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기록된 몸과 되어가는 몸이 보여주는 화려한 서커스 - 무용극 '샤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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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극에 대한 감상을 쓸 때마다 어떻게 쓰는 것이 적절한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아마 나만이 느끼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무용극, 특히 현대 무용극은 뚜렷한 서사를 중심으로 전개되지 않아 불연속적으로 지각되는 데다가 단숨에 포착하기 어려운 주제들을 다루기 때문이다.
언어가 아닌 몸을 중심으로 표현되는 점도 감상 쓰기에 난관에 처한다. 무용 동작은 찰나에 이루어지고, 움직임에 따라 표현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무형적이다. 서사를 통해 언어적 표현으로 치환되어 저장되는 다른 작품과 비교해 머릿속에 오래 머무르지 못한다. 의상, 배경, 수, 동작의 조합에 따라 다층적인 의미 구조를 만들 수도 있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무용의 해석은 어려운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무용극을 쓸 때마다 무용극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내가 보는 '지금'에만 무용극이 존재하고, 보고 나온 뒤에는 흐릿한 표상으로만 남아있다면, 찰나와 무형의 예술인 무용극은 어떻게 보존되고 감상이 공유될 수 있을까? 비디오로 녹화되면 무용극은 이러한 한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무용수의 존재감, 특정한 시공간, 다양한 초점과 구도가 사라진 녹화 비디오를 통해 무용극은 보존된 것이 맞을까?
'샤잠'은 이에 대한 필립 드쿠필레의 답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필립 드쿠필레는 가볍고 대중적이라는 비판을 들은 바 있다. 실제로 드쿠필레의 작품은 순수무용에서 기대되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만화, 전자 음악, 영상, 서커스와 같은 다양한 매체를 아이디어로 빌려 와 일종의 스펙터클을 제공한다. 하나의 장면에서 수십 개의 시각적 요소가 도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의 작품세계에는 착시를 일으킬 정도로 시각적 자극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샤잠'은 일견 다른 매체에서 끌어온 요소들이 '춤'이라는 본질을 가리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포스트 모던 철학의 흐름을 타고 순수무용을 다룬 작품들은 종종 몸의 본질로 돌아가고자 하는 경향이 있는데, 드쿠필레의 작품은 다양한 요소가 동시에 진행되어 혼란스럽게 느껴지는 데다가 특유의 만화적 과정과 유머가 깃들어 가벼워 보이기 까지 보인다.
하지만 '샤잠'을 곱씹을 때마다 그의 작품들이 '가볍고 대중적'이라는 감상이 얼마나 역설적인 매력을 자아내는지 감탄하게 된다. '샤잠'은 정말로 '가볍고 대중적'이다. '샤잠'은 무용수들이 긴 털모자를 쓴 무용수들과 서커스와 음악대가 LG아트센터의 1층과 2층을 오가면서 시작한다. 그들은 작품의 시작되는 시간에 관객들과 똑같은 문으로 입장하여 무대로 들어간다.
1시간 반의 무용극이 시작되면,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눈을 즐겁게 하는 무대가 이어진다. 프레임을 활용한 장난스러운 영상, 영상 속 장면을 그대로 재현하는 무용수들, 거울을 두고 똑같이 움직이는 두 무용수, 딱딱해 보이는 드레스를 입고 인형처럼 움직이는 무용수와 같은 진귀한 구경을 할 수 있다.
각 장면들 중간중간에는 필립 드쿠필레와 그와 함께 일하는 무용수들이 등장하여 농담 같은 문답을 하고 퇴장한다. 그래서 '샤잠'은 기본적으로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대중적인 무용극이다. 작품을 감상하다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어린 시절 보았던 신기한 서커스처럼 이상한 향수와 원초적인 즐거움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작품이 기본적으로 놀라움과 기쁨을 의도하고 만들어졌다는 증거다.
하지만 이 대중성과 가벼움이야말로 드쿠필레의 천재성이 드러나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샤잠'은 근본적으로 '몸의 표현'에 대한 애정과 성찰이 돋보이는 정밀한 실험으로 가득 차 있는 작품이다. 이 아이러니가 정말 큰 감동을 준다. '샤잠'은 서커스인 동시에, 서커스를 만드는 몸에 대한 긍정으로 흘러 넘친다. 기술에 대한 고찰로 가득차 있지만, 기술을 다루는 몸을 긍정한다. 서커스로서의 부분은 충분히 이야기했으니, 내가 감상한 드쿠필레의 '고찰' 부분을 크게 두 가지(기술과 무용, 영원과 현존)로 나누어 해석해보고자 한다.
첫째, '샤잠'은 '기술과 무용'을 다룬다. 칸 영화제를 기념하여 만들어진 초기 버전의 '샤잠'을 변형한 작품답게, '샤잠'은 영상 매체의 속성을 적극 끌어들인다. '샤잠'은 영상을 보여주면서 시작된다. 영상 속에서는 기하학적인 모양의 틀이 여러 개 겹쳐져 있다. 무용수들은 중첩된 틀 속에 자신의 눈, 코, 입을 들이대기도 하고, 안쪽의 프레임에 있는 사람을 때려서 날려버리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도 하고, 프레임을 입에 물고 돌리기도 하고, 마구 흔들기도 한다. 무용수들은 때로는 프레임 안 속에서 움직이고, 때로는 밖에서 움직인다. 관객들은 무용수들이 몇 명이 있는지, 어떤 동작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환상적인 영상을 감상한다.
이어 무용수들이 장난스럽게 LG 아트센터 주변을 뛰어다니는 영상이 상영되고, 영상과 현실을 이어 놓은 것처럼 등장한 무용수들과 연출팀이 무대에 영상에 등장했던 기하학적 프레임이 나란히 놓는다. 그리고 그 맨 앞에 빌려 와 등장해 카메라를 놓아 전에 보았던 영상의 구도를 맞춘다.
무용수들은 이전과 똑같이 영상을 재현한다. 하지만 관객들은 찍히는 영상과 전혀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이제 관객들은 각 무용수가 움직이는 모습, 카메라 밖에서 무용수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본다. 실시간으로 촬영되어 관객들에게 전달되는 영상에서는 이전과 똑같이 현실에서 재현 불가능한 마법이 펼쳐진다. 하지만 영상 밖에서는 모든 사람이 땅을 딛고 여러 사람이 움직이는 방식을 볼 수 있다.
이와 비슷하게 기술이 주는 착시성을 활용한 '거울'을 활용한 부분도 주목할만하다. 어두운 무대 사이로 돔처럼 펼쳐진 세 면의 거울이 내려오고, 빨간색 옷과 파란색 옷을 입은 두 무용수가 등장한다. 두 무용수는 거의 거울에 비친 것처럼 똑같이, 하지만 정 반대로 움직인다. 그런 두 무용수를 비추는 거울들은 그들의 모습을 여러 면으로 다시 쪼갠다.
무용수의 다양한 방면에 시선이 집중된 동안, 거울의 투명도를 낮춰 새로운 여성 무용수 둘을 거울 뒷면에 등장시키거나, 여러 배우를 대기시켜 거울 한 부분에만 조명을 주고 만화 컷과 같이 연속적으로 움직이게 하거나 하여 실제로 보이는 몸이 할 수 있는 표현을 무한히 확장시킨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영상의 몸', '거울의 몸' 들을 접하는 과정에서 관객들은 배우들의 '실제의 몸'을 발견하기 위해 애쓰는 자신을 발견한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주제는 작품의 주제를 마무리 영상에서 반복하고 있다고 본다. 배우들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무대 전면을 꽉 채운 영상은 다양한 색의 쫄쫄이 옷을 입은 무용수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흔히 볼 수 있는 동작에서 시작해 점차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동작들을 구현한다.
하지만 중력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영상을 자세히 보면, 검은 배경 속에서 그것을 재현하기 위한 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장면들을 통해 드쿠레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나는 기술이 주는 환상성과 무용이 주는 즉흥성을 보기 좋게 조화시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술은 관객과 배우들이 몰입하여 즐길 수 있을 정도로의 환상을 보여줄 뿐, 그것을 구현하는 것은 모두 무용수의 '몸'이다.
두 번째, '샤잠'은 '영원과 현존'을 다룬다. 이는 '기술'과 '인간'이 될 수도 있지만, 카메라에 담긴다고 해서 담기지 않는 현존의 예술인 '무용' 자체에 대한 고민이오, 그 무용을 재현하는 '무용수의 몸'이라는 예술언어에 대한 고민이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무용극을 온전히 보존하는 것은 어렵다. 앞서 내가 기술했던 무용 자체가 가진 특성도 있지만, 그 무용을 재현하는 인간의 몸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부분만큼은 무용이라는 범위에 제한되지 않는다. 우리는 종종 가장 찬란한 시기에 최대의 가치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은퇴한 무용수를 상상해본 적 있는가? '몸'을 주 언어로 쓰는 무용수는 자신의 언어가 변해간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낀다. 시간이 지나면 몸은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주지 못한다. 하지만 더이상 그만큼 다리가 올라가지 않고 매끈한 몸매를 가지지 못한다 해서, 이전의 작품을 그대로 재현하지 못한다고 해서 '작품의 가치가 떨어졌다'라거나, '보존되지 않는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리뉴얼된 '샤잠'은 예술언어로서의 몸에 깃드는 시간마저도 긍정하는 방향으로 무용 예술을 보존한다. 아니, 정정해서 표현해보면 보존하지 않고 그 가치를 시간을 붙여 '이어간다'. 그 작품을 이어가는 무용수가 살아있는 한, 드쿠필레가 그 작품에 여전히 생명력을 보존하는 이상 시간은 원본의 가치를 떨어뜨리지 않는다. 역으로 이는 무용극이 녹화되지 않은, 생생한 현장에서 여전히 존재해야 하는 이유다. 기술이 지금 수준보다 더 발달해서 현장과 같은 느낌을 준다고 해도, '착시'가 아닌 시간이 깃들어 변화하는 '실재'로서의 몸은 그 순간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샤잠'의 변형 속에서 기술과 쇠락해진 몸은 무용수를 압도하지 않는다.
첫 번째 관점에서 해석할 때는 '무용수의 몸'에 깃든 시간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실제 '샤잠'을 볼 때 무용수가 지나온 시간은 좀 더 직접적으로 느껴진다. 드쿠레와 무용수들이 직접 등장해서 이 부분을 언급하기도 하지만,이전의 영상의 모습과 춤추는 무용수의 몸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문외한으로서 그들이 얼마나 전성기 때의 그들과 비교해서 재현에 어려움을 느끼는지 알 수 없지만, 영상 속 그와 무대 위의 그 모두 생생한 현실에 땅을 딛고 춤춘 같은 존재라는 점은 관객들에게 깊게 각인되었다.
드쿠필레는 “이 공연은 기술적인 이유, 예술적인 이유, 그리고 여전히 알 수 없는 이유들로 인해 아직 미완성입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그리고 그 자신, 무용수들의 입, 번역가의 입을 통해 자신들이 '몸으로 말하는 것'이 익숙하다고도 이야기한다. 기술은 사람의 사고와 존재방식을 결정하고, 그 속에서 철학이 탄생한다. 드쿠필레와 무용수들은 나이가 들고, 기술과 철학이 변화하는 만큼 그들의 삶도 변화한다.
'샤잠'이 진정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기술과 철학 속에서 변화하는 몸 그 자체라면, 앞으로도 샤잠은 영원히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몸은 늘 무언가가 '되어가는 중'이기 때문이다. 드쿠필레가 샤잠에 깃드는 몸을 긍정하는 한, '샤잠'의 전개와 마무리에서 무용수가 '생각하는 사람' 취할 수 있는 한.
[이승주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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