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을 현대의 입맛에 잘 맞게 올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사실 관객으로서나 창작자으로서나, 우선 고전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안전한 방법일 것이다. 고전은 이미 '고전'이라는 점에서 이야기의 완결성은 충분히 확보하고 있다. 오히려 어설픈 변형이 들어가면, 오묘한 모나리자의 얼굴에 눈썹을 그려 넣는 것만큼이나 이질적일 뿐만 아니라, 작품의 전체적인 의미를 왜곡할 가능성이 있다. 생각해 보라, '눈썹 있는 모나리자'는 현대 예술처럼 이미 '모나리자'의 이름만 빌린 작품이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고전을 온전히 잘 보존하여 올리는 작품들에 대해서 호평하는 편이다. 애당초 기본적으로 연극은 실현되는 그 순간마저도 끝없이 변화하는 역동적이고 순간적인 현장 예술이다. 그런 현장 예술이기에,사실 원작을 그대로 옮긴다고 해서 변화가 없는 것도 아니다. 내용이 변화하지 않아도, 연극을 둘러싼 사회 현실과 그곳에 참여한 배우와 관객들의 존재감이 작품의 내용을 새롭게 재해석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작품과 연극의 '실현' 사이에 있는 시간과 공간을 무시하여 변형하지 않는 것도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작품의 재현에 초점을 맞춰 의미를 수동적으로 재해석하게 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변형하는 것도 예술가의 의무 중 하나가 아닌가?
나는 고전을 적극적으로 재해석하고자 하는 시도를 아주 용감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솔직히 관객 입장에서는 재해석한 고전에 대한 애정이 크면 클수록 실망할 준비도 한다. '재해석'을 시도하는 순간, 이미 관객이 갖고가는 고전의 내용에 대한 기대는 꺾일 수밖에 없다. 애당초 너무 많은 변형이 이루어지면, 타이틀만 고전이고 원작 작품으로 내는 것이 나은 경우도 생긴다.
재해석을 할 때는 아래와 같은 원칙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원작의 내용을 현대의 감각에 맞게 적절하게 변형할 것, 단 원작의 핵심 내용을 변형하지는 않을 것. 변형이 작품의 메시지를 가릴 만큼 두드러지지 않을 것. 앞서 말한 모나리자의 예시처럼, 단순히 이름만 가져온 원작 작품이 되지 않을 것.
그리고 이 복잡한 '재현'의 과정에 오랜 시간 매달리고 있는 극장이 있다. 바로 산울림 소극장이다. 산울림 소극장은 고전을 다양한 방식으로 재해석하여 올리는 것을 시도해 왔다. 이미 '고도를 기다리며'로 유명한 이 소극장은 고전을 잘 보존하여 재현한 작품도 많지만, 가끔은 고전을 창의적으로 재해석한, 정말 보석 같은 작품이 올라오기도 한다.
당장 내가 떠오르는 것만 해도, '헤밍웨이', '쇼팽, 블루노트', '빨간 머리 안'이 있다. 각각 다른 방식으로 고전을 재현한 작품이고, 작가의 고전 해석 정도도 다르지만, 앞서 언급한 작품들은 고전의 가치를 훌륭하게 재현하고, 계승하고 있다고 말해도 손색이 없다.
그리고 이번의 소중한 기회로, 연극 '플레이위드 햄릿'이 그런 작품 중 하나로 추가되었다.
그렇다면 연극 '플레이위드 햄릿'은 왜 훌륭한 재현 작품인가?
나는 기본적으로 이 작품의 '수월성'이 가장 두드러진다고 본다. 이 '수월성'의 의미는, 고전의 메시지를 잘 전달한다는 의미의 수월성이다. 나는 이 '수월성'이 첫 번째, 전체 내용 구성을 통해, 두번째, 다양한 연출을 통해 원작의 재현을 보조한다고 생각한다.
수월성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고전 '햄릿'에 대한 간략한 이해가 필요하다. '햄릿'은 어느 날, 덴마크의 왕자 햄릿 앞에 얼마 전에 죽은 왕의 유령이 나타나면서 시작한다. 유령은 햄릿에게 새로운 왕, 햄릿의 삼촌을 죽여 자신의 살인을 복수하라고 말한다. 햄릿은 미친 척하고, 삶과 죽음을 숙고하며 복수를 추구한다. 그의 삼촌은 햄릿에게 위협을 느끼고 햄릿을 죽이려는 계략을 꾸민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결투로 끝나는데, 그동안 왕, 여왕, 햄릿의 상대, 그리고 햄릿 자신이 모두 죽는다.
햄릿은 진실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나타난 아버지의 유령에 쫓기면서, 위태로운 자신의 입지로 편집적인 태도를 취한다. 햄릿이라는 인물 자체도 적극적인 영웅적 인물이라기보다는, 외부 사건에 휘달리는 감성적이고 심약한 성격을 가진 인물로 묘사된다.
이러한 전반적인 내용 설명에서 유추할 수 있듯, 이 작품은 장대한 독백 위주의 무거운 작품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플레이위드 햄릿'은 햄릿의 자아를 여러 명으로 쪼개고, 다양한 층위의 감정을 묘사함으로써 작품의 분위기를 환기한다. 얽히고 얽힌 목소리가 각자 다른 배우의 연기로 엮이니, 침울한 햄릿보다는 격정적으로 사고하는 젊은 청년 햄릿의 모습이 도드라진다. 작품의 이런 묘사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햄릿의 이미지-삶의 문제에 침울하게 고뇌하는 청년-의 다른 면모를 부각하는 것 같아 아주 흥미로웠다. 햄릿이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이었다면, 정말로 그랬을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작품에서 흔히 말할 수 있는 '역할'을 쪼개진 햄릿 각각에게 뚜렷이 부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특별히 외부 인물을 연기하는 부분들이나, 이성적이거나 감성적으로 연기하는 부분이 있지만, 이들은 모두 작중 주인공인 햄릿의 기본적인 감정 상태와 층위에 맞게 행동한다. 이들의 목소리가 파편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이 모든 것은 햄릿 안에서 재현된 것'이라는 통일된 느낌을 준다.
결과적으로, '햄릿의 고뇌'라는 작품의 주요 컨셉과 '여러 명의 햄릿'이 보여주는 재해석은 아주 잘 맞아떨어질 뿐만 아니라, 작품을 무겁게하지 않으면서도 햄릿이라는 인물에 입체적인 캐릭터성을 부여한다. 작품에서 나오는 대사와 상황도 원작과 비교하면 좀 더 상황이 의뭉스럽게 수정한 부분이 있는데, 이것도 오히려 새로 변형된 햄릿과 잘 맞아떨어져 고전 햄릿의 맛과 뒤지지 않는 재미를 보장한다.
사실 이러한 변형과 비교해서는 소소한 변형이지만, 연출도 무시할 수 없다. 정신의 부분처럼 차려진 탁자, 아버지의 이야기가 들리는 전화, 흰 천을 덮은 소파, 지팡이, 모자 등은 작품의 시대상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각 '은밀한 목소리', '관', '삼촌의 두려운 권위', '가녀린 오필리어'로 빠르게 연결된다. 개인적으로는 각 사물에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영리하게 잘 사용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다섯 명의 햄릿이 주인공이 된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부산스러움을 내포하고 있지만, 이러한 미세한 연출의 센스 덕분에 자연스럽게 내용을 전개한다.
이 부분에서는 '플레이위드'라는 이름에서 기대했던 것처럼, 음악적 연출이 좀 더 들어 갈줄 알았다. 하지만 음악적 연출이 두드러지는 것은 마지막 결투 부분뿐이었다. 심장 박동을 연상하게 하는 타악기 특유의리듬감과 묘한 고양감은 피날레를 장식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연출은 기본적으로 어떤 음악적 연출을 의도했다기 보다는, 앞서 말한 '센스있는 연출' 중 하나지 않았을까 싶다. 앞선 사물들이 효과적으로 서사의 수월성을 보조했던 것처럼, 젬베도 어떤 특별한 장치라기보다는 작품을 부드럽게 연결하는 기능을 했다.
종합하면, 내용과 걸맞은 내용 변형과, 센스있는 연출. 이 두 가지는 놀라울 정도로 '햄릿'의 수월성을 높였다. 연극 '플레이위드 햄릿'은 과감한 변형도 작품의 메시지를 온전히 보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줬다. 작품을 보는 내내 햄릿을 이해하기엔 어린 조카를 데리고 와서, 셰익스피어의 위대한 서사창작 능력을 보여주기 딱 좋다는 생각했다. 조카뿐이랴, 고전의 매력이 궁금하지만 차마 시작하기에는 부담스러워하는 주변 성인들에게도 모두 추천할 만한 작품이다.
글을 마무리하는 단계에 이르니, 이 작품에 대해서는 너무 많은 칭찬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고전의 변형이라는 어려운 작업을 너끈히 해낸 이런 소중한 작품을 원 없이 칭찬하지 않으면, 어떤 작품을 칭찬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