지도자의 모습을 부정적(negative)으로 비추고 있다는 점이다.

 

[행복한 왕자] 동화에서 왕자는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자기 몸에 붙어 있는 보석을 제비를 통해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마지막으로 자신을 밝혀주던 금붙이마저 떼어서 주었을 때 그 동상은 녹아 없어지고 제비는 얼어 죽게 된다. 이후 신이 천사를 세상에 보내 그곳에서 가장 소중한 두 가지를 가져오라고 했을 때, 천사는 용광로에 들어갔지만 녹지 않은 왕자의 납 심장과 죽은 제비를 신에게 가져온다.

 

그러나 동화 속 행복한 왕자와 달리, 이 연극에서 행복한 동상은 동화 속 왕자처럼 선량한 인물로 다뤄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연극 속에서 그 동상은 필요한 사람들에게 자신이 기꺼이 희생하였기 때문에(자신의 몸에 붙은 보석을 떼어내어 주었다는 점) 자신을 마치 호혜로운 지도자인 것처럼 과시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그 보석이 필요하다'라는 사실과 '필요한 누군가에게 보석을 주었다'라는 사실들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정권의 정당성을 배타적으로 그리고 독단적으로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상 (즉, 연극의 흐름을 따르면) 박정희는 그 보석을 명분 삼아, 그 보석이 필요한 누군가가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고 필요한 누군가에게 보석을 줄 수 있으려면(즉,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의 국민이 행복하다고 적어도 본인이 믿으려면) 국가는 안보와 경제 발전이라는 두 이념이 반드시 유지되고 지켜져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설파한다. 좀 더 정치적인 말로 표현하자면, '한민족의 존립 위기가 놓인 현 시국'이야말로 변하지 않는 사실(Fact)이기 때문에, 이것에서 오는 위기를 정부가 극복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그 이념에 반대하는 자들은 모두 척결되어야 한다는 위험한 결론이 도출되어버린다. 이러한 프로파간다(선전/선동 등에 의해 주입된 사고방식)를 내재적으로 소화한 자들은 기꺼이 그것의 성실한 전파자들이 되고, 연극에서는 그 전파자 중 한 사람으로 톰이 다니던 학교의 교감 선생님을 등장시킨다. 그 교감 선생님은 "말 안 듣는 애들은 때려서라도 사람 구실할 수 있도록 소위 '악바리'로 만들어냈다"는 이야기를 마치 무용담처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그 결론이 공고화되고 강화될수록 국가 지도자 동상이 세워져 있는 공원은 교조적으로 성역화되기에 이른다. 성역화가 시작될 당시만 해도 밖과의 분명한 경계 설정을 통해 밖으로부터 내 영역에 해당하는 '안'을 구분했지만, 그 동상이 점차 신격화되어 그것이 끼치는 영향이 커질수록 오직 '안'만이 존재할 뿐 더 이상의 밖은 존재할 수조차 없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한 철학자의 말을 빌려와서 설명해보자면, 마치 코뿔소의 외피가 몸에 유착된 채 벗겨지지 않는 것처럼 생존에 위협이 되는 모든 계기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생존을 위한 장치를 온몸에 두르는데 혈안이 되어 그 장치에 사로잡혀 눈이 먼 상태에 놓인 비유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보석을 명분 삼아 자신의 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행복한 동상에게 가장 좋은 땔감은 바로 '불안'이다. 그러나 밖을 모두 삼킨 내부의 '안'이라는 영역은 이제 스스로에게조차도 불안해하기 시작한다. 불안이라는 것이 자신에게 내재화되었기 때문이다.

 

 

 

이 글을 마치며,


 

이 극을 관람한 다음날, 점심 식사를 하러 혜화의 어느 식당을 가던 중 근처의 모 대학교에서 공교롭게도 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찬성과 반대를 외치는 시위가 있었다. 이 연극의 초고는 2022년에 이미 완성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 연극은 마치 숙고되지 않은 과거는 언제든지 반복될 수 있다는 메세지로 한국의 혼란스러운 현재 상황을 예언하듯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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