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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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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6'에서 계속

 


그녀는 일생 동안 자신의 적은 키치라고 단언했더랬다. 그러나 그녀조차도 자신의 존재 깊숙한 곳에 키치를 품고 살았던 것은 아닐까? 그녀의 키치, 그것은 사랑하는 어머니와 지혜로운 아버지가 군림하는 평화롭고 부드럽고 조화로운 가정의 모습이다. 이 이미지는 그녀의 부모가 죽은 후에 가슴속에서 배태되었다. 그녀의 삶이 이 아름다운 꿈과는 아주 달랐기 때문에 이것이 지닌 매력에 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중략)


그녀는 이것이 환상임을 잘 알았다. 이 매력적인 노인네들 집에서 체류하는 것은 잠정적으로 간이역에 머무르는 것에 불과했다. (중략) 사비나는 다시금 배신의 길로 들어설 것이며 이따금 그녀 가슴 깊은 데에서 행복한 가족이 살고 있는 환한 두 창문에 대해 이야기하는 우스꽝스럽고 감상적인 노래가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속에서 울려 퍼질 것이다.

그녀는 이 노래에 감동하지만 자신의 감동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녀는 이 노래가 아름다운 거짓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안다. 키치는 거짓말로 인식되는 순간, 비-키치의 맥락에 자리 잡는다. 권위를 상실한 키치는 모든 인간의 약점처럼 감동적인 것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 중 그 누구도 초인이 아니며 키치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키치를 경멸해도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2015, 414~415 p

 


1. 키치로서의 니체


 

아 참 전전편엔가 니체가 키치에 희생됐다고 말했었지 참? 니체는 ‘힘과 권력에의 의지’를 제창했다. 모든 생물은 보다 높은 힘, 보다 많은 권력을 향하여 집결하고, 우리의 모든 의지는, 아무리 선량한 것처럼 보인들 그 이면에 있어 이러한 메타적인 힘으로부터 결코 무결할 수 없다는 취지의 주장이다. 나는 이 말을 아주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건 내가 뭇 인간들을 바라보는 관점과, 우연히도 일치하였기 때문에 어쩌다 알게 된 뜻 맞는 친구를 알게 된 것 같은 기쁨을 주었음이다.


그리고 그 주장은 나치 파시즘의 선전에 변용되었다고 하지. 히틀러는 니체 광이었다고 한다. 잠깐 찾아보니 선전 포스터에도 그의 얼굴을 갖다 넣은 것으로 봐선 알만도 할 것 같다. 물론 오용이었겠지. 니체의 주장이 내포하는 힘과 광기에 대한 예찬, 그리고 나아가 나약함에 대한 경멸이란 오해받기 십상이라는 것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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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과 광기를 긍정한다는 것은 그 뒤를 따르는 것, 무절제한 파괴 행위까지 긍정하는 것으로 확대해석 되기 일쑤인 까닭이다.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지만, 특정한 목적과 그에 대한 강렬한 의지가 있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주 일삼는, 어찌할 수 없는 인간적인 일이기도 할 것이다. 하여 나치 파시즘의 유대 인종 배척과 강력한 단일 민족의 우월성, 그것의 선전을 위한 제물로서 니체는 희생당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참으로 키치적이다. 유대 인종을 학살하며 짓던 그들의 미소에는, 키치가 가질 수 있는 최대의 심연이 깃들어 있다. 외면과 배제, 합리화의 극단.


키치란 그 스스로 상정한 미학적 이상을 위해, 그것을 부정하는 다른 모든 현실적 요소를 일체 배제하는 태도라고 하였지. 니체가 나치즘, 우월한 단일 민족 이념이라는 미학적 이상을 위해 희생당한 것은 그의 독일인 예찬과 위버멘쉬, 그리고 나약함에 대한 경멸 등에서 그 원인을 추찰할 수 있겠지만, 여전히 그것이 실재하는 인간에 대한 파괴행위를 결코 옹호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스꽝스러운 일이 되어 버린다. 그러니까 짧게 요하자면, 나치즘의 니체 인용은 그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억지로 끌어다 써놓곤 논리적 일탈은 깡그리 무시해버린, 어리석기 짝이 없는 처사였다는 것이다. 아뿔싸 이 어리석음을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가 그것을 인간의 세상에서 드러내 버릴 수가 있는 것일까?


역사상 멍청한 일이라고, 혹은 끔찍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두고두고 회자되는 것 가운데 키치적이지 않은 게 있을까? 그 자신에게 있어서는 틈 없이 훌륭한 지상 과업으로 여겨진 것이 사실상 멍청하거나 끔찍한 일이었으나 그는 알지 못했고, 혹은 알려 하지 않았고, 이내 그것이 역사에 남아 두고두고, 무덤의 뼈가 흙이 되고 다시 자연으로 환원된 이후에까지 끝없이 조롱당하고 모욕되는 것이란… 말하자면 ‘이러려고 그리 용쓰고 사셨소. 멍청하우이’ 같은, 허전한 기분을 주는.


그러나 또 한편 키치, 그 힘. 하나의 사상이 행동을 낳고 끝내 역사에 남기 위해, 그러니까 사상이 역사적 행위로까지 팽창하기 위해 수반되어야 했던 그 저돌적인 맹렬함과 질긴 끈기란 키치만이 지닐 수 있는 힘일 것이다. 옳다고 여기는 것, 아무런 의심 없이 강렬하게 믿어지는 것, 그러한 기치(다시 한 번, 키치 아니다)의 휘장 아래 사람이 모이고, 더 많이 모일수록 더 강렬해지고, 믿음은 신앙이 되어 이내 역사적 행위로까지 팽창하는 것. 팽창되고 나서는, 좀체 멈출 수 없이 나아가는 힘. 나는 이 힘, 맹렬함과 끈기와 팽창하는 힘과 그 뒤에 남는 이런 허무함, 태양처럼 타오르는 힘의 그림자로부터 일종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예기한다. 아직 느끼었다고 하기에는 섣부른, 채 밝혀지지 않은 석연찮은 것이 남은 듯한 기분으로.


 

 

2. 삶을 대하는 태도

 

그래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무엇일까. 사실 이것을 논하기 위한 긴 글이었다. 그 제목은 가히 모든 독자를 첫눈에 사로잡을 만한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그 제목에 홀려, 이 책으로 다가오는 것을 들었다. 누군가는 아리송한 기쁨으로, 누군가는 퉁명한 불만감을 안고 되돌아가곤 하였다. 애초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이 제목에 이끌리게 하였을까. 그 이유야 여러 가지라 다 가리킬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 순간 우리가 "우리 존재의 가벼움"에 대한 아주 멀고 희미한 방황을 품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지. 본격적인 것이라거나 피할 수 없는 현실의 슬픔이 되기 전, 아직은 감미로운 상실의 예감, 센티멘탈 블루일지도.


이번 오피니언을 쓰기 위해 벌써 3회독 째이건만, 아직도 그 제목이 가리키는 정확한 바를 해득하지는 못했다. 저자가 남긴 힌트가 있긴 하지만, 어째 거기에 기반한 해석에 스스로 납득되지 않아서 말이다. ‘영원회귀의 주장과 달리 만약 삶이 단 한 번뿐인 것이라면, 그것은 아무런 무게도 지닐 수 없는, 참을 수 없이 가벼운 것이다.’ 전제가 가정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이 마무리되지 않은 채 열려있는 한 그것에 대한 논증을 멈출 수 없는 까닭에, 내 나름대로의 주관적 해석을 위해 글이 과히 길어졌다는 생각을 이제서야 한다.


내가 내릴 소기 결론에 앞서, 다음의 명제를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존재의 가벼움이란, 우리의 태도가 아닌 존재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무언가’라는 점. 본 오피니언의 4편에서 ‘가벼움과 무거움’이란 그저 삶에 대한 주관적 ‘태도’라 언급한 바 있다. ‘가벼운 자는 자기 삶과 운명에 아무런 정답을 드밀지 않기에 실패로부터 비교적 자유하고, 무거운 자는 그 반대로 자기 운명에 대한 정해진 답을 믿고, 그 확신으로서 살아가기에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라고 정리하였다.


그리고 1편에서 밝혔듯, 책은 두 대립 항을 쌍쌍이 배치하고 있다. 토마시와 테레자, 사비나와 프란츠 커플은 각각 가벼움과 무거움을 대변하고 있다(완벽히는 아니지만). 그리고 작가는 어느 태도로서도 그저 손쉽게 승리하게 두지 않는다. ‘가벼운 태도가 운명을 맞이하는 올바른 방식인가, 아니. 그렇다면 무거움이야말로 우리가 택해야 할 무언가인가, 글쎄.’ 책은 내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이것은 전부 삶과 운명에 대한 각자의 태도이다. 무엇을 선택하느냐는 문제는 그 사람의 생애 서사에 달려있는, 달리 말해 얼마든지 가변적인 것.


‘무거운 자의 존재는 무거운가, 그렇다면 가벼운 자의 존재는 가벼운가.’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기에 가변하는 것. 이런 가변하는 속성으로 하여 하나의 존재를 끝내 ‘가벼움’이라고 일컬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책,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가벼운 인간의 선택과 태도를 ‘참을 수 없노라’고 조롱하였더라면, 이처럼 매력있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4편에서 밝혔듯, 그런 주장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일 수밖에 없으며, 수없이 많은 반례를 통해 비판되며 우화되게 마련인 까닭이다. 가벼움의 태도가 우스운 것이라면, 사실 무거움의 태도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무거움은 좌절이 되되 권태로부터 멀고 가벼움은 권태가 되되 그것이 좌절이 아닌 방황이었듯이, 어느 선택이건 한계를 내포하고 있는 한에는. 또한 나아가 가벼움이 권태를 지낸 끝에 스스로 삶의 무거움을 요구하고, 무거움이 좌절을 통해 가벼움의 필요를 학습하기도 하는 까닭이다, 내가 지금 그러하듯이. 그러니 어느 존재의 현재적 속성, 지금 이 순간의 속성을 두고 그 존재 일체에 관해 규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피동적 속성, 어느 것을 선택해도 실패에 종속되는 이 필연성이 바로 존재의 가벼움인가, 무엇을 선택하여도 승리할 수 없는, 허무한?’ 아직 이렇게 말해보기에는 한참 섣부르거니와, 그것을 명명백백히 설명하기에 내 지혜는 한참 모자란 것 같다.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이, 곧바로 패배함을 가리키지는 않기 때문에 섣부름이고, 다만 그것을 설명하면서도 이 글의 전체 맥락을 훼손하지 않기에 내 지혜가 짧다. 그러니 이쯤에서 사변을 끊고 본론만 짚고 넘어가자면, 존재 그 자체의 무게, 그것은 얼마든지 가변할 수 있는 우리의 태도와는 무관한 것이다.


존재란 개별자를 모두 통칭하는 대명사이며, 그것은 보편 명제의 속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마치 ‘모든 사람은 죽는다’와 같이, 어떤 개별적 선택마저도 포괄하는 것. 그것은 우리 존재가 이미 내포하고 있는 한계성이라거나, 본질적 속성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이것을 나름대로 해득하기 위해 그토록 키치에 골몰하였던 것이다. 인간인 누구나 그러한 것, 존재의 보편이자 맹렬히 타오르는 힘과 그림자, 나약함이자 강함, 꿈이자 희망이자 허무인 그것을.


 

 

3. 과거와 미래, 믿음과 키치

 

지금껏 난잡하게 풀어헤친 글을 슬슬 갈무리해볼까. 나는 논리력 C-의 소유자였고, 그때 채 알 수 없었으나 그것은 내게 이미 주어진, 결정된 일이었음을 밝힌 바 있다. 그 까닭은 ‘거부할 수 없이 강렬한 느낌’, 나 자신만이 옳다고 느끼게 만드는 부조리한 느낌이 나를 점유하고 있었던 때문이었고. 그리고 지나온 지금에야 그 모든 것이 결정된 것, 태중에 점지된 것, 피보다 깊은 유전자 안에 흐르고 있는 천성, 즉 일종의 운명이었음을 알아본다. 당시에 결코 알 수 없었던 것은 지나오고 난 다음에나 알아볼 수 있게 되고 마침내 그 모든 것, C-의 일련이 피할 수 없는 필연에 가까웠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다.


인간이 하나의 서사적 순간을 지나오고 난 다음, 스스로 돌아보며 알게 되는 이러한 것들은 어쩜 허망함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선형적인 시간선 위에서 모든 것을 굽어보는 일이란. 결코 돌아갈 수 없지만, 지나온 다음에야 알아볼 수 있게 되는 것이란. 그때 과거의 나에게 벌어진 모든 사건을 챕터 단위로 분절 처리한 다음, 지나온 챕터인 지금에 되돌아보노라면 이 모든 것들이 허망할 정도로 선명해지는 일이란! 그러면서도 그것을 바라보지 않을 만큼 어리석거나 무지하지 않은 우리들이란, 기억이란!


기억하지 않는 자에 과거는 없고, 상상하지 않는 자에게 미래는 존재치 아니한다. 그러므로 기억과 상상의 동물인 인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살아가는 존재이다. 미래를 보지 아니할 수, 그러므로 불안하지 아니할 수 없고, 과거를 돌아보지 아니할 수, 그러므로 후회하지 아니할 수 없는 자. 살아감이란 나아감이기에, 지금을 살아가매 후회라는 덩굴을 걷어차고 불안이라는 암흑에 횃불을 사르는 존재이다.


'다 지나오고 난 다음 돌아보게 되는 것.' 이 모든 것은 돌이킬 수 없기에 허망하고, 허망함을 느낄 만큼 그때에 뚜렷이 선명해지다. 이것, 지금에 알게 된 그리 대단치도 않은 이 사실들을 미리 알 수만 있었더라면 미지의 답을 향해 갈 지 之 자로 횡보하며, 온갖 오답과 좌절을 거쳐오지 않아도 되었을 터이며, 그 과정상 나는 ‘무거운’ 존재로서 삶에 대한 가벼움과 명랑함을 잃지 않아도 되었을 터이다. 나아가 ‘무거운’ 자기 삶을 관철하기 위해, ‘가벼움’을 배격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마찬가지 이유로 ‘키치’,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를 밀침으로써 그리 독하게 고독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하여 내 되돌아갈 길이, 이처럼 장대히 멀리 뻗쳐나오지 않을 수도 있었을 터이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이 모든 것이 반드시 일어날 일이었으며, 일어나야만 했던 일임을 이해하고 있다. 그것은 이미 일어나 명백해진 것이기 때문이며, 모든 사건은 가장 본질적인 원인에 후행하는 까닭이다. 달리 말하면 원인이 존재하는 한, 결과는 반드시 발생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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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문제였고, 왜 그러했으며, 어떻게 해야 했는가.' 그때엔 몰랐고 지금은 아는 것. 그러므로 방황했고, 그러므로 아무케든 지나온 것. 그러므로 불안했고 마침내 지나온 지금, 아무것도 아닌 사소함이 되어 있는 것. 그렇게까지 불안할 필요가 없었고, 그렇게까지 치열할 필요가 없었고, 그렇게까지 다그칠 필요가 없었노라, 그때는 그럴 수 없었으나 지금에 여길 수 있는 것. 우리는 왜 그렇게 어렵사리 방황해야 했던가.


진정 서늘한 것은, 그것을 전부 지나와야만 알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서사적 순간을 지나온다는 것은, 그것을 마침내 극복했다는 뜻. 극복한 자는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그 사건이 '무엇이었고, 왜 그러했고, 어떻게 해야 했는가'를 나름대로 체득한 자이다. 그렇다면 질문, 아직 서사적 순간을 지나오지 못해 그 과거와 현재가 분기처리 되지 않은 사람, 그 문제적 서사의 순간이 오래도록 현재 진행 중인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나오면 아무것도 아니나, 지나올 방법을 오래도록 찾지 못하는 그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가 무슨 한마디 말로 그를 위무할 수 있을런가. 이것만이 내 작은 삶을 건너온 다음 남아 있는, 아직의 질문이다.


어떻게 해야 했을까. 그 사람에겐 어떻게 그 사실을 알려줄 수 있을 것이며, 어떻게 그것을 극복시킬 수 있었을까. 그것을 방황이나 고독이 아닌 방식으로, 손쉬운 상냥함으로 알려줄 수는 없었을까. '무엇을, 왜, 그리고 어떻게' 이 세 가지 낱말은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겠지만, 이 사안이 내게 꽤 무겁다. 내 20대란 모조리 그것을 위해 바친 방황의 시간이었기 때문에. ‘알면 어렵지 않다, 한번 알고 나면 불안치 않다. 결국 앎, 그 가벼움의 문제이다.’ 그렇지, 허나 문제와 정답의 '왜-무엇'을 아는 것까지는 그렇게 어렵지 않은 일일지도 모르나, 그것을 어떻게 실천하고 극복하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우리의 무거운 숙제이다. 결국 진짜 문제는 '어떻게'가 지니는 무거움, 이것이 아직 내게 정리되어야 할 무언가이다.


어떻게,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불안한 우리 실존의 진정한 질문이다. 지나와야만 알 수 있는 것을 어떻게 미리 아는 것처럼 믿고 행동할 수 있는가, 어떻게. 이 책을 함께 읽었던 독서 모임의 일원 중 하나가 내게 거듭 물었다, 마치 자기 불안의 해답을 달라는 듯이, 강렬하게. ‘어떻게 그게 가능하다는 건가요? 겪지 않고서 어떻게 모든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인가요. 믿음이 중요하다는 건 알지만, 그 믿음이 어떻게 불안보다 커다래질 수 있다는 말인가요. 어떻게 분명한 사건 이후에 자연스레 퍼져가고 스며드는 앎과 믿음이 아닌, 스스로 만들어낸 것을 붙잡을 것이며, 그것을 겪지 않고서도 시종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그때 나는 채 답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키치가 필요한 것이라는 말을.


앞선 2편에서 내가 우화 寓話한 영원회귀, 다중회귀란 이상의 단상이 가리키는바, 다름 아닌 이런 시시한 것이다. "다 지나온 것처럼 바라보는 것", 그래 마치 지나온 운명을 바라보는 듯이. 운명의 신이 있다면 세상에 꼬물거리는 인간이 너무 많아 내 모습일랑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그 존재에게 동시 수천억 생물을 관조할 수 있는 전지성마저 부여한다면 내 모습을 보고 있었으리오, 그는 존재자가 겪게 되는 모든 사건·서사를 통시적으로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있어 내 불안이 무엇이며, 내 희망이 무엇인가. 내 불안은 무지 속에서, 이미 정해진 그 운명을 향해 가는 잠깐의 방황일 뿐이며, 내 희망이 또한 그 운명을 향해 가는 잠깐의 의지일 뿐.


허나 일찍이 나는 알 수 없어 답을 청하는 애처로움으로 구하였으나, 그는 침묵했다. 그 신은 있거나 없다. 있다 한들 응하지 않기에 무의미하고, 없다면 이 모든 질문은 의미를 잃는다. 그러므로 둘 중 무엇,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와는 상관없이 답은 오직 스스로 구해야 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다. 운명이라는 허구, 나아가 운명의 신에 대한 상상은 존재 여부에서 그 의의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존재의 관점에서 그 의의를 구할 수 있는 것이다. 그건 열화 劣化한 영원회귀, 다중회귀의 태도이다.


인간에 있어 믿음이 중요한 의의를 지니게 되는 지점은 맹목성, 그것을 알기(겪기) 전에 먼저 믿을 수 있는가에 달린 것이다. 강렬한 필요에 따른 인과의 역전, 겪어 앎으로써 믿고 이내 자유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아는 것처럼 여김으로 하여 미리 구하고자 하는바 믿음. 이것이 정신의 키치적인 원리와 유사하다는 것을 여기까지 읽으신 독자 중 일부는 눈치채실 것이다. 알기에 믿는가, 믿기 위해 아는가. 겪고 난 실체만을 믿는가, 겪고자 하는 이상을 믿는가. 믿음의 주요한 힘은 다름 아니라, 키치를 가리키고 있던 것이다. 물론 키치에는 그 외 몇 가지 부산물들이 더부지만, 그 본질은 맹목성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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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우리가 아무리 키치를 경멸해도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다." 믿음이 약한 자, 우리들은 스스로 원하는 바를 위하여 나아가기로 정해져 있으되, 학습한 실패와 좌절의 불안으로부터 흔들리는 나약한 자들이다. 불안이 발을 굳히고, 그때 불안의 어둠을 사르는 것은 믿음의 불빛이다. 그때 횃불인 믿음은 앎이 아니라 필요에 의한 것이며, 여기까지 풀어헤친 믿음이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필요한 그 무엇(미학적 이상)을 위해 현실적인 것(학습한 불안)을 외면하고 초월하려는 의지, 그러한 종류의 키치.’


"우리가 초인이 아닌 한", 믿음이 약한 자 우리가 삶을, 삶의 불안을 건너가기 위해 이런 단편적이고도 즉각적인 위무들이 필요하다. 나는 이것, 이 나약함이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형성하는 그 무엇이라고 예기한다. 왜냐하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을 먼저 믿음으로써 삶의 불안을 건너갈 수 있었으나, 건너온 여기에 그 믿던바 미래가 기다리지 않을 수도 있음이며, 그때 우리가 선불로 지급한 믿음이 더욱 커다란 것으로, 이자를 포함하여 우리에게 상환을 요구하기 때문이며, 그때 우리가 나약하며, 일찍이 우리를 놀라운 힘으로 인도하던 그 믿음의 허망함이 그림자로부터 여실히 드러나게 되기 때문에. 우리가 초인이 아닌 한, 믿음 없이 행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고, 그러나 그 믿음으로 하여 좌절하지 않게 될 수도 없음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올곧이 바라본 채로 삶이라는 외줄을 타고 넘어갈 수 없다. 우리는 심연 위에 걸친 밧줄이며, 초인은 기꺼이 건너가는 자이나, 지상의 우리는 여전히 나약한 존재이다. 초인은 심연을 굽어보면서도 밧줄 끝에 도달한 자이며, 상상의 존재이자 하나의 기치일 뿐이다.


필요에 의한 믿음, 삶을 건너가기 위해 지혜의 눈을 반쯤 가리는 것, 그건 이미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행하고 있는 것이고, 그 실상은 키치적인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꿈 내지 희망이라고도 부르고, 기망이나 그릇된 열정이라고도, 허황된 이상이자 허무맹랑한 것이라고도 부른다. 실상 이 모든 것들의 본질은 하나이나, 그 사이의 호오 好惡를 나누는 것은 그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으로부터 이해되고 공감되는가, 즉 ‘키치다움’을 지니는가에 의해 나뉘는 것일 뿐. 믿음의 지속을 위해 현실을, 그 믿음에 반하는 온갖 현실적 만약을 외면하고 배제해내는 일, 그것은 나아감을 위해 매우 필요한 일이다. "우리가 아무리 키치를 경멸해도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다." 모두 저마다의 키치를 지니고 있으되, 키치는 스스로에게 가려져 있거나 잊힘으로써 완성되는 것. 우리가 경멸하는 키치는 이해치 못하는 다른 사람의 그것일 뿐이다. 우리는 어느 한 가지 키치의 휘장 아래에서, 또다른 키치를 경멸하고 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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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5, 6편에서 밝혔듯, 그리고 작중 사비나가 그러하였듯, 나는 키치가 지니는 논리적 결함 그리고 미학적 불쾌감에 대단히 예민하다. 그러나 단절된 인간 사이, 사람 속의 인간이기 위해 어찌할 수 없이 키치가 필요하고, 우리의 불완전한 이해와 신념을 지키고 나약한 정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일정 부분 스스로 가려져야 하는 것, 즉 키치적인 것들이 필요하다는 이해를 나는 이 글을 써내려가며 도출하고, 또 받아들인다. 아직 그것은 내 심부에까지 닿지 못했지만, 그것은 시간의 문제일 뿐. 막 태어난 사유가 정신 깊숙이 스미기 위해 조금의 시간이 더 필요할 뿐이다. 우리에겐 그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초인이 아닌 한, 말하자면 허무와 후회와 권태가 정신에 불침하고, 고독과 미움과 배척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이 불침하고,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동물적 힘과 욕망, 그에 대한 의지와 광기에 대한 구역질 나는 거부감이 불침하는 것이 아닌 한에는. 우리는 이 모든 것들로부터 스스로 가려진 채 보호받아야 한다. 같은 색깔의 휘장 아래에 서로 보듬고 어루만지고 위무 받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같은 것을 믿고 서로에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층층이 쌓인 휘장의 그늘 아래, 가장 높고 널리 펼쳐져 있는 것은 시민 사회화라 일컬어지는 것이며, 그 아래로는 각자의 기호와 필요에 따라 셀 수 없이 많은 작은 휘장들이 쌓이어 있다.


가벼움과 무거움, 삶에 대한 가변적 태도 따위와 상관없이 인간 정신에 필수불가결한 것인 이 키치, 나는 여기서 존재의 가벼움을 느낀다. 그것은 무척이나 간단한 이유이다. 거기에는 진리의 느낌이 있을 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존재 자체의 무게를 결정짓는 것이란 의미, 불변하며 확고부동한 그 의미, 즉 진리 여하에 달렸다고 해두자면, 나는 우리 존재와 그 존재를 규정짓는 것인 삶이, 그 삶이 지니거나 획득한 것으로 여기는 ‘확고부동한 의미’, 의미의 주관적 느낌 그것이 바로 한없이 가벼운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이 없이 우리가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


질문, 시간이 지나 모든 것이 선명한 과거이자 결과로서 드러나 버린 다음, 죽어버린 믿음의 잔해 위에 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강렬했던 믿음의 추억, 그 달콤함에 대비되며 더욱 쓰라리게 다가오는 믿음의 실패 앞에서. 우리는 실패로부터 분연히 떠나와 새로운 믿음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가, 또 다른 불확실성으로? 아니면 실패 위에 엎드려 눈물짓고는 거기 멈추어야 하는가, 이미 귀결된 실패에? 내 질문은 아예 다른 것이다. 믿음의 실패로부터의 자유, 또는 반드시 승리하는 믿음에 대한 질문. 아무런 믿음 없이 존재할 수 있는가, 또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 믿음 아래 존재할 수 있는가의 문제. 집약하자면, 진리가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 그것은 불가해한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존재의 가벼움, 그 실마리를 찾는다. 어쩌면 쿤데라식 허무주의는 이 진리의 불가해성과 무관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역사 속에 단 한 번 등장하는 로베스피에르와, 영원히 등장을 반복하여 프랑스 사람의 머리를 자를 로베스피에르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래서 영원한 회귀라는 사상은, 세상사를 우리가 아는 그대로 보지 않게 해 주는 시점을 일컫는 것이라고 해 두자. 다시 말해 세상사는, 세상사가 덧없는 것이라는 정상참작을 배제한 상태에서 우리에게 나타난다. 사실 이 정상참작 때문에 우리는 어떤 심판도 내릴 수 없다. 곧 사라지고 말 덧없는 것을 비난할 수 있을까?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2015, 1p

 

 

사람이 무엇을 희구해야만 하는가를 안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사람은 한 번밖에 살지 못하고 전생과 현생을 비교할 수도 없으며 현생과 비교하여 후생을 바로잡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테레자와 함께 사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혼자 사는 것이 나을까? 도무지 비교할 길이 없으니 어느 쪽 결정이 좋을지 확인할 길도 없다. 마치 한 번도 리허설을 하지 않고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그런데 인생의 첫 번째 리허설이 인생 그 자체라면 인생에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기에 삶은 항상 밑그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밑그림’이라는 용어도 정확하지 않은 것이, 밑그림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초안, 한 작품의 준비 작업인데 비해, 우리 인생이라는 밑그림은 완성작 없는 초안, 무용한 밑그림이다.


토마시는 독일 속담을 되뇌었다. ‘einmal ist keinmal’. 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2015, 17p

 

 

Einmal ist keinmal. 한 번은 중요하지 않다. 한 번이면 그것으로 영원히 끝이다. 유럽 역사와 마찬가지로 보헤미아 역사도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보헤미아 역사와 유럽 역사는 인류의 치명적 체험 부재가 그려 낸 두 밑그림이다. 역사란 개인의 삶만큼이나 가벼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2015, 356~358p

 

 

사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존재의 가벼움’, 그 힌트가 바로 여기 버젓이 놓여 있다. 작가가 영원회귀의 안티테제적 태도로 글의 서문을 열었노라 3편에서 언급한 바 있다. 영원회귀라는 것이 과학적 논리에 기반한 하나의 가설이라면, 그것을 정반대로 뒤집어 생각함도 반드시 틀린 것이라 할 수 없고, 영원히 회귀함으로써 모든 일이 억겁의 무게와 의미를 지닌다고 하자면, 뒤집어서 생각했을 때 단 한 번뿐인 것은 아무런 무게도 의미도 지닐 수 없는, 가벼움이라는 것. 그러니까, ‘영원에 비하였을 때에 한 번뿐인 것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


하지만 양가 관계에 있는 두 가지 견해 모두 가설이자 결말이 열려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니체와 쿤데라, 각각 영원회귀와 단 한 번뿐인 삶이라는 전제는 진리가 아닌 선택의 문제로 열화되며, 각각 무거움과 가벼움의 태도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치환된 채로 은유된다. 이 무거움과 가벼움에 대한 것은 위에서 이미 재론하였으니 넘어가도록 한다. 삶의 모든 사안과 선택을 진중하게 바라보는 자, 무거운 자는 보다 영원회귀적이고, 반대로 모든 선택을 우연 위에 맡기는 자, 가벼운 자는 보다 쿤데라적이다. 이 지점이 아마, 나로 하여금 이 긴 글을 쓰게 만든 지점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 가변하는 사람의 선택과 태도만으로는 ‘존재 자체의 무게’를 논할 수 없다 여겼기 때문이다.


비록 쿤데라가 해석한 영원회귀의 안티테제는 핀트가 조금 빗나간 것 같긴 하다만, 우리에게 흥미로운 질문거리를 준다. 영원회귀는 똑같은 생애의 무한한 반복, 일종 시지프 신화의 전제로부터 지금 이 순간의 모든 행위에 무한한 무게감과 진중함의 관점을 드리우는 것이지, 똑같은 삶을 반복하되 어느 분기점에서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성질의 것, 즉 비교 가능한 대상이 아니다. 반면 쿤데라는 자신이 전개한 안티테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논지를 설명하는 것에서 그러한 비교의 시도를 논점으로 끌고 왔다. 그러니까 유쾌한 일탈이라는 것이다.


두 번의 삶. 완전히 동일한 상황에서 두 가지 극단적 선택을 수행하고 그것을 접붙여 비교해본다 한들 우리가 진리, 그러니까 명확한 정답을 알아내리라 확정할 수는 없지만, 뒤집어 생각해 보면, 두 가지 극단을 비교해보아도 진리를 알아낼 수 없다면 단 한 번만 살아볼 수 있는 지금에는 더더욱 불가능하리라는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다.


그러니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쉽게 말해 삶에 있어 진리의 불가해성을 가리킨다. 한편 그것이 너무 당연한 것이라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사소한 것이 아니라, 이 책과 지금 내 오피니언처럼 열정적이면서 본격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지점은 다름 아닌 키치, 우리가 그것을 열망하기 때문일 테다. 결코 닿을 수 없으나 마치 닿을 수 있을 것처럼, 나아가 이미 닿았노라 생각하는 사람들의 극적인 몸짓. 그것을 제4의 벽 너머에서 구경하는 듯한 관점을 떠올린다면,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조금은 이해받을 수 있을 것 같다.



 

5. 맺으며

 

삶이 한 번뿐인들, 무한히 반복되는 것인들, 이 지상의 삶에서 변하는 것이 있을까. 믿음은 가변하나 실재는 변하지 않는다. 사물과 법칙은 여기 그 자리에 그대로, 꿈꾸지 않는 돌처럼 그저 존재할 뿐이고 가변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뿐일 것이다. 3편과 4편에서 언급했듯 나는 그것을 존재 외적으로 구상하지 않는다. 삶이 무한하여 무겁다는 관점도, 단 한 번 뿐이기에 아무 의미 없다는 관점도, 실재하는 삶에 접목하기에는 거창하고, 딱히 무의미하다 여기는 까닭이다.


각각은 진리를 향한 열정이자 집요한 질문이기 때문에 존중받을만하고, 그 존중의 근거로서 나는 치열하게 논쟁하였으나, 그 자체로 진리인 것은 아니이다. 외려 거기에 집착하여 어떠한 한편의 진리를 배웠노라 또는 구하였노라 스스로 여기며, ‘의미의 주관적 느낌’에 사로잡힌다면 그 또한 즐거운 넌센스일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무엇인가. 누군가 내게 이렇게 묻는다면, 이 책의 결말부를 소개하며 마무리하겠다. 토마시는 자기 삶의 태도와 선택 사이에서 오래도록 고뇌한다. 테레자에 대한 것, 소련 침공에 대한 것, 공산 세력에의 저항에 대한 것, 삶은 무수히 많은 선택을 종용하지만 정작 선택의 시기에 정답을 알 수는 없고, 다만 그는 자기 선택에 따르는 결과를 몸으로, 삶으로 받아낸다. 그렇게 잘 나가는 외과의사에서 시골의 트럭 정비공으로, 인기 많은 바람둥이에서 단 한 명의 여인에 복종하는 사내로 전락한다. 하지만 토마시는 딱히 후회하지 않는 것 같다. 그가 선택하는 것에 있어 가장 중요했던 것은, ‘어떻게 하고 싶은가’ 하는 아주 단순한 이유였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간들 그가 다른 선택을 내릴 수 있을 것이며, 완전히 반대의 선택이 곧 정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말하자면 테레자에게로 돌아가지 않는 것,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글을 철회하는 것, 또는 공산주의 저항 세력에 동참하는 것. 삶은 알 수 없다. 토마시는 그런 것들을 생각하는 것 대신,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그저 살아낸다. 그리고 어느 한적한 밤, 술을 마시러 인근 마을로 가던 중 트럭 사고로 허망하게 죽는다.

 


사비나는 그녀를 둘러싼 공허를 느꼈다. 그리고 바로 이 공허가 그녀가 벌인 모든 배신의 목표였다면? 물론 지금까지 그녀에게 이런 의식은 없었고, 그것도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는 항상 베일에 가린 법이다. 결혼을 원하는 처녀는 자기도 전혀 모르는 것을 갈망하는 것이다. 명예를 추구하는 청년은 명예가 무엇인지 결코 모른다. 우리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항상 철저한 미지의 그 무엇이다. 사비나 역시 배신의 욕망 뒤에 숨어 있는 목표가 무엇인지 모른다.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이것이 목표일까? 제네바를 떠나온 이래 그녀는 이 목표에 부쩍 가까워졌다.

그녀가 보헤미아로부터 온 편지를 받은 것은 파리에 온 지 삼 년이 지난 뒤였다. 토마시의 아들로부터 온 편지 한 통. (중략) 그는 토마시와 테레자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편지에 따르면 그들은 죽기 전 몇 해 동안 토마시가 트럭 운전사로 일했던 어느 마을에서 살았다. 그들은 자주 인근 마을로 가서 항상 조그만 호텔에서 밤을 보내곤 했다. 언덕을 타고 넘는 도로에는 꼬불꼬불한 구간이 많았는데, 트럭이 그만 계곡 아래로 떨어졌던 것이다. 시체는 완전히 으스러져 있었다. 경찰은 브레이크가 아주 엉망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중략) 그녀는 다시 한 번 그들을 생각했다. 그들은 가끔 이웃 마을에 가서 호텔에 묵었다. 편지의 이 대목이 그녀에겐 충격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행복했다는 것을 증명했다. (중략) 사비나의 부모는 같은 주에 세상을 떠났다. 토마시와 테레자는 같은 순간에 죽었다. 갑자기 그녀는 프란츠와 함께 있고 싶어졌다.

(중략) 그녀는 자기에게 참을성이 없었던 것을 후회했다. … 그러나 이제 너무 늦었다. 그렇다, 이제 너무 늦었고 사비나는 자신이 파리에 머무르지 않고 더 먼 곳, 더 멀리 떠나리라는 것을 알았다. … 멈출 줄 모르는 여자에게 있어 뜀박질 도중에 영원히 멈추는 것은 생각만 해도 참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2015, 201~205p

 


작가는 토마시의 삶을 빌어, 대단하거나 거창한 결말을 도출하지 않았다. 불필요하며, 그 또한 무의미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저 삶이란, 어떤 선택의 결과이고 그 선택에 있어 가장 훌륭한 정답은 존재하지 않거나 알 수 없는 것이며, 그나마도 어떻게 귀결될지 모른다는 것. 적어도 토마시는 행복하게 죽은 것 같다. 토마시와 테레사 부부의 부고 편지를 읽은 사비나는 그들이 적어도 행복했다는 것, 대단하진 않지만 그럭저럭 소박하게 행복했다는 것을 알았다. 함께 있었고, 적어도 함께인 채로 끝맺었기 때문에, 또는 주말마다 함께 모텔을 가던 것을 빌어 그렇게 생각한 것일지도 모른다. (저 나이까지 금슬이 좋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 대단한 일일지도.)


믿음이 우릴 구원하고, 또 우릴 땅에 내팽개칠 것이다. 믿음이란 낱말을 굳이 신앙에 늘어붙여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 안에 얼마나 많은 믿음이 존재하는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살아감에는 믿음이 필요하고, 그 믿음은 결코 영속되지 않는다. 믿음의 영속은 실재와의 이별, 키치로만이 가능할 것이기에 차라리 우리는 두 눈을 떠, 믿음 속을 걸어가되 언제까지고 흔들리며, 땅으로 넘어지며 살아가야만 한다.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그럼에도 나아갈 힘과 두 눈을 부릅뜰 만한 용기가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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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 글을 시원찮게 마무리한다. 나의 주장에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은 채 텅 비어 있는 것이 있다. 아마 그 점이 독자로 하여 의구심을 낳을 것이다. 이 글 전반의 사유에 전제된 바, ‘모든 믿음이 실패로 귀결되어 있고, 맹렬할수록 허무는 커진다’라는 대단히 염세적인 이 전제는 조금 더 착실한 사례와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나, 아직 그것을 설명하기에 내 지혜는 대단히 짤따랗고, 동어반복을 감내하며 이 이상 글을 늘어뜨리기에 막대한 피로감을 느낀다.


이상, 길었던 내 생각 또한 나의 믿음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믿음은 내가 미처 생각하지 않은 어떠한 부분에서 벌써 실패를 내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또한 장황한 헛소리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진지하게 즉, 무겁게 써내린 만큼 뒤따르는 실패도 무겁게 다가오게 마련이지만, 그것은 어찌할 수 없기에 유쾌한 일이어야 할 것이다. 그저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그럼에도 나아갈 힘과 두 눈을 부릅뜰 만한 용기가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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