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oting. 각기 다른 목적으로 만들어진 쇳덩이의 트리거가 당겨지는 순간 그 반대편에 놓인 누군가의 시간은 그대로 멈추어 박제된다. 돌아볼 수 있는 시간과 돌아볼 수 없는 사람. 지금도 우리가 모르는 저 건너편에서는 귀를 울리는 파열음이 여기저기서 솟아나고 있다.
퓰리처상은 그런 시간들 속에서 우리가 특히 잊지 말아야 할 순간들을 기념한다. 각계, 각층, 각지를 가리지 않은 기자들이 그 속으로 파고들어 남겨온 단 하나의 사진이 온 지구의 시선을 바꾸어왔다. 그 변화를 위해 끊임없이 기자들은 다시 현장으로 뛰어들고, 셔터를 누른다.
‘퓰리처상 사진전’은 그 기록의 집합전이다. 단순히 다수의 미적 기준에 부합한 사진이 아니라 그 누구도 잊어선 안 될 이야기들이 그곳에 모여있었다. 차례차례 이어지는 네모난 앵글 속에는 누군가가 대부분 슬프게, 간혹 기쁘게 서 있었다. 나는 그들의 얼굴과 그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바라보며 맥락을 짚어나갔다.
시작부터 판자를 덧댄 듯한 공간 연출이 안정감보다는 묘한 긴장감을 조성했고, 천천히 이어진 시선은 곧 수많은 이야기를 담아냈다. 키가 달라도 서로에게 경의를 보내는 두 인물과 전설적인 야구선수의 마지막 뒷모습, 그의 얼굴보다 오래 기억될 그의 등번호와 많은 피 위에 세워진 국기까지.
차마 전후 사정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광경들이 이어졌다. 그들보다 미래에 서서 단순히 그 장면을 바라보는 관전자의 입장으로서는 여러 양가감정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저 옆에 적힌 글자를 읽으며 공감하고, 가끔 감동할 뿐이었다.
예상했듯이 뒤이어 나타나는 이야기들은 감동적이지만은 않았다. 이어지는 갈등과 폭력, 빈곤과 질병으로 몰아치는 비극을 마주해야 했다. 그동안 마음 깊숙한 곳에서 솟아나는 건 단순한 슬픔이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분노와 자조였다. 묘한 박탈감, 무력감, 그리고 알량한 도덕적 의식이 끊임없이 충돌했다. 그 마음은 이렇게나 불공평하고 부도덕한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영웅심리도 아니었다. 그저 같은 지구촌 시민으로서, 인류라는 공통점 안에서 갖는 자연스러운 감정이었다.
더불어 이 사진을 찍은 기자들이 이 사진 한 장, 필름 한 장을 바라볼 사람들에게서 어떤 반응을 기대했을지 알 것 같아 드는 부채감이 있었다. 누구도 나를 그 장면의 책임자로 지목하지 않았는데도 그저 목격했기 때문에 드는 죄책감 또한 있었다. 그러나 그 감정에 대응하는 해결책을 내놓을 수는 없었다. 그러는 중에도 발걸음은 끊임없이 다음 장면을 향해 간다. 이러한 와중에도 우리의 시간이 흐르듯이, 말 한마디 없이 수많은 이야기를 전해줄 다음 사진에게로.
르완다에서 포착된 절망의 순간과 러시아에서 포착된 즐거움을 나란히 보았을 땐 괴롭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모든 것을 관조하기도 했다. 솔직히 그건 특수한 경우도 아니었으며, 지극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일상이자 현실이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행복과 불행은 반복되며, 누군가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반대편 너머의 누군가는 웃는다.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그걸 동시에 보는 사람은 조금 복잡해진다.
그렇게 필름은 이어지고 이어져서 내가 실제로 겪어보기도 했던 한순간을 지났다. Covid-19라는 무색무취 절망의 시기. 그 속에서 피어나는 온기. 그리고 반복되는 폭탄과 폐허, 그 모든 필름을 지나고 난 뒤에야 바닥의 화살표는 나를 다시 나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출구로 이끌었다.
고요하고 숭고한 공간을 빠져나와 시끌벅적한 일상을 마주하니 내심 묘한 안도감이 돌았다. 수많은 과거의 절망과 희망을 목도했지만 결국 지금의 나는 사진 속 그곳이 아니라 당장은 평화로운 이곳에 발을 디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이곳도 역사의 순간이 없는 그런 단조로운 공간인가. 그건 아니었다. 내가 예외일 리 없었다. 전시장 내부에서 보았듯이 한국은 전쟁이 끝나지 않은 휴전 국가다. 더불어 바로 최근에도 불안한 마음을 몇 번이고 가지며 살아가지 않았던가. 그걸 인지하자 작은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았고, 의외의 의욕이 생겨나기도 했다. 더더욱 우리 모두를 위한 변화를 느끼고 싶다는 그런 의욕이.
그 순간 내가 감상한 이 전시가 단순한 사진전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마지막까지 ‘취급 주의’가 붙은 나무상자를 보여주면서까지 이 전시가 관람객에게 말하고자 했던 것을 되새겨 보았다. 이 사진들은 역사의 단면일 뿐이지만 과연 이 장면들을 굳이 반복하고 싶은가? 이 얼굴을, 순간을 목격하고 싶은가. 기필코 목격하게 되는 날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구체적인 대처법이 떠오른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해야겠다!’는 명확한 결심이 선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한 가지 명확한 것은 ‘이보다는 더 나은 세상을 보고 싶다’는 희망 하나였다. 내가 목격한 수많은 과거가 나에게 남긴 것은 그런 것들이었다.
자연스럽게 이 장면들이 지나간 후에는 그 장면을 나에게 전해준 이들에 대한 생각이 남았다. 죽음을 앞에 두고 책임과 사명으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 그 행동력은 언제나 대단한 경외감을 느끼게 한다. 그 행위의 목적이 더 나은 공동사회라는 공익에 있다면, 경외감은 더욱 커진다. 그렇게 남겨진 그들의 유산 앞에서 나는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할까. 요구하는 이는 없지만 그래야만 할 것 같은 압박에 사로잡힌다.
나름대로 ‘옳다’고 생각되는 일들을 행하며 살아왔다. 누군가를 괴롭게 만드는 것이 있다면 같이 화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적극적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는 정도로, 딱 그렇게 나름대로 윤리를 지키며 살아온 나에게는 이들의 행보가 지극히 대단해 보였다.
특히 렌즈로 세상을 포착하는 이들이기에 그랬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뷰파인더에 담긴 그 장면은 그를 둘러싼 모든 것들로부터 분리되어 납작한 평면으로 남는다. 그 장면을 왜곡하지 않고 세상에 전달하는 것은 저널리스트의 태도에 달려있다. 그 상황을 제일 잘 아는 건 그 당사자를 제외하면 그 옆에서 사진을 찍었던 사람일 테니까. 그렇지 않은 언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보아왔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감정으로 뒤섞인 마음을 가라앉히는 건 이 모든 역사 위에 남겨질 것이 승자의 기록이라는 사실이다. 결국 언제나 그랬듯이 승기를 손에 쥔 사람의 마이크가 더 큰 법이다. 근데 내가 보아온 기록은 역사가 아닌가. 이 역사는 승자의 기록인가. 승자가 아니라면 패자인가. 어쩌면 승자의 발 아래에 깔린 잔해인가.
우리는 언제까지 승자의 기록을 반복해야 할까. 아마 인간이 독립적인 사고를 하며 꾸준히 엮이고 부딪치고, 그렇게 대립과 갈등이 존재하는 한 영원할 것이다. 그렇기에 사진기를 든 이들은 그 이면에 가려진 그림자를 기록해 꾸준히 양지로 끌어올린다. 이 계속되는 갈등 속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같은 역사의 반복 속에서 무엇을 더 가져가야 할지 잊지 말라고.
이들은 승자의 기록이 아니라 기적의 기록, 희망의 기록을 남기고자 했다. 그곳에는 인간이라면, 우리가 사람이라면 돌아봐야 할 것들이 꽤나 많이 있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알지 못했을 세계의 숭고함을 우리는 오늘도 깨달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