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나는 20대의 나는 아주 멋진 일을 하는 사람이자,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하는 성숙한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렸을 때에는 하루빨리 어른이 되기를 바랐던 것 같다.
고등학생 시절, 학교에 교생 선생님이 오셔서 약 한 학기 동안 같이 생활했던 경험이 있다. 그때만 하더라도 교생 선생님들은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붙어서인지 고등학생이었던 나 자신과는 아주 먼, 성숙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선생님들은 걱정도 없고, 꿈을 이룬 사람으로 생각했었다.
시간이 지나고, 지금의 내 나이가 그때의 교생 선생님의 나이가 되어보니 내 자신은 그렇게 멋있고, 성숙한 어른이 아니라는 생각과 미래에 대한 고민과 걱정들로 가득한 시기가 되었다.

그 나이 때마다 걱정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하나의 걱정거리가 해결되면 그 뒤에 따라오는 걱정이라는 산을 넘어야 한다.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미래에 대한 걱정과 삶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고통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최근에 친구들과 이야기하면서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항상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고,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 고통에 무뎌지는 것'이라는 대화를 하게 되었다.
'고통에 무뎌진다.'
어렸을 때는 하나의 일에 대해서 일희일비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는데 점점 나이를 먹어가고, 다양한 경험을 할수록 이전에 경험했던 일이 아니라면 그리 크게 감정적으로 반응하지는 않는 것 같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고민들은 왜 더 많이 하게 되는 것일까.
어니 젤렌스키의 '모르고 사는 즐거움'에 쓰여진 문구에 따르면
걱정의 40%는 절대 현실로 일어나지 않는다.
걱정의 30%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것이다.
걱정의 22%는 사소한 고민이다.
걱정의 4%는 우리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는 일에 대한 것이다.
걱정의 4%는 우리가 바꿔놓을 수 있는 일에 대한 것이다.
즉 우리가 걱정하는 것 중 4%만 우리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기에 나머지 96%의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실천하기 힘든 이유는 앞으로의 미래를 그 누구도 알 수 없고, 알지도 못하고, 누군가가 알려주지도 못하기 때문에 더 걱정과 고민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너무 쓸데없는 걱정들로 힘을 빼고 있다는 것을 자각할 때마다 '지금 해야 할 일부터 생각하자'라며 마음을 다잡곤 한다.
적당한 걱정을 한다는 것은 미래를 대비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필요하겠지만 깊은 걱정에 빠져 자기 자신을 돌보지 못하고 빛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모두에게 각자의 걱정거리들이 있다. 그렇지만 그 걱정의 크기와 중압감에 눌려 힘들게 살아가지 않아야 한다.
