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답장은 쓸 수 없다 -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알렉시'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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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 노트에
편지를 썼다
세 장이나 썼다
세수를 하다가
편지 안 줘야지, 생각했다
그리고 놀랐다
편지라는 건
안 줄 수가 있구나
이렇게 실컷
말 걸어놓고도
편지를 안 줄 수 있다는 것에 기뻐하며
냉장고에서
썰어놓은 수박을 꺼내 먹었다
김은지, <초여름>
『여름 외투』에 수록된 김은지 시인의 편지에 대한 귀여운 시이다.
유르스나르의 첫 소설 「알렉시」는 알렉시가 아내 모니크에게 남긴 사죄의 편지로, 성적 정체성을 고백하며 성적 자유를 찾기 위해 떠나는 파격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고백을 통해 독자는 알렉시와 작가의 목소리가 겹쳐지며, 유르스나르가 시대적 이방인으로 살면서 정체성을 인정하고 떠난 알렉시와의 연관성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을 끝까지 읽은 후, 모니크의 쓸 수 없는 답장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1. 모니크의 삶
유르스나르는 머리말에서, “모니크의 이야기는 알렉시의 고백보다 더 쓰기 어려울 것”이라며 포기했다고 밝혔다. “여성의 삶은 세상에서 가장 은밀”하기에 모니크의 목소리가 없는 것이 필연적이라는 유르스나르의 대답은 ‘침묵’과 ‘음악’이라는 『알렉시』의 두 키워드를 생각하면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유르스나르가 심혈을 기울여 발굴하고 복원해 낸 알렉시의 목소리,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고백 바깥에 존재하는 또 다른 침묵, ‘모니크의 삶’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다.
작중 모니크라는 인물은 알렉시에게 마치 어머니의 자애로움을 형상화한 듯한, 고요하고 모성적인 평화의 세계이다. “등불처럼 잔잔한” 모니크는 아름답고 착하고 부유하다.
그녀는 알렉시처럼 오랫동안 정처 없이 걷는 것을 즐기며, 생각에 골똘히 잠기는 것을 사랑한다. 알렉시가 서술하는 모든 묘사에서 그녀는 평화로운 수면처럼 미동 없이 고요하다.
그러나 모니크의 삶이 보이는 것처럼 순탄하고 평화롭진 않았을 것이다. 생각에 잠겨 사는 사람은 현실이 아니라 그 생각 안에서 폭풍을 겪으며 살아가니까.
모니크가 알렉시와의 균열을 모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모니크 또한 어떤 형태로 알렉시를 사랑했으며, 그의 곁에서 침묵으로 일관하며 자리를 지켜온 사람이니까. 남편인 알렉시가 떠나고 남은 자리에서 모니크는 여태 끌어안고 살았던 징조의 결정을 발견할 것이다.
남편 개인의 절절한 인생사를 편지의 형태로 읽는 모니크의 모습은 어땠을까. 한 세계를 받아들이는 동안에도 모니크는 침묵했을 것이다.
긴 편지를 읽는 내내 소리를 지르거나 정신없이 달려 다니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어쩌면… 이라는 단어는 수많은 만약을 생각하게 만든다.
어쩌면 알렉시와 모니크는 만나지 않을 수도 있다. 어쩌면 알렉시와 모니크는 헤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어쩌면 알렉시와 모니크는 서로에게 서로의 내면을 보여줄 수 있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알렉시와 모니크는 솔직하게 눈과 입을 통해 자신을 고백하고 함께 관계를 정리할 수도 있다.
물론 그 수많은 만약을 뒤로 하고 이 소설이 이렇게 쓰인 이유는 명확하다. 서문에서조차 작가는 ‘동성애’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우회적인 표현을 사용한다.
“금지의 낙인이 찍혀 있”으며, “불법으로 간주되었던” 주제인 동성애에 대해 이야기하기 이전, 그 목소리가 얼마나 억압되어 있었는지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2. 언어를 믿지 못할 때
서간체 형식이라는 특징적 형태의 이 소설은 1929년에 출간되었다. 동성애와 커밍아웃이라는 파격적인 주제와 달리 소설의 문체는 굉장히 유려하고 우아하다.
시간과 순간을 넘나드는 편지 속 알렉시의 여정과 더불어 머뭇거리는 듯한 망설임의 음역을 만들어낸다. 한 세기도 훨씬 전, 알렉시와 모니크의 세계에서 동성애란 기독교에선 악덕에 속하였다.
알렉시의 세계는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인 구조에서 명확히 분류되어 있었기에 그가 진실된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유년 시절의 알렉시는 많은 식구들과 함께하였으나 그중 누구와도 진실되게 소통하지 못하였다.
중학교 시절 그러한 소통의 부재는 더욱 심화되었으며 그속에서 자신의 성적 지향성까지 깨달은 알렉시는 결국 무너지며 죽음까지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알렉시의 마음속에서 음악이 발견되므로 알렉시는 자기자신을 긍정하며 화합을 이룬다. 그렇게 음악을 통해 알렉시는 구원받은 듯 보이나, 귀향한 후 만나게 된 남자의 몇 주 간의 관계로 인해 그는 또 한 번 정체성의 파멸에 다다른다.
그로 인해 유학을 결심하고 어머니에게 자기자신을 고백하기 전 하녀의 등장으로 인해 알렉시는 또 한 번 완전히 기회를 놓치며, 다시 침묵에 빠져들게 된다. 이후 알렉시의 삶은 언뜻 보기엔 성공 궤도처럼 보이나 그 스스로에겐 “반쪽짜리 성공”이다.
3. 음악이라는 발화구
공허한 삶과 끈질긴 내적 투쟁 속에서 알렉시는 자애로운 모니크를 만나게 되고, 평화로운 삶을 이룩하게 된다. 그러나 알렉시는 억압된 삶 속에서 음악이라는 발화구를 잃게 된다.
그에게 음악이란 억압된 자신의 욕망을 침묵이라는 가장 명확한 형태로 내뱉을 수 있는 유일한 매개체였기 때문이다. 결국 알렉시는 그러한 이상을 쫓고, 화합하기 위해 모니크에게 작별을 고하게 된다.
피아니스트는 입을 열지 않는다. 피아니스트는 입을 닫는 고요, 침묵 속에서 오직 피아노로 말한다.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 『알렉시』 중
침묵의 세계에서 자라온 알렉시에게 음악은 유일하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입을 닫고, 눈을 맞추지 않고, 대화하지 않고도 오롯이 나 자신일 수 있는 공간이자 발화구였던 것이다.
알렉시가 존재 자체로 인정받고 증명될 수 있는 순간은, 자신에 대해 어떤 설명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질 때이다. 그럼에도 자신에 대해 맘껏 표현할 수 있을 때가 음악을 할 때이기에 알렉시에게 침묵과 음악은 떼어놓을 수 없는 자기 증명의 수단인 것이다.
사과를 사랑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사과 하나다. 그러나 자아와 언어를 가진 사과를 사랑할 수는 없다.
내가 사과 하나를 가지고 있더라도, 자아와 언어를 가진 사과는 내가 가진 사과와는 완전히 다른 사과이기 때문이다.
4. 언어에 대한 불신, 그럼에도 펜을 든 이유
알렉시는 언어에 대한 불신으로 편지의 화두를 밝힌다. 말과 글은 생각을 왜곡한다면서도, 자신의 삶을 설명하기 위해 펜을 들어 글을 쓴 것이다.
말이 가닿기 위해선 가닿았으면 하는 그 사람의 언어로 가공하고 닦아내야 한다.
우리는 각기 다른 곳에서 내 것이 아닌 말과 언어를 모국어로 배우고 자랐기에, 완전히 소통할 수 없다.
수많은 생략과 가공 속에서 왜곡된 언어를 내뱉게 되지만, 그러나 그 속에 내비치는 진심을 통해 진실로 소통할 수 있다.
알렉시의 편지를 받은 모니크가 어떻게 살아갈지, 어떻게 받아들일지 우리는 차마 상상할 수 없다. 알렉시의 고백이 폭력적이고 비겁한 변명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알렉시가 살아온 삶의 수없는 굴레와 장벽과 알렉시가 모니크에게 부치기로 한 이 편지 전, 버려졌을 가닿기 위한 수많은 편지들, 명확히 적히지는 않았으나, 그 생략에서 읽히는 망설임과 죄책감을 우리는 선명히 느낄 수 있다.
그렇기에 양쪽의 마음에 서서 어떤 형태로든 알렉시와 모니크가 가장 나은 형태의 화합을 선택할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양예지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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