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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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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Alamy Stock Photo

   

   

Shooting. 각기 다른 목적으로 만들어진 쇳덩이의 트리거가 당겨지는 순간 그 반대편에 놓인 누군가의 시간은 그대로 멈추어 박제된다. 돌아볼 수 있는 시간과 돌아볼 수 없는 사람. 지금도 우리가 모르는 저 건너편에서는 귀를 울리는 파열음이 여기저기서 솟아나고 있다.

 

퓰리처상은 그런 시간들 속에서 우리가 특히 잊지 말아야 할 순간들을 기념한다. 각계, 각층, 각지를 가리지 않은 기자들이 그 속으로 파고들어 남겨온 단 하나의 사진이 온 지구의 시선을 바꾸어왔다. 그 변화를 위해 끊임없이 기자들은 다시 현장으로 뛰어들고, 셔터를 누른다.

 

 

[공식포스터] 퓰리처상 사진전.jpg

 

 

‘퓰리처상 사진전’은 그 기록의 집합전이다. 단순히 다수의 미적 기준에 부합한 사진이 아니라 그 누구도 잊어선 안 될 이야기들이 그곳에 모여있었다. 차례차례 이어지는 네모난 앵글 속에는 누군가가 대부분 슬프게, 간혹 기쁘게 서 있었다. 나는 그들의 얼굴과 그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바라보며 맥락을 짚어나갔다.

 

 

[크기변환]성조기, 수리바치산에 게양되다 - Alamy Stock Photo.jpg
사진: Alamy Stock Photo

 


시작부터 판자를 덧댄 듯한 공간 연출이 안정감보다는 묘한 긴장감을 조성했고, 천천히 이어진 시선은 곧 수많은 이야기를 담아냈다. 키가 달라도 서로에게 경의를 보내는 두 인물과 전설적인 야구선수의 마지막 뒷모습, 그의 얼굴보다 오래 기억될 그의 등번호와 많은 피 위에 세워진 국기까지.

 

차마 전후 사정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광경들이 이어졌다. 그들보다 미래에 서서 단순히 그 장면을 바라보는 관전자의 입장으로서는 여러 양가감정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저 옆에 적힌 글자를 읽으며 공감하고, 가끔 감동할 뿐이었다.

 


[크기변환]잭 루비 오스왈드를 사살하다- Alamy Stock Photo.jpg
사진: Alamy Stock Photo

 


예상했듯이 뒤이어 나타나는 이야기들은 감동적이지만은 않았다. 이어지는 갈등과 폭력, 빈곤과 질병으로 몰아치는 비극을 마주해야 했다. 그동안 마음 깊숙한 곳에서 솟아나는 건 단순한 슬픔이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분노와 자조였다. 묘한 박탈감, 무력감, 그리고 알량한 도덕적 의식이 끊임없이 충돌했다. 그 마음은 이렇게나 불공평하고 부도덕한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영웅심리도 아니었다. 그저 같은 지구촌 시민으로서, 인류라는 공통점 안에서 갖는 자연스러운 감정이었다.

 

더불어 이 사진을 찍은 기자들이 이 사진 한 장, 필름 한 장을 바라볼 사람들에게서 어떤 반응을 기대했을지 알 것 같아 드는 부채감이 있었다. 누구도 나를 그 장면의 책임자로 지목하지 않았는데도 그저 목격했기 때문에 드는 죄책감 또한 있었다. 그러나 그 감정에 대응하는 해결책을 내놓을 수는 없었다. 그러는 중에도 발걸음은 끊임없이 다음 장면을 향해 간다. 이러한 와중에도 우리의 시간이 흐르듯이, 말 한마디 없이 수많은 이야기를 전해줄 다음 사진에게로.


르완다에서 포착된 절망의 순간과 러시아에서 포착된 즐거움을 나란히 보았을 땐 괴롭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모든 것을 관조하기도 했다. 솔직히 그건 특수한 경우도 아니었으며, 지극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일상이자 현실이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행복과 불행은 반복되며, 누군가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반대편 너머의 누군가는 웃는다.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그걸 동시에 보는 사람은 조금 복잡해진다.

 

그렇게 필름은 이어지고 이어져서 내가 실제로 겪어보기도 했던 한순간을 지났다. Covid-19라는 무색무취 절망의 시기. 그 속에서 피어나는 온기. 그리고 반복되는 폭탄과 폐허, 그 모든 필름을 지나고 난 뒤에야 바닥의 화살표는 나를 다시 나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출구로 이끌었다.

 

 

[크기변환]고민을 함께 하는 두 사람 - Alamy Stock Photo.jpg
사진: Alamy Stock Photo

 

 

고요하고 숭고한 공간을 빠져나와 시끌벅적한 일상을 마주하니 내심 묘한 안도감이 돌았다. 수많은 과거의 절망과 희망을 목도했지만 결국 지금의 나는 사진 속 그곳이 아니라 당장은 평화로운 이곳에 발을 디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이곳도 역사의 순간이 없는 그런 단조로운 공간인가. 그건 아니었다. 내가 예외일 리 없었다. 전시장 내부에서 보았듯이 한국은 전쟁이 끝나지 않은 휴전 국가다. 더불어 바로 최근에도 불안한 마음을 몇 번이고 가지며 살아가지 않았던가. 그걸 인지하자 작은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았고, 의외의 의욕이 생겨나기도 했다. 더더욱 우리 모두를 위한 변화를 느끼고 싶다는 그런 의욕이.

 

그 순간 내가 감상한 이 전시가 단순한 사진전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마지막까지 ‘취급 주의’가 붙은 나무상자를 보여주면서까지 이 전시가 관람객에게 말하고자 했던 것을 되새겨 보았다. 이 사진들은 역사의 단면일 뿐이지만 과연 이 장면들을 굳이 반복하고 싶은가? 이 얼굴을, 순간을 목격하고 싶은가. 기필코 목격하게 되는 날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구체적인 대처법이 떠오른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해야겠다!’는 명확한 결심이 선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한 가지 명확한 것은 ‘이보다는 더 나은 세상을 보고 싶다’는 희망 하나였다. 내가 목격한 수많은 과거가 나에게 남긴 것은 그런 것들이었다.

 

자연스럽게 이 장면들이 지나간 후에는 그 장면을 나에게 전해준 이들에 대한 생각이 남았다. 죽음을 앞에 두고 책임과 사명으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 그 행동력은 언제나 대단한 경외감을 느끼게 한다. 그 행위의 목적이 더 나은 공동사회라는 공익에 있다면, 경외감은 더욱 커진다. 그렇게 남겨진 그들의 유산 앞에서 나는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할까. 요구하는 이는 없지만 그래야만 할 것 같은 압박에 사로잡힌다.

 

나름대로 ‘옳다’고 생각되는 일들을 행하며 살아왔다. 누군가를 괴롭게 만드는 것이 있다면 같이 화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적극적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는 정도로, 딱 그렇게 나름대로 윤리를 지키며 살아온 나에게는 이들의 행보가 지극히 대단해 보였다.

 

특히 렌즈로 세상을 포착하는 이들이기에 그랬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뷰파인더에 담긴 그 장면은 그를 둘러싼 모든 것들로부터 분리되어 납작한 평면으로 남는다. 그 장면을 왜곡하지 않고 세상에 전달하는 것은 저널리스트의 태도에 달려있다. 그 상황을 제일 잘 아는 건 그 당사자를 제외하면 그 옆에서 사진을 찍었던 사람일 테니까. 그렇지 않은 언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보아왔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감정으로 뒤섞인 마음을 가라앉히는 건 이 모든 역사 위에 남겨질 것이 승자의 기록이라는 사실이다. 결국 언제나 그랬듯이 승기를 손에 쥔 사람의 마이크가 더 큰 법이다. 근데 내가 보아온 기록은 역사가 아닌가. 이 역사는 승자의 기록인가. 승자가 아니라면 패자인가. 어쩌면 승자의 발 아래에 깔린 잔해인가.

 

우리는 언제까지 승자의 기록을 반복해야 할까. 아마 인간이 독립적인 사고를 하며 꾸준히 엮이고 부딪치고, 그렇게 대립과 갈등이 존재하는 한 영원할 것이다. 그렇기에 사진기를 든 이들은 그 이면에 가려진 그림자를 기록해 꾸준히 양지로 끌어올린다. 이 계속되는 갈등 속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같은 역사의 반복 속에서 무엇을 더 가져가야 할지 잊지 말라고.

 

이들은 승자의 기록이 아니라 기적의 기록, 희망의 기록을 남기고자 했다. 그곳에는 인간이라면, 우리가 사람이라면 돌아봐야 할 것들이 꽤나 많이 있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알지 못했을 세계의 숭고함을 우리는 오늘도 깨달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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