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다시 처음으로(1)
-
[illust by Yang EJ (양이제)]
세계가 인간을 선행하고, 인간이 사건을 선행합니다. 세계는 인간과 사건을 뛰어넘는 거대 복수의 개념이며, 사건은 만약 인간이 이를 인식하지 않는다면 바람처럼 스쳐 지나갈 하나의 현상으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포함 관계를 간단히 정리하자면, 세계-인간-사건이 됩니다. 여기까지가 저번 '세계-인간-사건' 총 네 편의 글을 통해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결론에서 더 나아가 이 논리를 실제로 적용해 봅시다. 이 논리를 우리의 '세계관'으로 활용해 보는 겁니다. 월드 시리즈의 가장 첫 번째 글에서 소개된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앞서 설정한 세계관을 통해 재해석해 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말이죠.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주인공 프란체스카는 아이오와주의 생활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합니다. 겉으로는 남편의 아내로서, 가정의 어머니로서 그리고 한 명의 마을 주민으로서 무난하게 생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프란체스카의 속은 그렇지 못하죠. 육식을 포함한 효율을 추구하는 마을에서 프란체스카는 비효율의 삶을 소망합니다. 문호들의 시를 즐겨 읽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따라 춤추며 노래하는 것처럼 말이죠. 그러나 프란체스카의 가족은 그렇지 않습니다. 가족들은 라디오에 따라 흥얼거리기보단, 편히 앉아 텔레비전을 보는 걸 더 좋아합니다. 가족들은 책을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문을 닫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항상 어딘가로 바삐 움직입니다. 이 영화에서 책을 읽거나 춤추는 장면은 오직 프란체스카가 홀로 있거나 이방인인 로버트와 함께 있을 때만 등장합니다. 영화는 이러한 대비와 배우 메릴 스트립의 표정 연기를 통해 프란체스카의 지난 일상이 어떤 모습이었을지 추측하게 만듭니다.
프란체스카와 가족의 대비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문을 꽝꽝 닫고 다니는 가족과 그 문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프란체스카의 장면이지요. 프란체스카는 가족들을 향해 제발 문을 살살 닫을 것을 요구합니다. 이를 들은 체 만체하는 가족들과 곧 체념하며 요리를 이어가는 프란체스카를 보면 분명 하루 이틀 있었던 일이 아닌 모양입니다. 그런데도 프란체스카는 문소리에 여전히 놀라고요. 문을 세게 닫는 가족의 모습은 아이오와주의 효율주의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입니다. 간밤에 몰래 밖으로 나가는 상황을 떠올려 볼까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문고리를 잡고 천천히 조심스레 끌어당깁니다. 철컥, 걸쇠가 걸리는 소리 외에는 조용합니다. 무사히 방에서 빠져나온 겁니다. 이처럼 끝까지 주의를 기울인다면 문은 조용히 닫힐 수 있습니다. 반대로 기울이지 않는다면, 문은 언제나 꽝꽝 큰 소리를 내며 닫히겠지요. 이 두 차이를 만드는 것은 문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할애하느냐에 따라 달렸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은 문에 시간을 들이지 않기로 선택한 것이고요. 그럴 시간에 한두 걸음 더 이동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죠. 실제로 그들에겐 문소리가 그다지 거슬리지 않습니다. 이 장면에서 문소리에 놀라는 사람은 오직 프란체스카뿐입니다.
이제 좀전의 논리를 가져와 이를 해석해 봅시다. 사건은 인간이 인식하지 않으면 하나의 현상에 불과합니다. 문이 꽝꽝 닫힐 때, 이를 의식하는 것은 프란체스카뿐이죠. 가족들은 프란체스카처럼 놀라거나 특별히 문소리를 의식하지 않습니다. 프란체스카에게 문이 세게 닫히는 것은 사건이지만, 다른 가족들에게는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죠. 우리는 이전 글에서 사건이란 뜻밖에 벌어진 일이라 정의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프란체스카에겐 문이 세게 닫히는 것이 뜻밖의 일이고, 가족들은 그렇지 않다는 게 됩니다. 왜일까요? 문이 세게 닫히다란 사건이 벌어진 장소는 부엌입니다. 여기에 실마리가 있습니다.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
[양은정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위로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