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not how you play the game, it’s how the game plays you. (그것은 당신이 게임을 하는 방식이 아니라, 게임이 당신을 플레이하는 방식이다.)”
<스파이 게임> (2001), 연출: 토니 스콧, 출연: 로버트 레드포드, 브래드 피트 외
<스파이 게임 SPY GAME>(2001)은 개봉한 지 20여 년이 훌쩍 넘은 오래된 액션 영화이다. 다양성이 트렌드인 시대, 백인 남성 주인공 두 명이 등장하는 버디 무비는 이제 너무 진부하지 않은가? 혹자는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이제 웬만한 스파이 액션물은 “클리셰 Cliché”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스파이 게임>에는 이러한 익숙한 맛의 전형성을 뛰어넘는 그 자체의 낭만과 특유의 유머가 있다. 영화는 모든 걸 때려 부술 듯 화려하게 펼쳐내는 액션이 아니라, 오직 사무실 전화 한 통의 끝을 향해 달려간다. 모든 게임의 시작과 끝이 되는 가장 사소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 쿨함만으로도 이 영화를 볼 이유는 충분하다. 젊은 시절의 브래드 피트와 로버트 레드포드의 멋진 모습은 그저 덤이다.
영화는 30여년간의 근무를 마치고 은퇴를 단 하루 앞둔 CIA 요원 ‘네이선 뮈어 (로버트 레드포드)’에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네이선이 손수 키워낸 후배 요원 ‘톰 비숍 (브래드 피트)’이 중국의 수차오 교도소에서 작전 중 단독행동을 하다가 붙잡혔다는 것. 이에 네이선은 톰의 사형까지 남은 단 24시간, 다음주에 있을 미-중 정상회담을 앞두고 문제를 키우고 싶지 않아 톰을 버리려는 CIA 측에서 동료들 몰래 톰을 구하기 위한 작전을 시작한다.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 네이선을 단 한 문장으로 설명하자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30여년간 현장에서 쌓은 실전 경험과 기지, 그리고 편안하게 내보이는 부드러운 미소는 그가 어떻게 동료들의 눈을 완벽하게 속이고 단독적으로 톰을 구해낼 수 있었는지 단박에 납득하게 한다. 끝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여느 스파이 영화들과 달리, 감상자들은 정말 그저 게임을 하듯 자신의 방식대로 판을 움직이는 네이선을 ‘신뢰할 수 있는 주인공’으로 받아들이고 그저 흥미진진하게 그의 게임을 관전하게 되는 것이다.
“과학기술이 날이 갈수록 발전하는 건 상관없어.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자네에게 필요한 건 껌과 주머니칼과 미소라네. 건물과 방 상황에 따라 순간 포착이 뛰어나야 해.”
톰을 구출하기 위한 네이선의 ‘스파이 게임’과 함께 그들의 첫 만남부터 현재까지의 이야기도 함께 진행된다. 네이선은 베트남 다낭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톰의 패기와 뛰어난 능력을 단숨에 알아보고 그를 키워 내기로 결심한다. 네이선의 직속 교육과 CIA 요원 과정을 거치며 점점 뛰어난 스파이가 되어가던 톰은 베를린과 베이루트 작전을 거치며 사소한 지점에서 네이선과 충돌하게 된다.
- 이건 게임이 아니에요.
- 게임, 바로 그거야. 물론 애들 장난도 아니지. 완전 차원이 다른 게임이야. 심각하고 위험하며 절대 질 수 없는 게임이지. (…) 그 규칙이 죽을뻔한 자네를 구했다는 걸 잊지 마. 우린 자네가 안전지대를 벗어나도 구하러 가지 않아.
베를린에서의 ‘카스카트 작전’을 마치고, 자신의 정보원을 네이선의 명령대로 내치고 돌아온 톰은 네이선에게 사람을 체스 말과 같은 물건처럼 보길 그만두라고 이야기 한다. 아주 숙련된 스파이로서 사람을 쉽게 믿지 않고 철저히 자신의 규칙에 따라 행동하던 네이선과 달리, 그는 라포르 rapport를 형성한 사람과 관계를 단칼에 끊어내거나 그들이 죽는 것을 힘들어 했던 것. 이에 네이선은 바람이 세차게 불던 어느 날, 건물 옥상의 회동에서 그에게 냉정한 이야기를 건넨다.
“어렸을 적에 방학이면 삼촌 농장에서 보냈는데, 매일 함께 일하던 경작용 말이 있었죠. 삼촌은 그 말을 정말 아끼셨어요. 하루는 말이 다리를 절면서 왔죠. 간신히 서있더군요. 남들이 대신 죽여주겠다고 하니, 삼촌이 뭐라고 했는지 아나? / 왜 내 말을 남이 죽이게 두지?”
냉혹한 이해관계와 정치적, 국제적 문제들이 복잡하게 꼬인 이 게임은 결국 사소한 감정으로부터 시작되어 사소한 감정으로 끝맺어진다. 베이루트 작전 중 만나 사랑하게 되었던 엘리자베스 해들리를 구하기 위해 수차오 교도소로 가는 단독행동을 저질렀던 톰을 구하기 위해 네이선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오직 톰을 아끼는 마음으로 단독작전을 벌인다.
네이선은 오직 톰을 살리기 위해 은퇴 후 사려고 마음 먹었던 바하마의 집을 살 전재산까지 모두 처분하고, 후일 큰 문제가 될지 모를 단독 작전을 세워 시행한다. 안온한 은퇴 후의 삶과 톰을 살리는 것. 둘의 무게를 저울질 해보았을 때, 어쩌면 누군가는 그의 무모한 선택을 인생이란 게임의 패배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저 신분증을 반납하고 그날 오후 건물을 나서기만 했으면 됐을 일이다.
하지만 네이선은 은퇴 전 마지막 게임을 펼쳐 안전지대 밖으로 떨어진 자신의 말을 위해, 모든 규칙을 어기면서 멋지게 게임에서 이긴다. “실내에서 담배 피우면 안되는 거 아시죠?”라고 묻는 직원에게 “때론 규칙을 어기는 것이 재밌지.”라고 이야기했던 복선을 깔끔하게 회수하며.
“오늘 밤 계획대로 갈 거야. 저녁 외식 출동이다. (Operation Dinner out is a go.)”
베이루트에서 어느 날, 톰이 아주 힘들었던 ‘저녁 외식 작전’이었다며 그에게 생일 선물을 건넸던 작전명을 사용해 네이선은 톰 비숍과 엘리자베스 해들리를 모두 구출하는 데 성공한다. 그렇게 <스파이 게임>은 귀대하는 헬기에서 작전명을 듣고 네이선임을 알아차리는 톰의 묘한 표정을 끝으로, 얽히고 설킨 게임 속 인간의 과소평가된 애정이란 무엇인가를 가장 쿨한 방식으로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